200화
“…….”
노인은 내 인사에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뭐 아니라곤 안 하는 걸 보면 맞긴 하네.’
“뭐, 뭐라구요?”
“이 노인네가… 허윽…….”
껄렁거리던 기사 생도 둘은 언제 그랬냐는듯 딱딱하게 굳은 채 옆에 서 있었다.
둘은 자기네들이 틸리안한테 했던 게 생각났는지 오돌오돌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틸리안은 기사 생도 둘보단 날 경계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물러선 지 수십 년도 더 된 노인이었지만, 그의 눈빛엔 아직도 생기가 가득했다.
틸리안 제니스.
소설 중반부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잠시 인생에 허무함을 느껴 방황하던 주인공.
고아로 자라 기사 학교까지 졸업했건만, 정처 없이 떠도는 용병 인생에 염증을 느낀 거다.
그렇게 졸업했던 제니스 기사 학교를 방문하곤 한 노인을 만난다.
추레한 행색에 평범한 외모 탓에 녀석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를 대한다.
가볍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그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다시 여행에 나선다.
이후로 다시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의 극 후반부.
주인공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것처럼 묘사됐지만, 그도 결국 라크레시아의 손에 죽는다.
‘지금 난 그걸 확인해 보려는 거고.’
디아가 가진 비밀.
지금껏 얻은 정보로 어느 정도 유추는 가능했다.
하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임페라 공작.”
“음. 잘 알고 계시군요. 작위 수여를 한 지 채 며칠도 안 됐는데.”
틸리안은 주변 정세에 빠삭한지 이미 내가 공작으로 승격한 걸 알고 있었다.
“고, 공작……?”
“허억!”
괜히 옆에 끼인 기사 생도 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공작이란 거진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사람한테 백작이라 불렀으니 당장 경을 쳐도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귀찮기도 했고.
“당신 같은 작자가 왜 나 같은 늙은일 찾는 건지 모르겠군.”
틸리안은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거……?”
“그게…….”
댕~!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무거운 종소리.
덕분에 내뱉었던 말이 종소리에 묻혔다.
게다가 그 뒤를 이어…….
“와아아아!”
“내가 먼저야!”
방금 종소리가 점심시간 종소리였나 보다.
한창 먹을 때인 기사 생도들이 교습소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이대가 다양한 기사 학교긴 해도 어린애들이 대부분이다.
다들 한창 먹을 때다 보니 그럴 만했다.
“…여긴 대화를 나누기엔 불편하겠군요.”
“…마치 내가 그쪽과 대화를 할 것처럼 얘기하는군.”
어물쩍 녀석을 데리고 조용한 데로 갈까 했는데.
틸리안은 쉽사리 넘어가 줄 수 없는 듯 한마디 했다.
“뭐 싫으면 어쩔 수 없죠.”
“…….”
“대신 저도 사람인지라 살짝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군요.”
“…….”
이 말에 녀석도 곤란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후후.”
사실 틸리안이 높은 사람들만 만나 주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카잔 제국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제니스 가문 대부분이 카잔의 편을 들었던 이상.
제니스 기사 학교도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다.
어중띤 귀족들이야 적당히 쌩까면 그만이다.
하지만 에런골드나 주에른 같은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언제든 연합에 입김을 불어넣어 제니스 기사 학교를 해체시켜 버릴 수도 있으니까.
때문에 싫지만 어떻게든 국왕급 되는 녀석들이랑은 가끔씩 만났다.
이래 봬도 난 공작.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제니스 기사 학교를 조질 수 있는 자리다.
예를 들면 학교 입구 쪽에 큼지막한 동상을 세워 막아 버린다든가.
‘뭐 그런 치졸한 짓까지 할 생각은 없다만.’
그냥 예를 들어 본 거다.
“…알겠소.”
지금껏 반말을 해 오던 틸리안이 조금은 높이는 듯한 말을 했다.
나이 팔십 가까이 먹은 노인한테 꼬장 부리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안 먹힐 테니까.
“따라오시오. 내 조용한 장소를 아니.”
“후후. 그래요.”
난 싱긋 웃으며 틸리안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기사 생도 둘이 오들오들 떨며 내 눈치를 살폈다.
“들어가 봐. 너네 둘도.”
“예, 옙!”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은 호다닥 자릴 비웠다.
* * *
기사 학교 한켠에 자리 잡은 교사 건물.
기사 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 옆엔 통학이 힘든 생도들을 위한 기숙사도 마련되어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만.”
겉보기엔 내가 다니던 중학교랑 비슷한 분위기다.
‘뭐 거기야 1차 대격변 때 박살 났지만.'
대피소랍시고 사람들 모아 놨다가 엄청 죽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여긴 훨씬 낫다고 해야 하나.
당장 먹고 죽을 걱정은 없으니.
“…들어오시오.”
틸리안은 교장실이란 팻말이 적힌 방으로 들어섰다.
교장실이라기엔 다소 후줄근했다.
탁자 하나에 의자 몇 개.
옆에 빼곡히 꽂힌 책장 때문인지 교장실보단 도서관 느낌이 강했다.
꽤나 오랜 기간 비워져 있었겠지만 관리는 매일 했나 보다.
다들 먼지 하나 없이 상태가 양호했다.
“…앉으시오.”
“고맙습니다.”
제 자리에 앉은 그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걱정 마십쇼. 그리 거창한 걸 물어보려는 건 아니니까.”
“…….”
“디아 제니스. 그 친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역시.”
틸리안은 알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뭔가 있긴 하군.’
그가 기사 생도들을 끔찍이 여긴다 해도, 모든 기사 생도들의 행적을 알고 있을 순 없다.
보아하니 따로 디아에 대한 뒷조사를 계속한 것 같은데.
‘그래서 날 곧바로 알아보는 걸 테고.’
소설에서 보면 따로 이유가 있어 디아를 기사 학교에서 키운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틸리안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풀리지 않은 떡밥 중 하나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없소.”
“…왜죠?”
“…누군가와 한 약속 때문이오. 이를 어겼다간 나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도 화가…….”
“오베론 말씀이십니까?”
“뭣……?”
정곡을 찔렸는지 틸리안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오베론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미 죽었거든요.”
“뭐, 뭐라고?”
녀석은 아직 오베론이 돌덩이가 돼 버린 걸 모르는 듯했다.
‘조화에 당했으니 따지고 보면 죽은 건 아니지만…….’
심장 박동이 멈춘 채 꿈쩍도 못한다.
그게 죽은 거지 뭐.
“그게 가능할 리가……!”
녀석은 믿기지 않는 듯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하기야 오베론씩이나 되는 녀석이 죽었다는 걸 믿기란 어렵긴 했다.
당장 나도 석상이 된 녀석을 마주했을 땐 현실을 부정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오베론은 죽었다.
주인공 녀석의 손에.
지금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다.
“그럼…….”
난 틸리안에게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줬다.
라크레시아가 등장했고, 그가 깽판을 치고 다니는 것부터, 베론의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까지.
그리고 거기에 황혼이 있었단 사실까지 알려 줬다.
“그, 그게 사실이란 말이오?”
“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입니다. 하지만.”
난 창 밖에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햇병아리 생도들을 쳐다봤다.
“제가 말한 재앙으로부터 이곳 기사 학교가 안전할 거라 생각은 마십쇼.”
“허…….”
틸리안은 지금껏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당신의 이야기를 다 믿는 건 아니오.”
“…….”
“…그러니 나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길 해 주겠소.”
“호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계속 싫다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적어도 이건. 내 아이를 보듬어 준 주인이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오.”
“…고맙습니다.”
“…후.”
틸리안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대전쟁 당시. 카잔 황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게 뭘 것 같소.”
“…아마도 무관의 왕들이었겠죠.”
왕관이 없는 왕.
기사왕, 마법왕 그리고 무투왕 셋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소. 카잔 황제. 그는 영악한 자였지만 끝내 무관의 왕 하나를 포섭하지 못했소. 그 결과 패배한 거고.”
“그랬죠.”
무투왕은 그의 분노를 자극해 대전쟁을 일으켰고.
기사왕은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카잔의 편에 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법왕 오베론만은 달랐다.
그는 결국 카잔의 편을 들지 않았고, 그 결과 황제에겐 최악의 적이 됐다.
“하지만 그라고 오베론을 포섭하려 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오.”
“…그런가요?”
“애초에 그는 마법왕의 수제자였으니까.”
“으음. 그랬죠.”
그 부분은 소설에서 나온 부분이다.
마법왕 오베론이 라피스 마탑주였던 시절.
그의 뛰어난 수제자 중 하나가 바로 카잔 황제였다.
“…그걸 알고 있었다니.”
틸리안은 의외였다는 듯 입을 이죽였다.
“뭐 백작…이 아니라 공작쯤 되면 아는 게 많아지니까요.”
사실 이건 대외적으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카잔에 대한 역사 자체가 지워진 지 오래니까.
게다가 마탑주인 오베론마저 자취를 감췄고, 연합 입장에선 알려져서 좋을 건 없는 사실이라 끝내 묻어 버렸다.
‘대단한 놈이었다지.’
불과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마법 랭크 7에 도달한 남자.
수제 중의 수제.
그게 카잔의 젊은 시절 별명이었다.
“뛰어난 놈이었지. 차라리 녀석이 내 밑에 있었다면 이렇게까진…….”
틸리안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
미안하지만 녀석은 검술 랭크도 7까지 찍었던 괴물이다.
스승은 다름 아닌 리온 카이세리우스.
아마 틸리안이 스승이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카잔이 온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던 결정적인 이유.
‘랭크 시스템.’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해도 스스로의 힘으론 랭크 8이 끝이다.
재능과 노력의 여하에 상관없이 그게 끝.
어쩌면 천재였던 그였기에 그런 미친 선택을 한 걸지도 모른다.
랭크 8에 도달한다면, 인간으로서 절대 넘을 수 없는 불합리함과 마주할 테니까.
“하지만 수제자라고 그런 미친 짓에 협조하리란 법은 없을 텐데요.”
“그랬지.”
“그래서 오베론이 결국 카잔의 적으로…….”
“…아니라오.”
틸리안은 착잡한 얼굴로 두 눈을 꼭 감았다.
“오베론이 슬하에 자식이 없단 거. 알고 있소?”
“…그렇죠?”
뜬금없이 자식 얘기는 왜…….
“그만큼 마법에 미친놈이었으니까. 늙어서도 가끔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차라리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이야.”
“흠.”
제 손으로 수백만을 학살한 놈이 뭔.
틸리안은 별안간 주먹을 꼭 쥐었다.
“카잔은 영악한 놈이었지. 그래서 오베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고.”
“…….”
“그래서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오?”
난 틸리안의 물음에 고갤 가로저었다.
“참으로 영악한 놈이야. 오베론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카잔 황제의 아들. 그게 누굴 것 같소?”
“…네?”
“놈은 자식을 낳곤 오베론에게 연락을 했소. 그리곤 말했지. 이번에 새로 태어난 아들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그런…….”
아마 라크레시아의 이야기인 듯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오. 대부로써 갓난아이에게 온갖 정을 쏟기 충분한 시간이었소.”
“…설마.”
“놈은 제 아들을 인질로 삼은 거요. 갓난아이가 역적으로 내몰려 죽는 게 보기 싫다면. 자신에게 협조하라고.”
“…….”
“…하아.”
틸리안은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곤 나지막이 말했다.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을 죽어라 섬기고 있는 불쌍한 아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