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99화 (199/222)

199화

작위 수여식이 끝나고, 그 다음 날까진 테라리움에 머물렀다.

“…….”

테라리움의 테라스에 서서 창 밖을 바라봤다.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흠.”

평화롭다.

갈렌 덕에 그 난리를 겪긴 했지만, 시간의 힘 덕인지 지금은 그 상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

소테라의 풍경을 감상하던 난, 자연스레 한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소테라 한켠에 위치한 제니스 기사 학교.

프리아나와 디아가 졸업한 곳이다.

본점은 지금 흔적도 없이 박살 난 상태다.

그건 다름 아닌 카잔 제국에 속해 있었으니까.

카잔 제국이 멸망하고 제니스 기사 학교는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제국의 편에 선 이들은 당연히 모두 처형 당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검술 비급이나 아티팩트도 잔뜩 남아 있었다.

게다가 대륙 최강의 무력 양성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리는 건 연합의 입장에서도 아까웠다.

때문에 이를 잘게 나눠 대륙 곳곳에 흩뿌렸다.

아이소테르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분점 중 하나.

그래도 다른 분점들과는 달리 가장 규모가 크긴 했다.

본점이 망해 버렸으니 여길 본점이라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당장 지금은 본점이라 해도 무방할 거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그 녀석’이 아이소테르에 있으니까.

‘틸리안 제니스.’

제니스 기사 학교의 교장.

제니스란 성을 갖고 있지만, 그는 고아 같은 게 아니다.

뼈대 있는 검술 가문, 제니스 가문의 이름을 따 제니스 기사 학교가 만들어진 거지.

마법에 베로니아 가문이 있듯이, 검술엔 제니스 가문이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제니스 가문은 카잔 황제의 편에 들었다.

틸리안은 자신은 정치보단 후진 양성에 관심이 있다며 줄 서길 거부했다.

기사로서 경지는 높았지만, 방계 출신이었기에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대전쟁에서 카잔 제국은 패배했다.

덕분에 그는 제니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게 됐다.

카잔 제국의 패배를 예견한 건 아닐 거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어찌 보면 운이 나빴다고 해야할까.

그가 중립을 표했음에도 제니스 기사 학교는 뿔뿔이 흩어져 대륙 전역으로 뿌려졌으니까.

이로 인한 상실감 탓이었을까.

틸리안은 대전쟁 이후 명예직으로나마 교장 자리에 있을 뿐 공석엔 나서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실은 죽었을 거란 소문까지 나돌까.

하지만 난 안다.

녀석은 아직 안 죽었다.

‘지금쯤 꼬부랑 할배겠구만.’

대전쟁 당시에도 오베론과 동년배의 늙은 노인이었다.

늙은 몸을 이끌고 대륙 전역의 기사 학교를 순방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기사 학교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갈렌이 소테라에 제물의 의식을 펼쳤을 당시, 그가 여기 있었다면 끔살 당했을 거다.

‘뭐 그땐 빈트하겐이 갈렌 편이었으니 녀석도 쉽게 나서긴 어려웠을지도.’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시점에선 그가 이곳 소테라의 제니스 기사 학교에 있다는 거다.

소설에서 그는 디아가 졸업하고 난 후 2,3년 정도 아이소테르의 제니스 기사 학교에 머물렀다.

‘이슬린이 확인까지 해 준 정보니 그건 확실할 테고.’

그리고 지금 난.

녀석을 만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문제는 놈이 날 만나 주냐는 건데.’

대전쟁 이후 줄곧 모든 귀족들과의 만남을 끊은 녀석이다.

그래도 소설에서 에런골드나 주에른 같은 녀석들을 만나긴 했다.

그렇다는건 아예 칩거한 건 아니란 건데.

‘공작쯤 되면 만나 줄 것도 같고…….’

탁.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침실로 들어왔다.

가벼운 차림새의 이글렌이었다.

“…여왕님.”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 달라니까요.”

“후후. 그래요, 이글렌.”

이글렌은 뭔가 할 게 있는지 카트 한가득 뭔갈 가져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으음. 그냥 뭐… 이런저런 생각 중이었죠.”

“그러지 말고 이리로 와 봐요.”

이글렌의 손짓에 난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파락.

그제야 이글렌은 카트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통으로 구운 빵과 속재료, 그리고 따뜻한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뭐죠……?”

“뭐긴요? 남편한테 밥 한 끼 차려 줄려는 거지.”

“아.”

이글렌은 여왕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공주였다. 그냥 공주님, 공주님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공주.

덕분에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자라 왔다.

그런 여자가 손수 밥을 차려 준다니.

“…감동이네요.”

솔직히 감동한 건 맞다. 하지만 뭔가 불안하달까….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요.”

“…….”

난 기대 반, 걱정 반인 눈빛으로 이글렌의 솜씨를 구경했다.

먼저 딱딱한 빵을 자르고 그 안에 얇게 저민 햄을 끼워 넣었다.

그다음 야채랑….

텁.

‘…끝?’

“아~ 하세요.”

“아, 아아…….”

이글렌은 방금 만든 샌드위치를 내 입에 넣어줬다.

“음…….”

“…어때요?”

샌드위치는 부드러운 빵에 해야 된다.

딱딱한 빵에 할 거면 소스로 폭신하게 만들든가.

빵과 속재료 본연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샌드위치라.

다재다능한 그녀인 줄 알았지만 요리엔 영 인연이 없는 듯했다.

“…맛있네요!”

그래.

아무렴 어떻겠나.

마누라가 손수 만들어 준 샌드위친데.

“정말요? 하핫! 태어나서 처음 만들어 보는 건데!”

“으음… 재,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이글렌은 신이 나가지곤 샌드위치 한 조각을 더 입에 넣어 줬다.

난 목이 메이는 걸 꾹 참곤 묵묵히 받아먹었다.

카트에 놓인 뜨끈한 차 한 잔이 눈에 아른거렸다.

“실은 어려서부터 이런 걸 꿈꿔 왔거든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밥 한 끼 해 주는 거.”

“으음.”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지만… 꿈을 이뤄서 다행이네요.”

“그, 그렇군요.”

“그럼 저도 한입…….”

그렇게 한창 샌드위치를 썰어 주던 이글렌은 이번엔 한 조각 썰어 자기 입에 넣으려 했다.

저걸 먹는 순간 내가 한 거짓말들이 들통나고 말 거다.

이글렌은 요리에 재능이 없는 거지 입맛은 고급지니까.

“자, 잠깐만요.”

“…네?”

“저도 그런 꿈이 있어서요. 당신껀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흐흠. 그래요. 그럼.”

이글렌은 신이 난 듯 헤실댔다.

카트를 뒤적이자 별 게 다 나왔다.

생크림부터해서 과일도 있고, 소시지는 종류별로 다 있었다.

‘빵도 부드러운 게 있었구만.’

난 제일 폭신한 빵을 고르곤 그 위에 생크림을 얹었다.

그리고 아삭하면서도 물렁물렁한 붉은색 과일을 한입 크기로 썰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딸기 비슷한 맛이 나는 과일이다.

아무튼 생크림을 얹은 빵 위에 과일을 올리고, 반대쪽 빵엔 달콤한 잼을 얇게 펴 발랐다.

텁.

그러자 한때 지구에서 인기를 끌었던 달콤한 샌드위치가 완성됐다.

너무 달아서 자주 먹을 건 못 되지만, 가끔씩 땡기는 녀석이다.

“자, 드셔 보십쇼.”

“전 안 먹여 줄 거예요?”

“으음. 그래야죠.”

나이프에 검기를 불어넣자 푸른 오러가 옅게 나타났다.

서걱.

오러 소드에 베어진 샌드위치는 한입 크기로 깔끔하게 잘렸다.

깔끔한 단면 너머로 하얀 생크림과 붉은 과육이 맛깔나게 빛났다.

“오… 이런 식으로 먹는 건 처음 봐요!”

“고향에서 가끔씩 먹던 겁니다.”

“후후. 임페라 가문에서 먹던 빵이라. 기대되네요!”

이글렌은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렸다.

조심스레 샌드위치를 집어넣어 주자 이글렌이 입을 오물거렸다.

“…음! 뭐예요 이거? 진짜 맛있네요!”

“하하.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자. 그럼 이안도 마저 먹어요.”

“으읍… 네…….”

그렇게 서로를 향해 주거니 받거니 한 우린 금세 샌드위치를 다 먹어 치웠다.

* * *

‘이직도 턱이 얼얼하구만.’

후릅.

수통에 챙겨 온 차를 마시며 욱씬거리는 턱을 달랬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글렌은 여왕이다 보니 아침부터 대신들과 회의할 게 많았다.

가볍게 내 볼에 입을 맞추곤 이글렌은 회의 준비를 하러 떠났다.

이글렌도 없는 마당에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난 대충 옷을 차려입곤 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소테라에 위치한 제니스 기사 학교.

지난번 디아의 졸업전을 보러 한 번 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땐 일정이 빡빡해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곧장 졸업전이 열리는 연무장으로 향했었으니까.

“흠.”

제니스 기사 학교의 정문.

엘리트 귀족들만 다니는 학교라 그런지 입구부터 으리으리했다.

학교 전체를 빙 둘러싼 대리석 담장.

학교라기보단 웬만한 귀족 영지 같았다.

문 앞엔 경비병까지 서 있었으니까.

따로 호위 하나 없이 얼쩡거리자 경비병들의 시선이 쏠렸다.

녀석들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째려봤다.

후릅.

수통에 남은 차를 다 털어 넣곤 녀석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멈추십시오!”

“무슨 용무…….”

날선 반응을 보였던 경비병들은 차츰 가까워지자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허억……!”

다행히 날 알아보는 눈치다.

“이, 임페라 백…….”

퍽!

“악!”

옛 호칭을 부르려던 경비병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옆에 있던 경비병 녀석이 옆구릴 찌른 모양이다.

“…임페라 공작님! 충성!”

“아아, 그래. 다들 수고가 많아요.”

날 향해 경례까지 올린 경비병.

옆에 옆구릴 찔린 녀석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이다.

‘멍청아! 어제 공작위 수여식 있었단 얘기 못 들었어?’

‘…아! 그랬지!’

‘넌 내 덕에 모가지 간수한 줄 알아라.'

‘크흑…….’

녀석은 제 목을 더듬거리면서까지 낯빛이 창백해졌다.

모가지가 진짜 목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아닌데.’

예전엔 무시 안 받으려고 일부러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서 사람 대할 때는 사근사근하게 구는 중이니까.

“그, 그런데 공작님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흠.”

그래도 명색에 기사 학교인데, 약속을 잡고 올 걸 그랬나.

나 혼자 생각에 잠겨 있자 녀석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실례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곤 철통같이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응? 사전 통보 같은 건 필요 없나?”

“그, 그럼요! 공작님께서 들르시는 데 무슨 사전 통보가 필요하겠습니까!”

“흠흠. 그렇다면야.”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했지만 굳이 집고 넘어가진 않았다.

기사 학교 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돈 좀 있는 자재들용이라 하나같이 시설들이 번쩍번쩍 했지만, 금으로 칠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로지 기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기사 학교.

저 멀리 보이는 성냥갑 같은 게 연무장이고.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탑 같은 건 교습소다.

검술의 이론이나 기사로서 마음 가짐 같은 걸 배우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아직 수업이 한창이라 그런지 학교 내부는 조용했다.

쓰륵. 쓰륵.

웬 노인 하나가 혼자 교장 한켠을 쓸고 있을 뿐.

그 옆엔 학교 제복을 입은 녀석 둘이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크흐흐! 그래서 내가…….”

‘땡땡이라도 쳤나.’

뭐 그건 나야 알 바 아니고.

난 조용히 녀석들을 향해 걸어갔다.

녀석들은 수다 떠느라 정신없는지 내가 다가가는 것도 몰랐다.

툭.

심지어 과자를 다 먹곤 포장 종이를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

그러자 청소 중이던 노인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이보게 젊은이들. 장차 기사가 될 이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어떡하나?”

“…잉?”

한창 교장을 쓸던 노인이 기사 생도들에게 한마디 했다.

녀석들은 노인의 말에 고갤 갸웃했다.

그리곤 노인을 한 번 슥 훑어봤다.

추레한 행색의 노인.

겉보기엔 그저 청소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뭐야? 언제 봤다고 시비야?”

“시비라니. 그저 다들 내 아들 같아서 하는…….”

“아잇! X팔! 내가 왜 당신 아들이야?”

“으음… 그런 의미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만…….

“시끄러! 얻어터지기 싫으면 청소나 열심히 하라고.”

“낄낄! 내 말이.”

“카악! ㅤㅌㅞㅅ.”

“…….”

놈들은 노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걸쭉한 가래침까지 뱉었다.

더 사달이 나기 전에 나섰다.

“아주 그냥 나이 든 게 벼슬…….”

“…허억!”

녀석 중 한 놈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곤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우리 아빠가 내는 돈으로 다 당신네들 옷도 사 입히고 밥도 멕이고…….”

“야, 야! 입 좀 닥쳐 봐!”

“뭐?”

한창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던 녀석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임페라 백작님?”

“추, 충성!”

“아, 충성까진 필요 없고.”

난 귀찮은 듯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이젠 백작이 아니라 공작이다만, 일일히 그걸 지적하기도 귀찮았다.

놈들은 잘못한 건 아는지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 놈들은 그런 대로 놔두고.

난 빗자루를 든 노인에게 다가가 고갤 살짝 까딱였다.

“반갑습니다.”

“…….”

내가 둘을 말리려 한건 노인이 걱정돼서가 아니다.

저 멍청한 기사 생도 둘을 걱정한 거지.

“틸리안 학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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