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거진 일주일을 쫄쫄 굶었던 터라 식사가 먼저였다.
상황이 상황이라 사람들을 연회장으로 모았다.
이내 이슬린의 지시에 따라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소, 돼지, 닭… 뭐 없는 게 없었다.
거기에 이젠 어느 정도 양산에 성공한 흑차, 수제 콜라까지 대령 해 놨다.
벌컥벌컥.
“…크흐!”
생고생하고 마시는 콜라의 맛이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난 누룽지 빛깔로 맛깔나게 익은 닭다리를 큼지막하게 뜯었다.
“쩝쩝.”
“체하겠어요, 이안. 천천히 먹어요.”
“후후.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체한다고 죽기야 하겠습니까.”
이글렌은 허겁지겁 먹는 날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쩝쩝… 그나저나… 다들 복장이 화려하구만.”
다들 전투 준비가 한창이었는지 갑옷까지 갖춰 입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포르겔까지 전면전은 무리긴 했다.
‘오히려 시선만 끌었지 방해만 됐을 테고.’
“사실…….”
이슬린은 간략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빈트하겐이나 프리아나 같은 힘깨나 쓰는 녀석들로 특공대를 꾸려 놓고 있었다.
내가 남기고 간 공간 도약용 마핵으로 포르겔에 침투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다행이군. 하마터면 쓸데없는 싸움을 할 뻔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하!”
프리아나는 내가 살아 돌아온 게 마냥 좋은지 웃었다.
“그럼…….”
난 계속해서 배 속을 채우며 지금 포르겔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좋은 놈인 줄로만 알았던 르델.
사실 괜찮은 놈이었을지도 모른다.
라크레시아가 녀석을 꼬득이는 바람에 노친내 노망끼를 앞당긴 거지.
인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
그 영역에 발을 들이밀 수 있게 해 준다는데 미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랭크 8에 도달한 녀석들이 으레 겪는 일이기도 했고.
“아무튼. 결국 르델은 죽었습니다.”
“헉…….”
빈트하겐은 팔짱을 꼰 채 이야길 듣다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르델의 경지는 적어도 내 동급, 어쩌면 이상일 것 같았는데.”
“그랬지. 흑마법 랭크 8에 도달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런 녀석을 네가 어떻게…….”
‘네가’라는 말에 이글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백작이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만.”
“그야…….”
난 열심히 발라먹던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땡그랑.
뼈만 앙상히 남은 닭다리가 맑은 소리를 냈다.
“라크레시아가 나타났거든.”
“뭐, 뭐라?”
“그러더니 날 데스 나이트로 만들려던 르델의 심장을 단숨에 뽑아 버렸지.”
“그런…….”
“뭐 제 몸을 리치로 만들어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온전한 컨디션의 르델이었다면 쪽도 못 쓰고 죽었을 거야.”
“허…….”
이 말을 들은 녀석들은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크레시아의 등장.
게다가 녀석은 르델이 아닌 날 도와줬다.
르델을 이길 수 있었던건 순전히 녀석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난 허리춤에 매어 둔 철검을 꺼내 들었다.
“그건……?”
이를 본 디아와 하룬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룬이야 상당한 경지의 대장장이니 가능했던 거고, 디아는 내가 꺼내 든 검이 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녀석과 제니스 기사 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평범한 철검이었다.
‘녀석 거는 지금 잘 가지고 있겠지만.’
꾸욱.
디아는 허리춤에 맨 검집을 꼭 잡았다.
아직 녀석에게 자세한 사정을 얘기해 주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무슨 상황인지는 눈치채고 있을 거다.
라크레시아란 녀석이 왜 황혼을 들고 있고, 그 황혼이 지금 어떻게 된 건지.
“얼마 전에 습득한 에고 소드입니다. 녀석이 희생해 준 덕에 르델을 이길 수 있었죠.”
“아…….”
이글렌은 평범한 철검 위에 손을 얹었다.
“…고맙습니다.”
“뭐 그렇게 해서 녀석을 이길 순 있었습니다만…….”
난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어깰 으쓱했다.
“라크레시아의 목적이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여왕님의 계획엔 상당한 차질이 생기겠더군요.”
“으음. 그렇죠.”
애초에 포르겔까지 간건 라스하겐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난 우군으로 만들긴 커녕 르델을 죽이고 말았으니.
“그럼 그 쿠스켈이란 자는 어떻습니까?”
“…응?”
의견을 낸 건 다름 아닌 이스바르트였다.
덕분에 연회장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지금껏 자기 의견을 잘 얘기하지 않던 녀석이라 어색한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한 번 자세히 얘기해 봐.”
“그… 듣기론 리베라 마공작도 죽었고, 르델도 죽었다해서요. 그럼 쿠스켈이란 흑마법사도 충분히 지배자 자리에 오를 수 있는게 아닌지…….”
“호오.”
“게다가 그의 아들이 와이트 킹으로 거듭나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흑마법사들의 지지를 받기 충분할 겁니다. 랭크 상승이야 아이소테르의 지원만 있다면 언제든 노려볼 수 있을 테구요.”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다.
명분이니 권위니 따지는 아이소테르가 아닌, 힘만이 규칙이 카잔 지방.
쿠스켈도 흑마법 랭크 6이니 제법 강한 축에 속했고, 와이트 킹이란 든든한 지원군까지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 못할 거다.
거기에 셀렌교란 종교의 힘까지 앞세워 놈들을 규합할 수만 있다면…….
“그 사안은 무게를 두고 생각해 보지.”
“헤헷, 감사합니다!”
이스바르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럼 일단 흑마법 자체를 어떻게 할지가 문젠데…….”
난 슬쩍 옆에 앉은 이글렌을 쳐다봤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이글렌이 피식 웃었다.
“그건 제가 해야죠. 여왕이니까.”
“후후. 감사합니다, 여왕님.”
“그리고.”
이글렌은 더 할 말이 있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 당신한테 공작위를 내릴 생각입니다.”
“음.”
슬슬 얘기가 나올 때가 되긴 했다.
다른 이도 아닌 여왕의 부군이다 보니 공작위는 가져야 급이 맞으니까.
일단 결혼부터 하고 차차 작위를 내릴 예정이었다.
“공작……!”
프리아나는 자기가 받는 거라도 되는 것마냥 표정이 밝아졌다.
다른 녀석들도 다들 들뜬 얼굴을 하긴 했다.
오직 이슬린만이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원래는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늦어졌군요.”
“늦긴요. 그래 봤자 열흘도 안 됐는데.”
“후훗. 그런가요?”
“날짜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음…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당장 다음 주에 작위 수여식을 열어도 되고.”
“그럼 그렇게 하죠.”
공작이라.
처음 백작위를 받을 때도 어색했는데.
그랬던 녀석이 왕 다음으로 높다는 공작이 됐다.
공작부턴 사실상 왕에 버금가는 권한이 생긴다. 남의 영지에 막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아이소테르엔 공작이 없었다.
귀족들의 부흥을 누구보다도 꺼려 했던 에런골드 2세.
덕분에 아도르네이 후작가를 제외하곤 다들 어중띤 백작이나 자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날 공작으로 임명하겠다는 건,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글렌의 곁에 새로운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거다.
‘아무래도 여왕 하나보단 대공이 붙는 게 더 입김이 세니깐.’
그렇게 자잘한 일정 조율이 끝나고, 이글렌은 서둘러 테라리움으로 되돌아갔다.
하루 정도 묵고 가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여왕이 장시간 왕성을 벗어날 순 없으니까.
“축하드립니다! 백작… 아니, 이제 공작님이라 불러야 되나요?”
“호들갑 떨지 마라. 아직 작위 수여를 받지도 않았는데.”
“후후! 그래도 기쁜 소식 아닙니까! 공작님이 되시는 건데.”
“흐흠.”
프리아나는 괜히 호들갑 떨며 신나 했다.
난 별 관심 없는 척 피식 웃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쉬어야겠군. 아무래도 그 난리를 피웠다 보니 피곤하구만.”
“네! 편히 쉬십쇼!”
배도 적당히 채웠겠다.
난 푹신한 침대가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달칵.
“…하아.”
방문까지 걸어 잠그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왼 손을 펼쳐 룬 문양을 들여다봤다.
[랭크가 변경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
파앗.
왼손 위로 반투명한 창 같은 게 떠올랐다.
[이름 : ???]
랭크 : ???
“…….”
거기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글귀들이 나열됐다.
“물음표라.”
여기서 쓰이는 문자는 다르게 생기긴 했지만, 의미하는 건 같았다.
알 수 없음.
내 이름뿐만 아니라 랭크까지 물음표로 나타나 있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농도의 마나.
이것 때문인지 랭크 시스템에 제대로 표기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껏 랭크 시스템이 주였다면, 르델과의 싸움 이후 단전이 그 자릴 차지해 버렸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내 랭크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바아앙.
시험 삼아 허공에 검기를 뽑아냈다.
맨손에서 뻗어 나온 검기는 뚜렷한 형체를 띠고 있었다.
소설 설정 상 이 정도의 기예가 가능한 건 랭크 7부터다.
“블랭크라도 돼 버린 기분이구만.”
내 경지를 알 수 없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발할라 시스템에서도 레벨로 꼬박꼬박 표기되긴 했으니까.
파앗.
일단은 손끝에서 뻗어 나온 검기를 흩어 냈다.
“으음…….”
밥을 먹어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 * *
포르겔에서의 일이 끝나고.
하루하루 큰 소동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일주일째 밀린 임페라 백작령의 업무도 대충 마무리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공작위 수여식 날짜가 다가왔다.
“으음.”
프릴이 잔뜩 달린 사교복이 목을 조여 왔다.
“더럽게 불편하구만.”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시죠.”
“흥.”
괜히 한번 찡찡거리다 이슬린한테 한소리 들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이슬린이 한 발짝 물러나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울리는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 하시지.”
“죄송합니다. 거짓말엔 재능이 없어서.”
“…….”
빰빠바밤.
이슬린을 째려보려는데 문 밖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위 수여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럼. 갔다 오시죠.”
“…후! 그래야지.”
아무리 나라도 공작위를 받을 자리다 보니 떨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곤 식이 열릴 연회장으로 향했다.
벌컥.
“하하. 그래서 어제…….”
문을 열어젖히자 연회장에 참석한 귀족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다들 저마다 다른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신기하긴 할 거다.
지난번 작위 수여식 때만 해도 백작위가 과한 처사라 여겼을 테니까.
그랬던 놈이 불과 몇 년 만에 공작이라니.
지난 수십 년간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 공작위.
하지만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없었다.
파격적인 작위인 만큼 내 행보도 파격적이었으니까.
난 무심한 척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후후, 오셨군요!”
프리아나도 먼저 와 이것저것 집어먹던 참이었다.
잠시 후 이슬린도 옆에 와 자릴 채웠고, 이내 테라리움의 제1시종장이 연회장 앞에 섰다.
뾰족한 수염을 가진 통통한 남자였다.
지난번 작위 수여식 땐 4번인가 5번이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꽤나 출세한 모양이다.
“그럼…….”
시종장의 진행에 따라 작위 수여식이 시작됐다.
자잘한 인사치레와 선언문 같은 걸 읽고, 마침내 이 왕국의 주인, 이글렌이 나타났다.
“…….”
찡긋.
이글렌은 내가 앉은 자릴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후훗.”
가만 보면 깜찍한 구석이 있다니까.
그 뒤로도 자잘한 예식이 뒤따랐다.
슬슬 하품이 나오려는 그때.
“하암…….”
“백작님, 이제 앞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아,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난 미리 안내 받았던 대로 이글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이먼 임페라의 아들. 이안 임페라.”
“예, 전하.”
“그간의 공적을 높이 사 새로운 작위, 공작의 작위를 수여할 것을 선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번 백작위 수여 때처럼 새로운 반지를 주진 않았다.
이래저래 얻은 반지 때문에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후훗.”
이글렌은 내게 조심스레 왼쪽 손을 내밀었다.
난 그런 그녀의 손등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이안 임페라. 오늘부로 충성스런 가신으로서 아이소테르의 영광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연회장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핫! 아이소테르를 위하여!”
개중엔 프리아나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축하해요, 이안.’
연회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함성 속에서, 이글렌이 작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여왕님.”
‘그럼. 이따 봐요.’
이글렌은 다시 한번 눈을 찡긋했다.
이후 공작위 수여는 별 무리 없이 마무리됐다.
“공작이라.”
시끌벅적한 연회장 가운데서 다음 계획을 떠올렸다.
공작부턴 그만한 권한이 생긴다.
그럼 그 권한을 사용해야겠지.
호록.
“…….”
난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며 만나야 할 누군가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