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검은 정확히 르델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었다.
주인공 녀석에게 꿰뚫렸던 가슴팍의 빈 공간.
그곳엔 리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마나 하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감히……! 네놈 같은 애송이가……!]
르델은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검날을 움켜쥐었다.
설마 여기서 발악이라도 할 생각인가?
콰드드득!
하지만 놈은 움켜쥔 검 주위로 몸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끔찍한 절규와 함께 녀석은 부서진 마나 하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텅!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르델.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엔 르델의 마나 하트와 흉측하게 생긴 지팡이만이 남았다.
“허억……! 허억……!”
르델이 죽은 걸 확인하자마자 난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화입마는 단전 내 마나가 폭주할 때 일어나는 현상.
불행 중 다행히도 르델을 상대하느라 체내에 남은 모든 마나를 쥐어 짜냈다.
다시 말해 폭주할 마나조차 남지 않은 상황.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한시라도 빨리 단전을 진정시켜야 했다.
폭주한 단전이 다시 주변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여 폭주하기 전에.
“후읍…….”
너덜너덜해진 하복부의 단전.
녀석은 끊임 없이 먹을 걸 갈구하는 아귀마냥 주변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왼손에 남은 랭크 시스템으로 조금씩이나마 회복이 가능했다는 거.
난 부서진 단전의 틈을 메우고 불안정해진 호흡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후욱… 후욱…….”
지금껏 랭크 시스템이 주고 단전이 부였다면 지금은 그 반대인 느낌이다.
부서진 단전을 랭크 시스템의 가호를 통해 조금씩 기워 나갔다.
“…후.”
마침내 어느 정도 단전이 진정되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으윽…….”
하지만 긴장이 풀린 탓일까. 피곤이 급작스럽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위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
퍽!
지면이 얼굴을 강타하는 걸 마지막으로 그렇게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르델이 보여 준 이 이야기의 최종장은 뭐였을까.
녀석이 거짓된 환상을 보여 준 건 아닐 거다.
주에른 4세가 내려 줬던 세례.
덕분에 볼 순 있었지만, 히테라 주신들의 금제 탓에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기억.
난 잠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정신은 깨어 있었다.
천천히 이 이야기의 마지막 화를 되짚었다.
“…….”
라크레시아 카잔이 발동시킨 최후의 유물.
그 흉악한 힘에 주인공 녀석은 모든 동료를 잃고 말았다.
나라도 미쳐 버리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걸 다 이룬 줄로만 알았던 순간, 소중히 여겼던 동료들뿐만 아니라 애인까지 잃고 말았으니까.
‘…아니야.’
이야기 속 마지막 부분을 떠올려 보자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라면 미쳤을 거다. 나라면.
하지만 주인공 녀석은 내가 아니다.
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멘탈도 튼튼한 놈이다.
동료들을 잃으면 슬퍼 할 놈이지 이렇게까지 깽판을 치고 다닐 놈은 아니다.
심지어 놈은 평화로워진 세상을 버리고 시간대를 되돌렸다.
전생의 술법.
르델도 소문으로만 들었다던 숨겨진 비술.
그걸로 날 여기로 부른 건 맞을 거다.
그렇다면 주인공 녀석은?
녀석도 자신을 과거의 세상으로 전생시킨 건가?
그리고 르델이 했던 말.
‘그게 가능한 건지 아닌진 아무도 모르는 술법이니까.’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
난 머릿속에서 가설을 하나 떠올렸다.
동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되돌아갔다 치자.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죽은 동료들은 되살릴 수 없을 거다.
만약 동료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주인공 녀석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르델이 말하는 의미였나?’
전생의 술법을 사용한다는 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저 같은 배경의 다른 시간대.
또 다른 별개의 세상이란 걸 의미했다.
그저 가설일 뿐이었지만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그럼 왜 이런 짓을…….’
주인공 녀석이 이 세상에 깽판을 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죽은 건 죽은 거니까.
그리고 이 말은, 내가 아닌 소설 속 주인공 녀석이 가장 자주 내뱉었던 말이다.
‘그랬지.’
타르옌마저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녀석은 황혼의 외침에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곤 카잔 황제의 최후의 유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에 맞서듯 최후의 유물은 녀석에게 광선을 발사했고, 이는 주인공이 아닌 라크레시아에게 적중했다.
“…그래.”
생각의 정리가 끝난 난 눈을 퍼뜩 떴다.
여전히 주변은 어둡고 칙칙한 감옥 바닥이었다.
콰악.
난 주먹을 쥐었다 폈다도 해 보고, 고갤 돌려도 봤다.
다행히 제대로 움직였다.
배가 고파서 힘이 없긴 했다.
꼬르륵!
잠에 빠져든 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배 속이 요동쳤다.
“…….”
바닥에 떨어진 세 물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치였던 르델이 남기고 간 마나 하트와 흉측하게 생긴 지팡이.
어딘가엔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일단 챙겼다.
그리고.
빛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평범하게 생긴 철검 한 자루.
덜그럭.
검을 쥐어 봤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황혼.”
이름을 불러 봐도 대답이 없는 건 여전했다.
황혼은 죽었다.
원재료가 좋아서 그런지 검 자체는 단단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여기에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마핵을 달아 준다면 금세 새로운 에고 소드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새로운 에고 소드지 황혼은 아니었다.
난 눈을 한 번 꼭 감곤 녀석을 허리춤에 가로 매었다.
검집은 여전히 없었다.
“너의 마지막 부탁. 꼭 들어주도록 하지.”
그렇게 물건들을 챙기곤 밖으로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 * *
감옥을 빠져나가자 눈부신 햇살을 마주했다.
보아하니 감옥이 있었던 건 포르겔 왕성의 지하.
계단을 따라 복도까지 주욱 나오자 왕성을 나올 수 있었다.
혹여나 바깥세상도 난장판이 된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포르겔은 예전처럼 평화로운 흑마법사들의 세상이었다.
[그워억.]
수레에 한가득 짐을 실은 채 이동하는 구울.
살집이 두툼한 게 와이트 킹, 리겔의 영향을 받은 듯했다.
[자자. 이건 이쪽으로 나르고…….]
[그웍. 그웍.]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새 키가 나만해진 리겔.
‘저 나이대 애들이 성장이 빠르긴… 해도 저건 너무 빠른데.’
아마 지금껏 쿠스켈의 눈치를 살피느라 일부러 몸집을 작게 하고 있었던 걸 거다.
[…어? 임페라 백작님!]
한창 구울들을 감독하던 리겔이 날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래.”
“…이안!”
옆에 있던 쿠스켈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흐하핫! 전하와 얘기는 잘 끝난 겐가?”
“그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는 쿠스켈은 멀쩡한 날 보곤 회담이 잘 끝난 줄로만 알았다.
난 그런 그에게 시원스레 얘기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내 일주일째 왕성에서 조용하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했다네!”
“…일주일?”
“그래! 일주일! 자네 맨날 성에만 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 보구만!”
일주일이나 지났다고?
그냥 잠깐 눈 좀 감았다가 뜬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거였나?
꼬르륵!
“으윽…….”
배 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배가 유독 고픈 것 같더라니만.
“…잠깐.”
일주일이나 지났으면 좀 문제가 컸다.
딱 일주일 전에 빈트하겐만 아이소테르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헉.”
본국에 있는 녀석들 입장에선 내가 꼼짝 없이 죽은 줄로만 알 거다.
“그… 혹시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포르겔 주위에 누가 서성인다던가.”
“으응? 뭐 그런 건 없었다만… 리베라 마공작이 죽었단 소문을 듣고 다른 공작들도 몸을 사리더군.”
“…그건 다행이군요.”
다행이긴 했지만 살짝 섭섭하달까.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노발대발 할 줄 알았는데.
일주일동안 감감 무소식이었다니.
“…일단 알겠습니다.”
“후후. 그래. 혹시 회담 내용은 비밀인가? 어차피 곧 알게 되긴 하겠지만… 궁금해서 말이야.”
“으음…….”
난 쿠스켈에게 품속에 챙겨 둔 마나 하트를 건넸다.
그리고 등 뒤에 매고 있던 르델의 지팡이도 꺼내 들었다.
“으응? 이게 뭔가?”
리치의 마나 하트를 보곤 고갤 갸웃하는 쿠스켈.
난 그런 그에게 르델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알려 줬다.
약간의 거짓말을 가미해서.
“저도 르델이 괜찮은 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더군요. 녀석은 사실… 벤시의 상위종 리치가 돼 버린 상태였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네. 심지어 포르겔을 제물로 바쳐 리치 킹으로 거듭나려 하더군요. 게다가 절 데스 나이트로 만들어 아이소테르까지 집어삼키려…….”
“그, 그만! 그만 얘기하게!”
“…….”
쿠스켈은 혼란스러운 듯 내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이야기 전후관계가 좀 다른 거지 맥락만 놓고 보면 사실이었다.
“그럼 이건…….”
“르델의 마나 하트입니다.”
쿠스켈은 조심스레 마나 하트를 들여다봤다.
“…전하의 마나가 느껴지는군.”
거기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분명 르델의 것이었다.
“어찌어찌 운 좋게 그를 막긴 했지만…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군요.”
“…….”
쿠스켈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내가 르델을 죽인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다.
게다가 내버려뒀다면 포르겔을 집어삼켰을 거란 건 자명한 사실.
쿠스켈도 이를 잘 아는 터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네와 같이 왔던 기사님은 어떻게 됐나.”
“…부상이 심해 먼저 돌려보냈습니다. 전 일단 사정을 말씀드리려 남았구요.”
“으음… 그렇담 자네도 얼른 아이소테르로 되돌아가 봐야겠군.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면 아이소테르의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죠.”
쿠스켈은 꽤나 머리가 돌아가는지 영리한 판단을 내렸다..
“…일단 돌아가게.”
“네?”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 이곳 상황부터 잘 설명해 주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포르겔의 흑마법사들은 연합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는 걸세.”
“흠…….”
그래도 되는 걸까.
나야 좋긴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네들 왕을 죽인 사람인데.
“우리 포르겔의 처사는 신관님들과 다른 흑마법사들이 논의하면 그만일세. 자넨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고맙습니다.”
“…그래.”
쿠스켈은 싱긋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런 그의 옆에선 와이트 킹, 리겔이 영문 모르겠단 얼굴로 나와 쿠스켈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또 보자구.”
* * *
포르겔의 동굴로 되돌아온 난 웨이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찹.
석판에 손을 얹자 몸이 붕 떠오르며 사위가 밝아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는데.
르델에게 갇혀 있었을 땐 어찌나 공간 도약을 하고 싶었는지 원.
파앗!
이내 밝은 빛이 사그라들고, 익숙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디찬 카잔 제국의 옛 땅이 아닌.
포근하고 따뜻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후아.”
웨이 포인트 파편은 여전히 백작령 집무실 바닥에 위치해 있었다.
행여나 이슬린이 치웠음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
두두두……!
짧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집무실 문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나 없는 동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저렇게 요란스레 뛰어오는 건 대체 누굴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마누라, 이글렌?
아니면 이 세상에 온 뒤로 줄곧 날 섬겨 온 이슬린?
이글렌이면 뽀뽀 해 주고 이슬린이면 어깨나 한 번 두드려 주리라.
콰앙!
“…백작님!”
문이 부서져라 거칠게 열어젖히곤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전신을 갑옷으로 중무장한 금발의 남자.
프리아나였다.
“…너였냐.”
“어흐흑! 백작님!”
녀석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내 바짓가랑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프리아나.
그 뒤로 이글렌과 이슬린이 보였다.
다들 가만히 손 놓고만 있던 건 아니었는지, 전투 복장을 한 채였다.
“이안…….”
“백작님.”
난 그런 둘을 향해 싱긋 웃으며 고갤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