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젠장.’
속박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르델이 좀 더 마나를 뱉어 줬음 좋았겠다만, 녀석이 정신을 차리자 줄줄 터져 나오던 마나도 뚝 끊겼다.
남은 거라곤 그저 평상시 대기의 마나뿐이었다.
쿠구구구……!
결국 리치로 거듭나기 시작한 르델.
녀석의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기 시작했다.
이내 살점 하나 없는 해골만이 남자, 녀석의 얼굴 주위로 검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더불어 녀석의 사지에 붙어 있던 살점도 훌훌 날아가 버렸다.
남은 거라곤 뼈와 검은 마기뿐.
누가 봐도 영락없는 몬스터의 모습이었다.
[이런……! 망할……!]
리치로 거듭난 녀석은 뼈만 앙상히 남은 왼손을 들여다봤다.
최후의 순간 죽음을 피할 순 있었지만, 그 결과 랭크 시스템을 잃었다.
랭크 9를 향했던 르델의 녀석의 목표.
이제 그게 산산조각 나 버린 거다.
남은 건 랭크 상승이 아닌, 한 번 더 상위종으로 거듭나는 것뿐.
“…몰골 한 번 끔찍하군.”
살점 하나 없이 하얀 뼈만 남은 마물의 모습.
얼굴 근육이 없어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분노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익……!]
르델의 주위로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이는 곧 바닥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데스 나이트와 벤시들에게로 향했다.
주인공 녀석의 개입에 꿈쩍도 않고 있던 놈들이 스멀스멀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땅에 모든 걸 제물로 바쳐 리치 킹이 되는 수밖에……!]
리치 킹.
대륙 역사상 단 한 번밖에 등장한 적 없다는 최강의 마물.
랭크 8의 리치에게 불가능할 건 없는 소리였다.
‘그건 안 되지.’
사실상 최강의 마물이라 취급 받는 존재.
그런 녀석이 나타난다면 흑마법사들의 왕국 라스하겐만 집어삼키는 게 아닐 거다.
가뜩이나 주인공 녀석 때문에 혼란스러운 세상에 리치 킹까지 감당할 순 없었다.
“…….”
하지만 지금 내겐 제대로 된 검조차 없다.
대기의 마나도 이젠 평범한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고.
[크르륵…….]
날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
저놈의 검이라도 뺏어야 하나?
그러던 그때.
쿵……. 쿵…….
저 멀리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점차 가까워지던 굉음은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냈다.
…쿵!
감옥 한쪽 벽을 뚫고 나타난 한 자루의 검.
파각!
홀로 벽을 박살 내고 날아온 녀석은 그대로 데스 나이트 한 구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크륵!]
타오를 듯 붉은 도신을 가진 검.
에고 소드 황혼이었다.
데스 나이트 한 구를 처치한 녀석은 천천히 내 손아귀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와 봤다.]
익숙한 기운이라.
주인공 녀석을 말하는 건가.
이왕 올 거면 진작에 올 것이지.
[미안하군. 나도 녀석들한테 잡혀 있었던 터라.]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녀석도 어딘가 묶여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공 녀석이 깽판 쳐 준 덕에 황혼도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거고.
“일단 와 준 건 고맙긴 한데…….”
난 조심스레 몸 상태를 확인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상태다.
이제 막 회복된 왼손은 제대로 된 랭크 시스템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쿠드득…….
허용량 이상으로 마나가 모여든 단전은 끔찍한 통증과 함께 배 속에 요동쳤다.
급한 대로 주화입마라도 빠져들까 생각했지만, 이미 르델이 뱉어 낸 마나는 다 빨아들이고 난 뒤였다.
주화입마 상태까지 가기엔 부족했다.
느긋하게 회복 할 시간만 있으면 모르겠다만…….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리치가 된 르델이 지팡일 들어 올렸다.
해골이 덕지덕지 붙은 지팡일 휘두르는 녀석은 영락없는 최악의 마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는군.”
지금은 멸망해 버린 옛 지구.
거기서도 비슷한 놈을 상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함께 힘을 합쳐 아쉬타르를 상대해도 모자랄 상황이었지만,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 않나.
힘이 좀 모였다 싶으면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놈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죽음 교단이란 거창한 이름을 달고 각성자들을 학살하던 네크로멘서가 있었다.
겉보기엔 지금의 르델과 꽤나 비슷했다.
문제는 당시 난 최상의 컨디션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란 거다.
르델이 지팡일 휘두르자 주변의 마물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르르…….]
르델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버리고 마물의 길을 택했다.
그걸 대변하기도 하려는 듯 아까까진 사람에 가까웠던 마물들이 이성을 잃은 괴성을 토해 냈다.
“…젠장.”
난 놈들을 향해 황혼을 세워 들었다.
대충 눈앞에 보이는 데스 나이트만 해도 열 구가 넘었다.
그 뒤로 바글바글한 벤시까지 합하면 더 됐고,
이딴 상황에서 살아남으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안 임페라.]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는데, 황혼이 내게 전언을 보냈다.
“…왜?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그렇다.]
“…….”
장난으로 괜히 한 번 해 본 말이었는데, 진짜 여기서 죽을 생각인 건가?
난 죽기 싫은데.
[그래. 하지만 넌 아니다.]
“…뭐?”
[검신 가운데에 박힌 마핵을 부수겠다. 그럼…….]
가뜩이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해를 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
이내 난 녀석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내게 쓸 마나를 주겠다는 건가.”
[…그래.]
스스로 자아를 가진 검 에고 소드.
녀석의 마핵에는 마검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파괴한다는 건 그저 평범한 철검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거다.
이는 에고 소드에겐 죽음을 뜻했다.
[이미 난 죽은 검이다. 옛 주인이 날 버렸던 순간. 거기서 끝났어야 할 운명이었지.]
“…….”
[그때 난 주인을 한 번 잃었다. 또 주인을 잃고 싶진 않군.]
“프흐흐. 살았던 세월만 따지면 훨씬 오래 산 놈이 주인은 무슨.”
놈은 태초의 대장장이 왕 말라크가 만든 에고 소드다.
나이로 따지면 수백 살은 먹은 놈이 주인이니 뭐니 따지기는.
[…그래. 그랬지. 수백 년을 주인 없이 살던 이 몸이니까.]
“…….”
[그래서 더 살고 싶지 않은 거다. 난 녀석과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 녀석을 막지 못했으니까.]
“…그랬지.”
아까 읽은 소설의 최종장.
거기서 주인공의 동료들이 모두 죽긴 했지만, 황혼만은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말인즉, 황혼은 최종장 이후 모든 만행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 왔단 거다.
[그리 오래 함께하진 않았지만. 왠지 너라면 옛 주인을 막을 수 있을 것 같군.]
“…….”
난 황혼의 전언에 입을 앙다물었다.
[크르륵!]
그러는 동안에도 르델의 권속들은 내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나중에 얘기…….”
[아니.]
쩌적.
검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동시에 황혼의 도신이 띄던 붉은 빛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살아남아라. 이안 임페라. 그리고.]
“…….”
[막아 줘라. 그 멍청한 놈을.]
…파각!
무언가 부러진 듯한 파열음.
황혼은 마지막 부탁을 끝으로 더 이상 전언이 들려오지 않았다.
“…….”
거기에 타오를 듯 붉은 도신은 빛을 잃고 평범한 철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건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그저 모습을 변신시킨 게 아니었다.
파아앗!
뒤이어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검에서 터져 나왔다.
그간 황혼이 체내에 담고 있던 방대한 양의 마나.
주인공 녀석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며 쌓아 온 마나가 터져 나왔다.
녀석이 남기고 간 마나에선, 옛 주인과 보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후읍.”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를 흠뻑 적시는 짙은 농도의 마나.
마치 마나의 바다에 몸을 던진 것만 같았다.
난 황혼의 마나를 빠르게 단전으로 흘려보냈다.
찌지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이 가기 시작한 단전.
폭주하는 단전은 그대로 황혼이 남기고 간 마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주화입마.
마나 호흡에서 가장 피해야 할 현상.
일순간 희열에 불타 죽는 불나방 마냥 폭주한다.
어찌 보면 디아 같은 만들어진 블랭크한테 일어나는 광폭화와 비슷한 현상이다.
다만 디아는 월식초만 있으면 어느 정도 부작용을 다스릴 수 있지만, 난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른다.
재수 없으면 죽고 아니면 살겠지.
카앙!
데스 나이트의 검이 내려쳤다.
이를 막아 낸 건 에고 소드가 아닌 평범한 철검이었다.
“…살아남아 주마.”
쩌저적!
매서운 한기가 검을 타고 내 몸을 잠식해 나갔다.
하지만.
파앙!
황혼이 남기고 간 마나는 이를 가볍게 압도했다.
심장이 타오를 듯한 훈훈한 열기가 놈의 마기를 한순간에 흩날려 버렸다.
카드득!
눈앞에 환하게 빛났다.
동시에 수많은 마물들의 약점이 훤히 드러났다.
[크륵?]
제일 먼저 이변을 눈치 챈 데스 나이트가 뒷걸음치려 했다.
미안하지만 그걸 내가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콰드득!
난 녀석과 맞댄 검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녀석의 양팔에서 단단한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걱!
힘으로 찍어 누른 검은 그대로 놈의 목을 베어 냈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데스 나이트의 투구.
이를 재빨리 낚아채곤 다른 데스 나이트들에게 집어 던졌다.
[크륵!]
분노한 놈들의 괴성이 들려왔지만, 단전이 찢겨진 난 그 누구보다도 맹렬한 살기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한 놈 한 놈 착실히 수를 줄여 나갈까?
아니다.
그걸론 부족하다.
파앙!
한 발짝 내딛은 발걸음.
순식간에 난 데스 나이트들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데스 나이트들은 반사적으로 내게 검을 휘둘렀다.
[놈!]
뒤이어 르델과 벤시들의 마창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뾰족한 날을 세운 검은 마창이 내게 쏘아졌다.
“쉴드.”
바아앙!
짧은 영창과 함께 내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소환됐다.
마나 소모가 극심했지만, 죽은 황혼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그 이상이었다.
파캉! 파캉!
쉴드가 계속해서 파괴됐다.
새로운 쉴드가 그 뒤를 잇고 또 이었다.
동시에 무수히 쏟아지는 데스 나이트의 검격.
카아앙!
놈들의 검을 막아 낼 때마다 한기가 전신을 덮쳐 왔다.
황혼이 남기고 간 마지막 부탁.
살아남아 녀석을 막아라.
이를 위해선지 훈훈한 열기가 계속해서 검에서 터져 나와 한기를 흩날려 버렸다.
콰드득!
짧은 틈을 향해 내지른 검.
이에 가슴팍이 꿰뚫린 데스 나이트는 전신이 우그러지며 사라졌다.
콰득! 콰드득!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찔러 넣었다.
서걱!
미처 막지 못한 검격과 마창이 살갗을 베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나를 집어삼켜 대는 단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부서진 쉴드의 파편이 주변에 나뒹굴어도 쉼 없이 회복 마법과 쉴드를 소환했다.
[이놈이……!]
르델은 지팡일 양손으로 붙잡고 뭔갈 준비했다.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검은 마기.
이는 이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용의 모습을 띈 마기가 르델의 지팡이 주윌 맴돌았다.
[꺄아악!]
한창 내게 마창을 날리던 벤시들이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놈들에게 어려 있던 검은 기운이 르델의 지팡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이내 힘을 잃은 벤시들이 풀썩 주저앉았다.
벤시들은 왠지 평온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한 채 먼지처럼 흩날리며 사라졌다.
어느새 남은 거라곤 몇 구 안 되는 데스 나이트와 르델뿐.
[죽어라!]
[크륵!]
르델은 데스 나이트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쪽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거대한 검은 용 한 마리가 매서운 기세로 내달렸다.
쩍 멀린 아가리는 그대로 데스 나이트들을 집어삼켰다.
대전쟁 당시에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모여야만 겨우 사용할 수 있다던 최강의 흑마법.
흑마룡.
방대한 양의 마나가 모여든 놈의 위력은 전성기 드래곤의 힘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걸 혼자서 사용한다니.
“으윽……?”
피하려 했지만 발치에 뭔가가 걸렸다.
머리가 날아간 데스 나이트가 내 발치를 붙들고 있었다.
제 권속의 죽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주인.
그런 주인을 위해 이렇게까지 발악하다니.
콰과과과……!
거대한 검은 용이 그대로 내 몸을 집어삼켰다.
“크아악!”
전신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대론 죽는다.
“X팔……!”
그럴 순 없다. 황혼이 남기고 간 마지막 유언.
난 반드시 살아남아 녀석을 막아야 했다.
“끄…흐읍……!”
날아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에고 소드가 아닌 평범한 철검으로, 거대한 파도를 얇은 검 한 자루가 거슬러 올라갔다.
까드득!
철검에 균열이 일며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계속 검을 내질렀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흑마룡의 입속에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살아남으라던 주인공 녀석이 내뱉은 말의 의미.
어렴풋이 놈의 속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드시 살아남아 미쳐 버린 자신을 멈춰 줘라.
난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파아앗!
주윌 뒤덮고 있던 흑마룡의 검은 배 속.
마지막으로 내지른 검격에 주변이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끝엔.
[이, 이놈이……!]
르델이 가슴팍을 꿰뚫린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