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이게 무슨……?”
작게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최후의 유물.
라크레시아는 분명 죽었다.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목이 달아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런데 왜 유물이……?
“모두 물러서!”
디아의 외침에 아직 살아남은 동료들이 한데 모여들었다.
온 대륙에서 모여든 일곱 영웅.
모두 각기 다른 랭크들의 정점에 선 자들이었다.
파아앗!
제일 먼저 타르옌의 마법 방어벽이 생성됐다.
“주신이시여! 우리들에게 축복을!”
뒤이어 강력한 주신들의 가호가 내려지고.
“하아압!”
셀리버트의 대현자, 세리트의 정령술까지.
콰드드득!
수많은 방어벽들이 덧대여 서로를 보호했다.
…콰앙!
마지막으로 다부진 체격의 남자, 한때 프란츠의 거산이라 불리우던 우르트의 방패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게 완성되는 데까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수년간 동거동락하며 합을 맞춰 온 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이들은 숨을 죽인 채 최후의 유물을 바라봤다.
[영혼 주입기의 작동이 확인되었습니다.]
“…뭣?”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무뚝뚝한 기계음.
라크레시아가 사용하던 고대인의 유물이 동작할 때 나는 목소리였다.
일곱 영웅들은 잔뜩 긴장한 채 방어벽을 견고히 했다.
이만한 강도라면 전성기의 드래곤 한 무더기가 덤벼도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하리라.
‘부숴야 하나?’
디아는 고민에 빠졌다.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한시라도 빨리 저 유물을 파괴해야 할지.
그렇게 잔뜩 긴장한 이들에게 무뚝뚝한 기계음이 한 번 더 들려왔다.
[…대상이 확인되었습니다. 비대상자 제거를 시작합니다.]
“…준비해라!”
우우웅……!
묵직한 진동음을 내며 떨리기 시작한 최후의 유물.
녀석의 두 눈이 매서운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피육!
짧고 묵직한 소음과 함께, 녀석의 두 눈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이는 곧 방패를 들고 선 우르트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방어벽들이 덧씌워진 방패.
우르트는 그런 방패를 단단히 쥔 채 공격을 버티려 했다.
하지만.
“…어?”
마치 이질적인 존재라도 되는 것마냥.
최후의 유물에서 발사된 광선은 그대로 모든 방어벽을 뚫고 지나갔다.
이는 그대로 우르트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우르트!”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졌다.
“이익……!”
뒤늦게 디아는 황혼을 집어 든 채 해골에게 달려들었다.
[남은 비대상자를 제거합니다.]
피육! 피육!
디아의 옆으로 여러 발의 광선이 지나쳤다.
한시라도 빨리 저걸 파괴해야 한다.
체내에 남은 마나를 모두 그러모아 황혼에게 집중시켰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빛의 오러가 검에 모여들었다.
…콰앙!
하지만 검은 최후의 유물 지척에서 멈춰 섰다.
그러는 사이에도 광선은 계속 발사됐다.
“그, 그만둬!”
피육!
이미 발사된 여섯 발의 광선.
그럴 때마다 디아의 등 뒤로 동료들이 쓰러져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아의 애타는 검격에도 최후의 유물은 사정 없이 동료들을 학살해 나갔다.
콰앙! 콰아앙!
다급한 마음에 계속 검을 휘둘러 봤지만, 유물의 방어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익……!”
유물에서 매서운 광채가 한 번 더 일렁였다.
디아는 절망에 가득찬 눈빛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가 마주한 건.
어느새 동료들을 먼저 보내 버리고 홀로 서 있는 타르옌뿐이었다.
“타르옌!”
“디…….”
…퓩!
광선 한 발이 다시 발사됐다.
디아는 녀석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매서운 기세로 날라가던 광선은 디아의 왼손을 그대로 통과하더니.
…파각!
마지막 남은 영웅의 심장을 꿰뚫었다.
풀썩!
타르옌이 쓰러졌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쓰러진 뒤였다.
“어, 어째서…….”
이제 다 끝날 터였다.
대륙엔 평화가 되찾아오고, 행복한 여생을 즐기는 것만 남았을 텐데.
“크…흐흐…….”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잘린 채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라크레시아였다.
“대체…….”
디아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꼴… 좋다…….”
조소를 흘리는 라크레시아 뒤로, 해골이 다시 한번 빛을 내뿜었다.
[비대상자를 제거합니다.]
“아…….”
디아는 허무함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 이대로 죽을 생각이야?!]
“…황혼.”
황혼의 전언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자신과 같은 만들어진 블랭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겠다는 의지였으니까.
이대로 죽으면 먼저 간 동료들을 볼 낯이 없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디아는 얼른 황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최후의 유물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어떻게서든 파훼법을 찾아보리라.
피육!
“…어?”
하지만 광선은 애먼 데로 쏘아졌다.
디아가 아닌, 카잔 라크레시아에게로.
파각!
머리만 남은 채 조소를 흘리던 라크레시아.
그런 녀석의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상자는 카잔 라크레시아. 영혼 주입이 시작됩니다.]
“뭣……?”
카잔 라크레시아에게 영혼을 주입한다더니.
왜 저 녀석을 죽이는…….
파앗!
최후의 유물과 눈을 마주친 디아는 눈부신 빛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뭐라고?”
소설의 끝을 마주한 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애초에 르델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긴 했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소설의 최종화는 내 사고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카잔 황제가 자신의 영혼을 최후의 유물에 보관해 논 건 알고 있었다.
녀석은 그걸 주입할 그릇이 필요해 라크레시아를 숨긴 거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그저 주인공 녀석이 남긴 글뿐이니까.
그것도 최종화란 가장 큰 퍼즐 조각이 빠진 채로.
“흐하하! 결국 그런 거였나!”
“…뭐?”
“보고도 모르겠나? 애초부터 라크레시아는 가짜였던 거다!”
“그게 무슨…….”
르델은 영문 모를 소릴 해 댔다.
“그럼…….”
르델은 다시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또 내 머릿속을 헤짚어 놓으려는건가.
난 밀려올 끔찍한 격통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거기까지다.”
“…응?”
한창 신나 있는 르델이 얼빠진 소릴 내뱉었다.
파각.
짧게 들려오는 파육음.
르델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의 눈앞엔 채 식지 않은 그의 심장이 튀어나와 있었다.
“어, 어억…….”
파앗!
그와 동시에 주변을 뒤덮고 있던 속박이 풀렸다.
이내 어두컴컴했던 사위가 물러가고 칙칙한 감옥으로 되돌아왔다.
칙칙한 감옥엔 녀석과 나 그리고 죽어 가는 르델만 남아 있었다.
다른 벤시들과 데스 나이트들은 무슨 수를 쓴 건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심장을 뽑힌 르델.
그의 뒤엔 낯익은 녀석이 서 있었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릴 한 사내.
녀석은 방금까지 읽은 기억 속 사내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라크레시아의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디아 제니스인 녀석.
하지만 방금 본 이 이야기의 최종장은 다른 이야길 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크으윽……!”
심장을 꿰뚫린 르델이 고통스런 신음을 토했다.
파각.
디아는 르델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뜨끈한 살점에 불과한 르델의 심장이 산산조각 났다.
디아가 손을 뽑아내자 르델은 구멍난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랭크 8이라 그런가?
심장을 잃고도 꽤나 오래 살아 있었다.
“이… 망할 놈이……!”
“분명 녀석을 조심하라 했을 텐데.”
디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르델을 내려다봤다.
난 사슬에 묶인 채로 둘을 쳐다봤다.
보아하니 르델이 녀석의 편에 서기로 한건 맞는 듯한데, 왜 지금 녀석이 날 구해 준 걸까.
“…….”
디아는 말없이 날 쳐다봤다.
그러다 녀석의 시선이 너덜너덜해진 내 왼손으로 향했다.
“…살아남아라.”
“…뭐?”
“그래야 날 막을 수 있을 테니.”
“잠깐……!”
파아앗!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세상을 구원해 줄 구원의 영웅이라 불리우던 녀석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그리고 방금 녀석이 내뱉은 말은 또 뭔지.
하지만 녀석은 여러 의문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젠장.”
이왕 살려 주고 가는 거면 이건 좀 풀어 주지.
절그럭.
르델이 당했지만 사지를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은 그대로였다.
스읍.
난 단전에 남은 마나라도 그러모으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바로 그때, 대기의 마나에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자이겔론드에서 고대인을 마주했던 그 느낌이다.
‘…그래.’
난 반쯤 죽어 가는 르델을 향해 고갤 돌렸다.
심장이 꿰뚫린 채 신음을 흘리는 녀석.
그런 녀석에게서 마나가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공 녀석이너 오베론 탓에 기를 못 펼치는 감이 없진 않지만, 랭크 8도 어마어마한 강자다.
보유한 마나량만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괴물.
녀석이 흘린 마나만 해도 주변 대기를 흠뻑 적시고도 남았다.
쿠구구구……!
회복의 기회를 얻긴 했지만, 문제는 그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르델의 주위로 요동치기 시작한 마나.
이내 뻥 뚫려 있던 녀석의 가슴 구멍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의 분홍빛 살점이 아닌, 데스 나이트나 벤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빛의 마기였다.
“리치……?”
와이트 킹이 구울의 상위종이라면, 리치는 벤시의 상위종 마물이다.
죽어 가는 순간 녀석은 제 스스로를 마물로 만드려 하는 중이었다.
‘리치는 좀 오반데.’
왼손이 너덜너덜해져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고작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리치를 상대하라니.
망할 주인공 녀석.
다 죽어 가는 사람한테 주는 시련 치곤 좀 심하지 않나 싶다.
“…….”
하지만 해야 한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내겐 아직 돌아갈 집과 사람이 남아 있었다.
“후읍.”
난 천천히, 또 빠르게 마나를 빨아들였다.
바아앙.
일단 그러모은 마나로 너덜너덜해진 왼손을 고쳤다.
그러자 왼손을 향해 빠져나가던 마나가 다시 내 몸을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거기서 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빨아들인 마나를 어디에 저장해야 할까.
왼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야 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몸뚱인 왼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기본이니까.
적당히 회복만 하면 검술과 마법 랭크 6의 온전한 내 몸으로 되돌아올 거다.
하지만 그게 다다.
르델이 다 죽어 가는 상태긴 해도 랭크 8은 랭크 8.
게다가 리치화가 마무리만 된다면 내 온전한 컨디션으로도 버거운 상대다.
그렇담 도박을 해야만 했다.
쿠구구구……!
난 호흡한 마나를 단전으로 끌어모았다.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단전.
성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라 벌써부터 단전에 무리를 줘선 안 됐다.
하지만 이 도박이 실패하면 반드시 죽는다.
어찌어찌 성공하면 살 테고.
“난…….”
난 살아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디아 제니스.”
녀석의 마지막 이야길 보고 싶었다.
온몸에 힘줄이 불룩 솟았다.
급격한 과부하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버텨 냈다.
그 망할 주인공 녀석의 끝을 보기 위해.
콰드득!
가슴팍에서 울려 퍼지는 파육음.
동시에 양팔과 다리를 옥죄고 있던 사슬이 산산조각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