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여긴?’
눈을 뜨자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내 사지를 붙들어 매고 있던 쇠사슬도 사라지고, 칙칙했던 감옥의 마핵등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단전을 잃은 것마냥 온몸에 제대로 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일까.
주윌 두리번거리던 난, 이내 눈 앞의 녀석을 보고 대충 짐작이 갔다.
“반갑군.”
르델과 똑같은 복장을 한 사내.
나이가 좀 들어 보이긴 했지만 주름살도 없고 머리나 수염도 검었다.
회춘이라도 한 것마냥 젊어진 르델.
여전히 흉측하게 생긴 지팡이는 들고 있었다.
크고 작은 해골을 덕지덕지 붙인 지팡이는, 보기만 해도 그냥 좋은 의도는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내가 상상하는 흑마법사 같달까.
녀석을 향해 경계심 가득한 눈초릴 보내자 르델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대충 눈치챈 것 같다만. 여긴 내가 만든 아공간 같은 걸세.”
“…그래 보이는군.”
대체 뭘 하려고 날 아공간에까지 불러들인 걸까.
“별건 아니야. 새로운 권속을 만들 때마다 거쳐 가는 일종의 세뇌장치 같은 거지.”
“세뇌……?”
설마 날 데스 나이트로 만드려는 건가?
녀석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물론 자넬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것도 좋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게 아니지.”
“궁극적인… 목표?”
르델은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내 주윌 빙글빙글 맴돌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이미 라크레시아의 편에 섰다네.”
“라크레시아.”
라크레시아라.
카잔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
하지만 진짜 녀석은 이미 죽었다.
지금 라크레시아 행색을 하는 건 이 소설의 주인공 녀석일 뿐.
“후후.”
“…….”
“역시 재밌는 소릴 하는군.”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건가?”
르델은 작게 웃으며 얘기했다.
“당연하지. 애초에 그럴려고 자넬 이 아공간에 부른 건데.”
“…….”
난 더 이상 녀석에게 속마음을 읽히고 싶지 않아 생각하길 멈췄다.
“호오. 제법이군. 스스로 생각을 통제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일 텐데.”
녀석은 흥미롭다는 듯 비실비실 웃어 댔다.
난 그런 녀석에게 다른 생각은 최대한 자제한 채로 물었다.
“어째서 라크레시아 편에 선 거지?”
“후후. 별 이유랄 게 있겠나. 그가 제일 강해서지.”
“…….”
강한다고 무작정 섬긴다라.
보아하니 르델은 흑마법 랭크 7, 혹은 그 이상인 8.
그쯤되는 녀석이 자존심도 없게 그저 강하단 이유만으로 주인을 섬길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 생각을 읽은 르델이 덧붙였다.
“녀석이 분명 강한 건 맞지만,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더군. 지금은 이렇게 됐지만 나름 남은 인생은 평온하게 살고 싶었으니 말이야.”
저 말이 거짓말은 아닐 거다.
녀석은 포르겔을 평화로운 흑마법사들의 왕국으로 만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심경을 바꾸고도 남는 뭔가를 라크레시아가 제시했다는 거다.
“후후. 역시 머리가 꽤나 돌아가는 놈 같군.”
“설마……?”
“그래. 이미 난 수년 전 흑마법 랭크 8에 도달했다.”
“…….”
랭크 8.
인간 중에선 가장 강한 경지.
이는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꿈조차 함부로 꿀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레 한 가지 벽이 도달한다.
최후의 벽.
인간이라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탈리스도, 카이세리우스도, 심지어 오베론마저 혼자의 힘으론 최후의 벽을 깰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랭크 시스템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러기 위했다라. 정확한 말이군.”
“…그래서 녀석 편에 선 건가? 랭크 9에 도달할 실마릴 준다는 말에?”
“뭐 그런 거지.”
지금의 라크레시아라면 불가능한 말은 아니다.
“아무튼 녀석의 편에 서기로 했을 때… 몇가지 주의해야 할 점을 일러 주더군.”
“…주의해야 할 점이라.”
“그래. 사실은 좀 신기했어. 그 정도 되는 녀석이 주의를 해야 한다니. 그래서 더욱 궁금했지. 그게 대체 누굴까 하고.”
“…….”
“이미 녀석이 처치해 버린 오베론? 아니더군. 그렇다면 북부의 왕 탈리스? 그것도 아니야. 그럼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다들 주의할 만하군.”
“아니.”
르델은 천천히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야. 이안 임페라.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몰락해 가는 거지 백작가의 주인.”
“…그렇게까지 봐 주니 고맙군.”
“푸흐흐…….”
르델은 재밌기라도 한 듯 기분 나쁜 웃음소릴 냈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어. 아무리 난다긴다 해 봤자 아이소테르의 일개 백작에 불과한 놈을 라크레시아 씩이나 되는 놈이 두려워한다니.”
“…….”
녀석은 어깰 으쓱하며 입을 이죽였다.
“그래서… 일종의 보험 같은 거지. 라크레시아가 두려워할 정도면 대체 어떤 비밀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걸 내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을 내 밑에 두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꿈이 크구만.”
“큰지 작은지는 한 번 대봐야 아는 법이지.”
르델의 지팡이 주위로 검은 연기가 모여들었다.
그리곤 가볍게 지팡일 휘두르자 검은 연기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크윽…….”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자 어두컴컴했던 주변이 차츰 하나의 영상처럼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소설에서도 봤던 흑마법사의 기술.
‘권속 지배.’
강력한 데스 나이트나 벤시는 강인한 인간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그런 강인한 존재일수록 쉽게 권속으로 떨어지진 않을 터.
대개 굴복하긴 하지만, 가끔 육체에 남은 기억과 정신력으로 버티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그런 녀석들을 권속으로 부리기 위해 머릿속을 헤짚어 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 충성스런 기사에겐 왕이 아닌 흑마법사를 섬기도록 머릴 뒤집어 놓는다든가.
지금 녀석이 하려는 게 그거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그간의 기억을 되짚어 보겠다는 거다.
“…….”
순간 황금 은행 습격 당시 바르카가 떠올랐다.
서큐버스를 통해 내 기억을 읽어 보겠다던 녀석의 당찬 계획.
그건 실패로 돌아갔다.
고작해야 이십대의 애송이 녀석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고통이었으니까.
하지만 르델은 다르다.
꿈 합성마냥 서로의 기억을 섞는 게 아니라 그저 읽기만 하는 거니까.
게다가 바르카와 달리 수십 년도 더 산 녀석이다 보니 왠만한 트라우마론 꿈쩍도 안 할 거다.
“…….”
분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건 없다.
잠자코 녀석의 빈틈을 노리는 것뿐.
파아앗……!
주변에 펼쳐진 영상은 차츰차츰 과거를 향해 다가갔다.
“호오. 공간 도약 기술이라. 재밌는 걸 쓸 줄 아는군.”
아무래도 뒤로 되돌아가다 보니 포르겔까지 공간 도약한 걸 보곤 한마디 했다.
뒤이어 조금 낯뜨거운 장면이 이어졌지만 르델은 관심 없다는 듯 휙휙 넘겨 버렸다.
빠르게 내 기억을 훑어 지나가던 녀석의 표정은 점차 희열로 물들어 갔다.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
지금껏 마주했던 수많은 인연과 기연.
덕분에 녀석은 내 정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낯낯이 알게 됐다.
남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지식과 힘.
이는 모두 거지 백작령의 공자 이안 임페라의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기억의 끝에 도달하자, 거지 백작령에서의 첫날 모습이 주위에 비춰졌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난 남자.
이안 임페라.
아니, 이미 멸망해 버린 세상에서 온 이진수라는 남자.
마치 두개의 갈림길처럼 갈라진 기억에 르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의 술법이라… 이걸 실제로 성공한 녀석은 못 봤는데 말이야.”
“…전생의 술법?”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그게 가능한지 아닌진 아무도 모르는 술법이니까.”
“…….”
그게 무슨 소리일까.
“뭐 네놈이 이해하건 말건 그건 중요치 않다. 하지만.”
르델은 다시금 내 기억을 되돌렸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긴 했지만 정신을 잃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하나.
기억을 읽어야 하는데 녀석이 그렇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여기군!”
녀석은 신성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시점으로 멈췄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아.”
그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잠시 잊고 있었다.
주에른 4세가 직접 내려 준 세례.
거기서 난 히테라 주신들을 만났다.
사실 진짜 만났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세례가 끝나고 난 후.
난 왠지 모를 슬픔에 눈물까지 흘렸었다.
그건 대체…….
“이거야.”
르델은 기억을 되감던 속도를 천천히 늦췄다.
어느덧 눈앞엔 내게 세례를 내려 주는 주에른 4세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심스레 내 몸에 손을 얹자, 난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나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걸 보여 줄 겁니다.’
지금은 죽은 주에른 4세의 말.
이내 사위가 어두워지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 * *
“커…헉……!”
디아의 에고소드, 황혼이 마침내 라크레시아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제 끝이다.
대륙을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것이고, 죽은 카잔 황제의 야욕은 끝을 보게 됐다.
하지만 ㅤㅇㅙㄹ까.
디아는 개운함 대신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과 똑 닮은 남자의 죽음.
디아는 왠지 모를 기시감까지 느껴졌다.
“…이제 끝이다. 라크레시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 내려는 듯, 디아는 괜히 라크레시아를 향해 한 마디 했다.
“아아… 아, 아버지…….”
심장을 꿰뚫린 녀석은 죽어 가는 몸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의 피가 바닥을 적셨고.
죽은 황제의 아들은 최후의 유물을 향해 천천히 기어갔다.
“어딜……!”
타르옌은 그런 녀석을 향해 마탄을 소환했다.
“이제 끝이야. 타르옌.”
“하지만…….”
타르옌은 디아를 한번 쏘아봤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끝난 건 자명한 사실.
이미 강대한 적들도 다 죽었다.
그토록 버겁게 느껴지던 쾌검의 기사 크로드.
그도 결국엔 디아의 손에 죽었다.
그 이상 강했던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그 또한 문 밖에서 싸늘한 시체로 식어 갈 뿐이었다.
“…X팔!”
타르옌은 괜한 욕지거릴 내뱉었다.
수많은 적을 무찔렀지만, 결국 남은 건 몇 없었다.
분노로 놈의 몸뚱일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죽은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디아는 황혼을 뽑아 든 채 천천히 걸었다.
“라크레시아.”
“아, 아버지…….”
디아는 최후의 발악으로 몸을 꿈틀거리는 라크레시아에게 다가갔다.
다 죽어 가는 그의 앞엔, 텅 빈 두 눈덩일 한 커다란 해골뿐이었다.
그간 수많은 고대인들의 유물로 깽판치고 다니던 라크레시아.
그런 그에게 남은 거라곤 이 용도조차 모를 해골 하나뿐이었다.
‘…왠지 불안해.’
아무런 마나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해골.
왠지 모를 불안함에 디아는 끝을 내려 했다.
디아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황혼은 그렇게 간신히 숨만 붙은 라크레시아를 향해 쇄도했다.
…서걱!
라크레시아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데구르르…….
그렇게 한참을 굴러가던 녀석의 머리가 해골 근처에 떨어졌다.
그 순간.
텅 비어 있던 해골의 두 눈에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