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르델의 마탄이 작렬하기 직전.
나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다.
품속에 쟁여 뒀던 웨이 포인트 파편.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만 더 빨랐다면.”
‘…젠장!’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 웨이 포인트 파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곤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빈트하겐의 팔을 잡아챘다.
이 녀석은 공간 도약을 쓸 줄 모른다.
일단은 녀석부터 여기서 빼내야 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건 임페라 백작령의 집무실.
그 짧은 순간 동안, 빈트하겐의 몸이 반짝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다음 순서가 나였다.
빈트하겐을 임페라 백작령으로 보낸 직후, 나도 녀석을 따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르델이 더 빨랐다.
…파각!
“크아악!”
이미 손을 꿰뚫어 버린 검은 흑창.
르델이 소환한 마탄은 그저 눈속임이었다.
이미 지척에서 마창을 소환한 녀석은, 그대로 내 손과 웨이 포인트 파편을 산산조각 냈다.
끔찍한 격통이 밀려 들어왔지만, 문제는 더 있었다.
붉은 피를 쉼 없이 내뿜는 왼손.
그런 왼손에 새겨져 있던 룬 문양이 마창에 박혀 일그러져 있었다.
쿠구구……!
왼손이 떨어져 나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반쯤은 너덜너덜해진 왼손을 따라 마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으윽……!”
왼손을 지혈함과 동시에 마나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끝장이다.
단전에 남은 마나를 그러모아 체내에 남은 마나가 왼손으로 향하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구구구…….
이내 전신에 가득했던 마나가 요동치는 걸 멈췄지만, 마치 단전을 파괴 당한 것마냥 제 몸을 가누기도 버거웠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가 떨려…왔다.
“이… 자식이……!”
“잡아라.”
[예.]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전선에 나섰던 데스 나이트와 벤시.
녀석들은 르델의 명령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따랐다.
파악!
데스 나이트 둘이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피와 마나를 지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저항할 힘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데스 나이트의 거친 손아귀를 뿌리칠 순 없었다.
“미안합니다. 이안 임페라 백작. 이미 그에게서 당신을 조심하란 얘길 들었거든요.”
“그……?”
르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누구겠습니까. 제 옛 주인의 아드님이지요.”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후후.
“…….”
판단 미스다.
포르겔의 흑마법사들을 보고 르델도 괜찮은 놈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가짜 라크레시아, 주인공 녀석에게 넘어간 뒤였다.
으름장을 놓아 봤지만, 아이소테르와 이곳 라스하겐 왕국은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영지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도 왕국에선 이글렌만 알 뿐 다른 귀족들과 대신들에겐 비밀이었다.
이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르델의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끌고 가라.”
[예.]
“…….”
어디론가 날 질질 끌고 가는 데스 나이트의 거친 손길.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아님 너덜너덜해진 왼손으로 마나가 새어 나간 탓일까.
현기증을 느끼던 난 주변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
“임페라 백작!”
빈트하겐은 임페라 백작령에 도착하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주위는 임페라 백작령의 집무실이었을 뿐.
주변에 적은 없었다.
“…백작님?”
그의 목소리를 듣곤 누군가 집무실로 달려왔다.
어깨에 살짝 닿은 은발의 여인.
임페라 백작의 집사, 이슬린이었다.
그런 그녀가 집무실 문을 열자 마주한 건.
이안 임페라 백작이 아닌 전 기사단장 빈츠하겐 칼로스였다.
“…….”
빈트하겐을 마주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빈트하겐도 이슬린을 보곤 면목 없다는 듯 고갤 떨궜다.
“…백작님은?”
“…미안하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이슬린.
그런 그녀도 지금 상황에선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백작님은… 돌아가신 겁니까?”
주륵!
이슬린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건 아직 확인 못 했다.”
빈트하겐도 이안이 죽는 걸 직접 보진 못했다.
하지만 웨이 포인트 석판이 아무런 변화도 없는 걸 보면, 필시 무슨 일은 생겼단 소리였다.
“…그렇군요.”
이슬린은 황급히 흘러 내리던 눈물을 닦아 냈다.
마법으로 얼음까지 소환해 붉게 충혈되있던 눈을 진정시켰다.
이내 평소처럼 굳은 표정을 되찾은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백작님을 구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울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내 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통신용 마법구 하날 꺼내 들었다.
***
“…….”
이슬린이 제일 먼저 연락한 건 다름 아닌 이글렌.
대신들과 한창 회의 중이었지만, 만사 다 제쳐 두곤 임페라 백작령으로 향했다.
이안이 선물해 준 공간 도약용 마핵.
덕분에 눈깜짝할 사이 임페라 백작령으로 올 수 있었다.
그녀가 도착할 때 즈음엔, 이안 임페라와 연관된 이들이 모두 자리에 참석한 뒤였다.
그를 따르던 기사부터해서 대장장이까지.
다들 침통한 얼굴로 이글렌을 맞이했다.
“…하아.”
이글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이안이 동의했다곤 하나, 르델을 설득하는 건 이글렌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결국 그를 이글렌의 손으로 사지에 내몬 셈.
“…죄송합니다. 여왕님.”
빈트하겐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갤 푹 떨궜다.
“…르델의 경지는 어느 정도였나요.”
이글렌은 분노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드리는 것도 죄송할 뿐입니다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만은 저 이상이었습니다.”
“…….”
빈트하겐은 검술 랭크 7이다.
그 말인즉, 르델의 흑마법 랭크는 최소한 7 이상. 어쩌면 랭크 8일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이슬린이 그에게 물었다.
“…….”
빈트하겐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요 며칠간 이안과 있었던 일들을 늘어 놓았다.
쿠스켈이란 흑마법사를 구원한 것으로 시작해, 르델이 내뱉었던 의미심장한 대사로 끝났다.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이안이 공간 도약술로 그를 먼저 돌려보냈으니까.
곧바로 뒤따라오지 못한 걸 보면…….
“…군대를 소집하겠습니다.”
“…여왕님. 그건…….”
빈트하겐은 괜히 이글렌에게 한마디 하려다 싸늘한 눈초릴 받곤 입을 다물었다.
일이 틀어져도 너무 틀어졌다.
당장은 이글렌의 명령이니 병력이 소집되긴 할 거다.
하지만 왜 임페라 백작이 흑마법사들의 왕국에 있는 건지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거다.
최악의 경우 연합이 배신 행위로 간주해 아이소테르를 제명시킬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빈트하겐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프리아나나 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나서야 할 테니까.
전투엔 영 젬병인 하룬마저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일 정도였다.
“안 됩니다. 여왕님.”
하지만 이에 반기를 든 이가 하나 있었으니.
“…이슬린?”
이글렌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슬린 너가?”
“당연히 구하러 가야죠!”
프리아나도 어이없다는 듯 이슬린에게 소리쳤다.
이들 중 가장 오랜 기간 이안을 섬겨 온 게 이슬린이다.
그런 그녀가 이안 구출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아직 백작님의 상태를 알지 못하니까요. 무작정 군대를 소집했다간, 되려 백작님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가 이안이 죽기라도 하면……!”
“아무리 르델이라 해도 백작님을 함부로 죽이진 못할 겁니다. 그랬다간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전쟁이니까요. 굳이 쓸 만한 카드를 버리는 짓는 않겠죠.
“으음…….”
“게다가 빈트하겐 님의 얘길 들어 본 바론, 포르겔은 백작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왕이라 해도 맘대로 나서긴 눈치 보일 겁니다.”
“…….”
“적어도 일주일. 그동안 라스하겐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다면, 그때 움직이는 게 나을 겁니다. 괜히 놈들을 자극했다간 최악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최악의 결과.
이안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글렌은 입을 앙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슬린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건 남의 얘기일 때나 가능한 거다.
이안은 이글렌과 결혼한 사이.
그런 그가 살아남길 바라며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여왕님.”
“…응?”
“백작님은 괜찮으실겁니다.”
“…왜?”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요.”
“…….”
이슬린의 말에 이글렌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그렇겠지……?”
“네.”
“흐흑…….”
이글렌은 그제야 힘겹게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슬린은 옅은 미소를 띄운 채 이글렌을 꼭 안아 줬다.
***
축축한 곰팡내가 코끝을 찔러 왔다.
‘여긴… 어디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데는 성공했다.
난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굳게 닫힌 철창.
그 뒤로 불빛이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마핵등이 보였다.
누가 봐도 여긴 감옥 같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머리가 핑핑 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건.
‘마나가 모이질 않는다.’
이미 걸레짝이 되어 버린 왼손.
단전에 남은 마나로 정신을 유지할 순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
일단은 상황파악이 먼저다.
감옥인 건 확실한데, 간수는 없는 건가?
[정신이 드셨군요.]
메아리치듯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스스슥.
반투명한 뭔가가 철창을 뚫고 다가왔다.
벤시들만이 가진 유체로 이루어진 몸뚱이.
철창을 그대로 통과해 나온 녀석은 다름 아닌 벤시였다.
“…이렇게 보니 반갑구만그래.”
[…무슨 의도를 갖고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을 풀어 줄 생각은 없습니다.]
“크흐흐. 그렇겠지.”
잠시나마 함께 전선에 선 녀석이지만, 녀석은 결국엔 르델의 권속이다.
감정이란 게 있다 해도 최우선 순위는 아닐 거다.
그그그극……!
벤시 녀석이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뭔가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극.
이내 소리가 멎자, 철창 밖에 르델이 서 있었다.
“이안 임페라 백작.”
“…르델.”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흉측하게 생긴 지팡일 든 노인.
르델 아르칸.
현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
그런 녀석이 내게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지금 상황이 개 같은 건 맞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녀석이 날 죽이지 않았다는 거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을 터.
날 제물로 데스 나이트로 만들 생각인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아닌 빈트하겐을 노렸겠지.
그렇담 날 인질로 아이소테르에 돈이라도 뜯으려는 건가?
그것도 아닐 거다.
흑마법 랭크 8로 짐작되는 녀석이라면.
돈 같은 건 그닥 중요한 게 아니니까.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군.”
“……그 정도로 눈이 크진 않다만.”
“푸흐흐…….”
르델은 기분 나쁜 조소를 흘렸다.
도무지 예상이 가질 않는다.
내게서 녀석이 원하는 건 뭘까.
철컹!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녀석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철창이 열렸다.
“…….”
성큼성큼 다가오던 녀석은 천천히 지팡일 들어 올렸다.
“대체 뭔…….”
녀석에게 소리치려던 찰나.
르델의 지팡이가 머리에 닿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