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대단하구만그래.”
“…쯧.”
빈트하겐은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입을 이죽였다.
딱히 빈정대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녀석이 대단한 건 맞으니까.
나름 라스하겐의 한 축을 담당하던 리베라 마공작.
사실 한 축이 아니라 대부분을 차지했을 거다.
흑마법 랭크 7이란 건 그런 거니까.
다른 마공작이라 칭하는 놈들이래 봤자 쿠스켈과 비슷한 급이었을 테고.
아무튼 리베라 마공작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건, 당분간 포르겔에 난동을 부릴 놈은 없단 걸 의미했다.
난 일부러 다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군. 성문 쪽에서 쿠스켈이 습격당했을 땐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으응?”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처박고 있던 쿠스켈이 이상한 소릴 냈다.
난 녀석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죠? 아드님이 와이트 킹으로 각성한 덕에 이렇게 된 거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큰일 났을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
녀석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랬지.”
[…그렇습니다?]
리겔은 아직 잘 이해 못한 듯했지만 일단 장단에 맞춰 줬다.
이러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다.
“허억……!”
[아, 안녕하세요…….]
리겔을 본 신관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구울이 말을……?”
신관들은 리겔이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르겔에도 미약하게나마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구울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짧은 단답 같은 거에 불과했다.
리겔처럼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구울은 상위종인 와이트 킹 말고는 불가능했다.
“와, 와이트 킹이라니…….”
구울들의 왕 와이트 킹.
소설에서 본 바론 와이트 킹은 굉장히 그 수가 드물었다.
애초에 구울이란 몬스터 자체가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이유도 컸다.
상위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성장치를 쌓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조차 구울에겐 많지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와이트 킹을 가래떡마냥 줄줄이 뽑아내던 대전쟁 시절이 이상한 거다.
“대단하시군요! 포르겔 님도 아드님도.”
[으응…….]
리겔은 신관들의 관심이 익숙치 않은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겉보기엔 고작 열너덧 살 됨직한 녀석이니 오히려 그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쿠스켈이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이보게… 내가 성문을 습격할 때 만났던 자가 있다네. 그건 어찌할지…….’
이 말인즉 녀석은 목격자를 만들고도 멀쩡히 내버려뒀다는 소리였다.
‘죽…이는 건 안될 테고. 그건 알아서 잘 타일러 봐야지.’
‘으음. 알겠네.’
일단 리베라 마공작이란 놈의 습격은 일단락됐다.
남은 건 르델과의 협상뿐.
난 상황 정리도 할 겸 아까부터 쌀쌀맞게 굴던 벤시에게로 향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없죠. 죽은 사람은 많아도.]
“…….”
그렇게 말하는 벤시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혹시 이런 게 언데드 사이에선 농담 같은 건가?
“…피해는 별로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벤시가 메아리치듯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고갤 끄덕였다.
“뭐 그럼 다행이고.”
이게 다 빈트하겐이 성에 남아 있었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르델이 만든 데스 나이트와 벤시라 해도 주인이 없는 이상 리베라 마공작에겐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그럼… 당신네들 주인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왕성이 습격당했는데도 안 나타난다니.”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호오.”
말씀드릴 수 없다라.
모른다는 건 아니란 소린데.
“…그래, 그럼. 일단 알겠어.”
[네.]
“저기…. 이안 임페라 백작님?”
잠시 생각 좀 하려는데 신관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우선 두 분께서 우리 포르겔을 지켜 주신 건 고맙습니다만… 전하를 뵙고자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야…….”
어제까지만 해도 신관들에겐 난 그리 호의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애초에 르델을 만나려 하던 것도 악마 숭배자 놈들이 임페라 백작령을 습격한 데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한 걸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잊으셨습니까? 당신네들이 제 영지를 습격했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정말로 백작님이 그게 전하를 뵙는 목적이었다면, 우리들을 도와주시지도 않으셨겠죠.”
“흠흠.”
나이 많은 신관은 그래도 머리가 꽤나 돌아가는 건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찌 됐건 나와 빈트하겐 덕에 리베라 마공작의 습격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거니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다 말해 줘야 하나?
거래란 걸 할 때 무조건적인 호의는 그닥 좋진 않았다.
‘뭐 일단은 그게 좋을 것 같아 쌀쌀 맞게 굴었다만.’
리베라 마공작이 괜한 짓을 해 준 덕에 일이 꼬였다.
그래도 나름 좋게 꼬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틀 동안 지내 본 결과 포르겔의 흑마법사들은 그래도 비교적 멀쩡한 사람들인 축에 속했고, 이런 녀석들과 우호적인 관계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실은…….”
난 신관들과 쿠스켈을 한데 모아 놓곤 이야길 시작했다.
“라크레시아가 나타났다는 건 다들 아시겠죠.”
“…그렇습니다.”
“물론 녀석에게 대비하기 위해 연합도 힘을 모으고 있긴 하지만, 그걸론 녀석을 막기에 역부족인 게 사실입니다.”
“…….”
신관들은 내 말에 동의하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들도 카잔 제국의 옛 땅에 모여 살고 있긴 했지만, 두려운 건 마찬가지일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대한 힘 앞에서, 지금껏 이어져 온 포르겔의 평화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이구요.”
“그렇…군요.”
신관들은 아직 갈피를 못 잡았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봤다.
“그래서 처음엔 후보자를 정할 겸 포르겔에 들른 겁니다만…….”
“…후보자?”
난데없는 후보자 얘기에 신관들이 고갤 갸웃했다.
“…아!”
내 속셈을 깨달은 쿠스켈이 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난 작게 고갤 끄덕였다.
“카잔 제국의 땅을 규합할 새로운 왕. 그 후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흑마법사들의 왕, 르델 아르칸. 우리 아이소테르에선 그를 새로운 왕의 재목으로 생각 중입니다. 그럼 우린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예정이구요.”
“아…….”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신관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쿠스켈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미 연합 사람들은 흑마법은 최악의 범죄로 받아들이고 있을 텐데.”
“그거야 차차 개선해 나가야겠죠. 그게 가능할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이렇게 직접 온 거구요. 솔직한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약 포르겔이 사람들 인식처럼 끔찍한 흑마법사들의 왕국이었다면, 아마 르델을 후보에서 제외했을 거고요.”
“흐흠. 그, 그렇습니까?”
신관들은 갑작스런 칭찬에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아이소테르의 부군씩이나 되는 자가 이 먼 땅까지 온 거군.”
“그렇죠.”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된 녀석들은 고갤 끄덕였다.
저들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런 오지에 흑마법사들만 모여 근근이 살아가는 것보단 제대로 된 왕국으로 인정 받는 게 훨씬 좋을 테니까.
“하지만… 전하께서 이를 받아들이실지는…….”
“그게 문제죠.”
포르겔의 흑마법사들 상태가 괜찮은 것과 르델의 상태가 괜찮을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최악의 경우 날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걸 갖고 있는 거고.’
난 품 안에 고이 간직해둔 웨이 포인트 파편을 매만졌다.
혹여나 일이 틀어지면 곧바로 도망칠 거다.
“그쪽이 봤을 땐 어떨 것 같습니까? 르델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으음…….”
신관들은 고민에 빠진 듯 침음을 흘렸다.
“…실은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선 가급적 일선엔 안 나오시는 터라.”
“그래요?”
“무분별한 흑마법 사용을 금지하신 것까진 전하께서 하신 일입니다만, 그 뒤론 모두 우리 신관들에게 일임하셨죠.”
“흠.”
그렇다는 건 르델을 직접 만나 보지 않고서야 모른다는 소리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이젠 어찌할 생각인가?”
쿠스켈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당분간은 포르겔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포르겔이 습격당했으니, 르델도 곧 이곳으로 되돌아오지 않을까요?”
“아마 곧 오시긴 할 걸세. 전하의 권속들은 전하와 전언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
***
그렇게 우린 당분간 포르겔에 머물기로 했다.
리베라 마공작의 습격 다음 날.
여전히 나와 빈트하겐은 같은 방으로 안내 받았다.
“으응…….”
오늘도 빈트하겐의 콧수염 펄럭이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래도 적응은 된 건지 어제보단 좀 나았다.
똑똑.
수마를 떨쳐 내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나셨는지요.]
문 너머에서 벤시의 메아리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시면 바로 만나 보고 싶다시는군요.]
“…오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앞으로 계속 빈트하겐의 콧수염 소릴 들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내 벤시는 평소처럼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어 왔다.
별 대단한 음식은 없었다.
마른 고기를 잘게 다져 넣은 듯한 수프와 겉이 돌처럼 딱딱한 빵.
그리 부유한 왕국은 아니기도 했고, 왕성에 먹을 입이라곤 르델 말곤 없다.
벤시나 데스 나이트는 밥을 먹지 않으니까.
진수성찬을 기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얼른 영지로 돌아가고 싶군.’
달달하고 부드러운 게 땡겼다.
일레느가 만들어 준 파르페.
셀리버트의 약초들로 만든 콜라.
일이 잘 마무리 되면 배가 터지도록 먹으리라.
으적으적.
빈트하겐은 딱딱한 가죽 씹는 듯한 소릴 내며 빵을 씹어 먹었다.
난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맛있게 먹으려 빵을 스프에 적셔 먹었다.
“…턱 안 아프냐.”
“어차피 배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뭐 그건 그렇지.”
이런 걸 먹는 것도 서러운데 녀석과 귀찮은 논쟁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 수긍하곤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진 빵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다 드셨는지요.]
“…끄윽. 그런 것 같네.”
[그럼.]
따로 내어 온 물에 손까지 씻자 벤시는 기다렸다는 듯 앞장섰다.
“…….”
벤시는 조용히 우릴 르델에게로 안내했다.
포르겔 왕성에 위치한 알현실.
그 길 위엔 수많은 데스 나기트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데스 나이트 수가 좀 많군.”
“뭐 어제 습격도 있고 했으니 새로 만든 거겠지.”
“…그런가.”
[…….]
빈트하겐의 중얼거림에도 벤시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껏 쌀쌀맞게 굴던 녀석이라 그런지 빈트하겐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전하. 데려왔습니다.]
“…그래.”
알현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쇠 긁는 듯한 목소리.
그의 대답이 들려오자 푸른 안광의 데스 나이트 둘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그극……!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나름 번듯한 옥좌에 앉은 남자가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르델 아르칸.’
대전쟁 이전부터 줄곧 가장 강한 흑마법사였던 자.
반쯤 벗겨진 백발에 까슬까슬하게 자라난 회색빛깔의 수염.
오랜 세월 살아온 녀석답게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겉보기엔 다 죽어 가는 노인네긴 했지만, 절대 얕봐선 안 된다.
대전쟁 당시에 흑마법 랭크 7이었던 녀석이다.
어쩌면 지금쯤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었다.
흑마법이 비교적 인기가 떨어지는 랭크긴 해도, 르델이 어마어마한 강자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꿀꺽.
난 마른침을 삼킨 채 알현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제 있던 소동에 꽤나 큰 도움을 주셨더군요.”
르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아이소테르의 부군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엔 무슨 일로……?”
“그야…….”
난 르델에게 여기까지 온 목적을 얘기했다.
이 거래가 앞으로 당신한테 얼마나 이득이고, 다른 흑마법사들에게도 큰 이득이 될 거란 것도 빼놓지 않았다.
이야길 듣는 내내 르델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할 뿐이었다.
“…이상입니다.”
“…흠.”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난 슬쩍 품 안에 넣어 둔 웨이 포인트 파편을 꺼냈다
혹여나 녀석이 다른 맘을 품는다면 곧바로 튀어야 하니까.
“…좋은 제안이군요. 우리 흑마법사들이 잃었던 명예도 되찾을 수 있을 테고 말이죠.”
“…….”
“…며칠만 더 빨랐다면.”
“…이익……!”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녀석의 주위에서 검은 마탄이 쏘아졌다.
…파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왼쪽 손에서 끔찍한 격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