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리겔! 어디 있는 게냐!”
쿠스켈은 오두막 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어디……!”
그러던 그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탁자 위에 놓인 낯선 종이 한 장.
불안한 기운을 느낀 쿠스켈은 얼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들을 되찾고 싶다면 오늘 밤 오두막 문을 열고 기다려라.]
“이이익……!”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처음 보는 필체였지만, 이런 짓을 할 놈들이라면 누군진 안 봐도 뻔했다.
“이 망할 악마 숭배자놈들……!”
지금 당장이라도 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지직!
괜한 종이만 찢어발기며 분을 삭히는 것 외에는.
“…….”
하는 수 없이 그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어 버린 아들을 또다시 잃지 않기만을 바라며.
***
“미안하게 됐습니다만… 전하를 만나 뵐 순 없습니다.”
“…왜죠?”
신전 밖으로 빠져 나온 신관들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게…….”
뭔가 비밀이라도 있는 듯 쉽사리 대답 하지 않는 나이 많은 신관.
그러다 다른 신관이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이보게 구프스! 그 얘긴 비밀이잖나!”
“그럼 어떡합니까! 지금 당장 안내해 주지 않으면 다 때려 부술 기센데!”
“흐음.”
딱히 때려 부술 생각은 없었다만.
그나저나 르델이 여기 없다고? 왜지?
“무슨 일인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실은 며칠 전부터… 전하께서 보이질 않으십니다.”
“호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예전부터 가끔 이럴 때가 있으셨거든요. 왕성의 마물들에게도 별 이상이 없는 걸 보면 변고가 생긴 건 아니실 겁니다.”
라스하겐도 나름 왕국이다.
더군다나 마공작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설치고 다니다 보니, 이래저래 왕성 밖에서 할 일도 많을 거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내 입장 상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흐음.”
이거 귀찮아지게 생겼다.
후딱 만나서 얘기만 하고 되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지금이 딱 없을 때라니.
“그럼… 어쩌지?”
난 같이 온 빈트하겐에게 슬쩍 물었다.
녀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은 며칠 기다려 보는 게 나을 듯하군.”
“아무래도 그렇지?”
“윽…….”
일단 며칠 기다려 보겠다는 말에 신관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따로 지낼 만한 곳이…….”
“저기 있지 않습니까?”
난 포르겔 한가운데 자리 잡은 왕성을 가리켰다.
“그, 그건…….”
“뭐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왕성의 마물들도 멀쩡하다 하셨고. 그럼 묵는 데 별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
아무리 라스하겐이 흑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왕국이라 해도 왕국은 왕국이다.
그런 왕국이 손님 둘 대접 할 여력도 없을까.
“…알겠습니다.”
“후후.”
신관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우릴 왕성으로 안내했다.
*
포르겔 한가운데 위치한 왕성.
한때 수많은 마법사들로 북적이던 왕성은 지금은 조금 특별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왕성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이는 사람이 아닌 데스 나이트였다.
짙푸른 안광을 유지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에게선 꽤나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거 공격은 안 하겠지?”
장난스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
신관들이 다가가자 데스 나이트는 문 옆에 위치한 레버를 잡아당겼다.
쿠르르…….
그러자 육중한 철문이 요란한 소릴 내며 열렸다.
“…들어오시지요.”
“예입.”
왕성 내부는 밖 포르겔의 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칙칙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가득했다.
벌써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서 그런지 어둑어둑한 분위기가 성 안에 내려앉았다.
잠시 멀뚱거리고 서 있자, 누군가 다가왔다.
[왕성엔 무슨 볼일이신지요.]
“오.”
창백한 피부에 조금은 앳된 듯한 여인.
병약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게 있었다.
‘다리가 없네.’
벤시.
데스 나이트와 함께 흑마법사들을 원호하는 마물.
데스 나이트마냥 어마어마하게 센 마물은 아니다.
소설에 나온 바에 따르면, 흑마법 랭크 5부터 다룰 수 있는 녀석이니까.
그래도 르델이 만든 벤시라면 꽤나 강할 거다.
메아리치는 듯한 목소리로 물은 여인은 다름 아닌 벤시였다.
아마 원작대로 흘러갔더라면 일레느가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뭐 힘은 일레느 쪽이 훨씬 약했겠지만.’
신관들이 말한데로 포르겔의 왕성은 생각보다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래서 르델이 부재중이라 해도 별 걱정 없었던 건가?
“…손님이십니다. 전하를 뵙고 싶다더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와 주시길.]
“저,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벤시는 대답 대신 신관들을 향해 고갤 꾸벅였다.
녀석의 허락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신관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 잠시 만요.”
“네,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저희들에 대한 건 다른 흑마법사들에겐 비밀로 해 주셨음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거야 당연한 얘기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딱히 문제를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후후. 좋아요. 그럼.”
신관들을 향해 고갤 까딱이자 녀석들은 호다닥 자릴 비웠다.
“…흠.”
“왜 또.”
“아무리 봐도 저자들.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는군.”
빈트하겐은 멀어져 가는 신관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런가?”
사실 내가 봐도 그런 감이 없진 않았다.
오히려 처음 만났던 쿠스켈이 더 강해 보인달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쿠스켈이 1급 신도인가 뭔가 했으니까, 신관들이면 더 세겠지.
“뭐 아무튼.”
고갤 돌려보자 벤시가 왕성 중앙에 위치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벤시라 그런가.
걸음걸이에 고저가 없는 특이한 걸음이다.
물 위를 헤엄치는 새 같달까.
‘아무래도 다리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난 특이한 벤시의 걸음걸이를 감상하며 조용히 뒤를 따라 나섰다.
왕성에 산 사람은 없는 듯했다.
꽤나 많은 수의 벤시와 데스 나이트들만 있을 뿐.
이만한 수의 상위 언데드들을 부리다니.
대전쟁 이전부터 최강의 흑마법사라 불리던 녀석다웠다.
[…….]
르델이 없어서 그런지 데스 나이트들은 중요해 보이는 방들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 외에 벤시들은 청소 도구를 들고 왕성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길.]
“아. 그래…요.”
우릴 안내하는 벤시는 조금 급이 높은 것 같았다.
일단은 마물이니 존대를 하지 말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벤시다 보니 생긴 것보단 나이가 많이 않을까 싶다.
어쩌면 대전쟁 이전에 활약하던 녀석들일지도 모르고.
“어딘가 낯이 익은 녀석들이 많군.”
“…그래?”
“특히나 데스 나이트 놈들. 갑옷들이 익숙한 게 꽤나 대단한 놈들을 모아 놨구만.”
“으음…….”
“신관 놈들이 좀 어리숙했다고 느슨해지지 마라. 여긴 어디까지나 적진 한가운데니까.”
“뭐… 그거야 당연하지.”
빈트하겐의 말에 새삼스레 지금 내 처지가 체감됐다.
대전쟁 시절 날고 기던 기사들.
그런 놈들을 데스 나이트로 부리는 흑마법사라.
거기에 포르겔은 과거 마법으로 유명하던 지방.
빗자룰 잡고 있는 녀석들 마저 생전엔 꽤나 강한 마법사였을지도 모른다.
우릴 안내하던 벤시는 한 방 앞에 멈춰 섰다.
[여깁니다.]
“…그래요.”
방 내부는 꽤 깨끗했다.
깔끔하게 개진 침구류부터 먼지 한 톨 없는 청결함까지.
하긴 언데드를 동원하다 보니 남는 게 인력일 테니까.
[그럼. 모쪼록 편히 쉬시길.]
벤시는 그렇게 고갤 꾸벅 숙이곤 자릴 뜨려 했다.
“흠.”
하지만 그녈 이렇게 보내긴 뭔가 아쉬웠다.
신관 녀석들을 보니 르델과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는 아닌 것 같고.
차라리 매일 붙어 있는 벤시나 데스 나이트들한테 정보를 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뭔가요?”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아뇨. 뭐 그냥… 매번 ‘저기’라 부를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냥 매번 ‘저기’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
이건 뭐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다.
‘죽기 전에도 저랬나.’
[아마 그럴 겁니다.]
“허윽.”
녀석은 무슨 독심술이라도 쓸 줄 아는 듯 머릿속으로만 한 말에 대꾸했다.
[독심술 같은 건 없습니다. 절 처음 보시는 분들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해서요.]
“그, 그렇군요.”
난 멋쩍은 듯 머릴 긁적였다.
그러는 한편 눈앞의 벤시를 슥 훑어봤다.
핏기 한 점 없는 피부만 빼면 평범한 사람과 굉장히 흡사한 외모였다.
아니, 오히려 과거에 외모로 남자 여럿 울렸을 법하달까.
거기에 짱짱하게 묶은 흰 머리결은 왠지 모르게 이슬린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벤시도 과거 마법사였던 시절에 베로니아 가문 사람일지도 모른다.
베로니아 가문이 신성 왕국에 많이 살긴 해도, 머나먼 타지에 사는 베로니아 가문 사람들도 많았다.
‘당장 이슬린도 그랬지.’
“크흠.”
[그럼. 이번엔 진짜 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불러 주시길.]
“예입.”
녀석은 이번엔 진짜로 고갤 한 번 숙이곤 자릴 떴다.
쌀쌀 맞은 녀석이다.
아마 전생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형편없는 흑마법사가 시체를 되살릴 경우엔, 시신에 남아 있는 혼 찌꺼기나 생전의 기억들 대부분이 소실된다.
하지만 르델 정도 되는 녀석이라면 다르다.
생전의 기억 대부분을 되살리고, 덤으로 성격까지 덧붙이는 게 가능할 테니까.
‘뭐 그래도 기억은 가능하면 지웠겠지만. 주인의 명령만 따르는 놈으로 만들려면.’
“재밌군. 베로니아 가문 사람을 벤시로 부리는 흑마법사라.”
빈트하겐은 벤시가 방을 나서자 참아 왔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 아마 알려지면 뒤집어지겠지?”
“후후. 안 그러길 바라야겠지.”
베로니아 가문은 널리 퍼진 명성답게 자존심이 강한 가문이다.
그런 놈들이 자기네 가문 사람을 벤시로 만들어 쓰는 중인 걸 알면 어떻게 될까.
‘아마 생난리를 치겠지.’
베로니아 가문.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선 녀석들의 힘도 필요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려 르델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 해도, 그 뒤에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흑마법사들의 평판.
그 외에도 자잘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면 꽤나 골치가 아파질 듯했다.
‘그나저나 디아 녀석. 잘했나 모르겠네.’
자이겔론드에 가기 전, 디아를 떼어 놓으려 한 것도 있었지만, 난 녀석에게 특별한 임무를 내려 줬다.
베로니아 가문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한 가지 수.
보아하니 그럭저럭 잘 풀린 것 같았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질 못 들었네.’
가짜 라크레시아의 정체는 소설로 봐 왔던 디아였다.
지금의 디아와 그 디아는 별개의 사람이긴 했지만, 때문에 녀석을 아무런 마음 없이 대할 수가 없었다.
임무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진 들어 보지도 못했고.
“끄응…….”
녀석을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미안해지면서 한편으론 꺼려졌다.
어쩌면 녀석이 곧 미래의 디아가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
‘아니지. 어쩌면 녀석이 그렇게 되는 건 확정된 미래일지도…….’
이미 미래의 디아는 악인이 되어 이 세계를 깽판 치는 중이다.
그럼 디아가 그렇게 되는 건 정해져 있는 미래인 건가?
아니면 별개로 흘러가는 건가?
“…젠장.”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직 나는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
“난 먼저 자겠다.”
혼자 중얼거리는 내게 빈트하겐이 말했다.
녀석은 벌써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을 다 벗어 던지곤 셔츠와 속옷만 입은 채였다.
북슬북슬한 콧수염을 가진 녀석답게 온몸에도 털이 많았다.
‘침대가 두 개라 다행이군.’
저런 놈이랑 같이 잘 바엔 바닥에서 잤을 거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글렌과 같은 침대를 썼었는데, 오늘은 털이 북슬북슬한 아저씨랑 같이 잔다니.
난 내일 할 일들을 하나 둘 머릿속으로 그려나가며 애써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