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난 그 가운데서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유부남이라니.’
결혼하면 뭔가 사람이 달라진다던데, 사실 지금은 달라진다기보단 얼떨떨했다.
‘이게 꿈인지 생신지…….’
“으응… 이안…….”
“엇.”
옆에 아직 잠이 덜 깬 이글렌이 침음을 흘렸다.
눈을 꼭 감은 채 잠꼬대를 부리는 그녀를 보자 어젯밤이 떠올랐다.
“흠흠.”
“…일어났어요?”
“아, 네.”
“흐흐…….”
이글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후…….”
그리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신혼이라 좀 더 즐기고 싶긴 했지만, 더 했다간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이제… 가시는건가요?”
이글렌은 두 볼을 붉히면서도 살짝 아쉬운 듯 말했다.
“가야죠. 할 게 많으니.”
“…이안.”
“네. 여왕님.”
“그냥… 하지 말까요?”
“…후후.”
앞으로 내가 뭘 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하는 말이었다.
이제 난 아이소테르의 부군이다.
저 멀리 떨어진 카잔 지역이라 해도,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녀석들이면 대강 소문은 들었을 거다.
‘흑마법사들의 왕, 르델 아르칸도 말이지.’
이글렌이 내놓았던 계략.
카잔 지역을 통합할 왕을 만든다.
우린 그 왕의 후원자가 될 예정이고.
아직 아이소테르의 대신들에겐 비밀인 사항이다.
녀석들이야 당연히 반대에 나설 거다.
게다가 지금 아무리 연합이 개판이긴 해도, 흑마법사와 내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마법 자체를 합법화하겠다는 조건을 내걸 거니까.
이는 그간 연합법의 테두리 안에 살던 녀석들 입장에선 절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아이소테르의 귀족들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사실 아직까진 중요치 않았다.
그건 조금 먼 미래의 일이니.
일단은 르델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먼저였다.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었나요?”
“그치만…….”
이글렌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듯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이 계획을 짠 건 이글렌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녀여도 남편을 사지로 보내자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괜찮습니다. 전 아직 죽을 생각이 없거든요.”
“…누군 뭐 죽을 생각하고 죽나요?”
“흐흐. 그건 그렇군요.”
이글렌은 입을 비죽 내밀며 볼을 부풀렸다.
난 그런 그녈 향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벗어 놓은 옷가질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이글렌은 포근한 솜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 내 소매를 붙잡았다.
“…꼭 살아 돌아와야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구 명령인데.”
“…고마워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
솔직히 나도 사람이다.
사지로 나서기보단, 행복한 신혼 생활을 만끽하고 싶었다.
차라리 이 여자랑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니지.’
앞으로 이 대륙에 평범한 삶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온 대륙이 전쟁에 휩싸이고, 살아남는 게 꿈만 같은 나날이 계속 될 거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
난 이글렌의 손을 한번 꼭 잡곤 옷가질 다시 챙겨 입었다.
철컥.
벨트로 허리춤을 단단히 동여매곤 이글렌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있어요가 아닌 다녀오겠습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단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그래요. 이안.”
한 손엔 하룬에게 부탁해 작게 부순 웨이 포인트 파편이 들려 있었다.
여기에 마나를 흘려 넣자 사위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후.”
“왔나.”
“그래.”
임페라 백작령의 집무실.
그곳엔 이미 준비를 끝마친 빈트하겐이 대기하고 있었다.
르델을 만나러 가는 길엔 칼로스가 동행하기로 했다.
프리아나와 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건 좀 위험했다.
아무래도 이제 막 랭크 7에 오른 프리아나보단 숙련된 빈트하겐이 더 강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여차하면 왕국을 지켜 줄 녀석이 필요해.’
최악의 최악을 상정한다면, 르델을 만나러 간 사람이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슬슬 침체기에 접어든 빈트하겐보단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프리아나가 살아 있는 편이 나을 거다.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아니 뭐. 그냥. 전 기사단장님이 호위해 준다니 감동해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 이유는 절대 아니겠군.”
“흐흐. 그런가?”
끼익.
인기척이 느껴져서 그런지, 이슬린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벌써 오셨군요.”
“그렇지.”
“어젯밤은 잘 주무셨나요?”
“으응? 뭐 그거야…….”
난 민망함에 괜히 얼굴을 붉히며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슬린은 한가득 싸 놓았던 짐을 건넸다.
회복용 포션과 먹을 식량 등 여행에 필요한 건 다 챙겨 놨다.
“이야. 역시 이슬린이야. 준비성이 철저하다니깐.”
“두 분이서 보름간 드실 수 있는 양입니다. 여차하면 조금 더 드실 수 있겠죠.”
“여차하면이 뭐냐.”
“…가능하면 일어나지 않았음 하는 일이겠죠.”
“흐흐. 나도 그러길 바라야겠군.”
이슬린이 건넨 짐엔 간단한 갑옷과 정체를 숨길 허름한 로브까지 들어 있었다.
적당히 걸쳐 입고 황혼까지 허리춤에 찼다.
[오랜만이구나. 인간.]
“그런가?”
[못 본 사이에 기력이 좀 쇠한 것 같군. 이유라도 있나?]
“…시끄러.”
황혼의 전언을 애써 무시한 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다른 이들도 부를까요.”
“됐어. 시간 아깝게. 다들 할 일 많잖아?”
“…그렇죠.”
떠나기 전 작별 인사라도 나눌까 했지만, 괜히 그랬다간 발걸음만 무거워질 것 같아 거절했다.
“자. 이제 가 볼까.”
“그래.”
집무실 바닥을 열자 웨이 포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갔다 올 때까지 이거 치우면 안 된다?”
“네. 백작님.”
“후후.”
찹.
석판 위에 손을 얹자 빈트하겐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웨이 포인트 파편을 쓸까 했지만, 이건 비상용이다.
괜히 자주 썼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진다.
여차하면 바로 쓰긴 해야겠지만.
“간다.”
“잘 다녀오십시오. 백작님.”
이슬린은 짧게 고갤 숙이며 인사했다.
난 그런 그녈 향해 한 번 피식 웃곤 석판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도착지는 카잔 제국에 위치한 웨이 포인트.
소설 속에서 묘사되던 지역을 떠올리자 금세 도착지가 설정됐다.
파앗!
이내 환한 빛과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 * *
“…여긴가.”
흑마법사들의 근거지.
포르겔.
카잔 제국에서 가장 마법이 발달했던 영지다.
지금은 그냥 마법이 아니라 흑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영지지만, 웨이 포인트는 포르겔 근처의 작은 동굴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로 파고들면 과거 고대인들이 식량 저장고로 쓰던 유적이 나온다.
지금은 뭐 썩은 걸 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다.
텅 빈 유적이다 보니 굳이 갈 필요는 없었다.
“…으윽.”
빈트하겐은 공간 도약이 익숙치 않은 듯 침음을 흘렸다.
동굴 벽에 손까지 짚고 고통스러워하는 게 꽤나 고통스러운 듯했다.
“몇 번 더 타 보면 익숙해질 거다.”
“그건… 사양하고 싶군.”
“크흐흐. 그래?”
미안하지만 임페라 백작령으로 돌아갈 때 무조건 한 번 더 쓰긴 해야 했다.
뭐 몇 번 타 보면 다 적응될 거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펄럭.
이슬린이 싸 준 배낭에서 큼지막한 로브를 꺼냈다.
배낭을 맨 채로 그 위에 로브를 뒤집어쓰자 등이 불룩 솟은 게 꼽추 같았다.
“핏이 안 사는구만그래.”
“…핏?”
“모양새가 좀 빠진다구.”
“흥.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였나?”
“뭐… 일단은 겉보기엔 나도 이십대니까.”
빈트하겐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며 복장을 갖춰 입었다.
혹시 몰라 얼굴에 위장용 진흙까지 덕지덕지 처발랐다.
빈트하겐도 딱히 꺼리는 투 없이 얼굴에 진흙을 덧발랐다.
나이도 꽤 있는 놈치곤 얌전하달까.
왕이 시키는 거면 뭐든 한다.
그런 녀석답게 이런 궂은일도 딱히 마다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튼 그렇게 큼지막한 로브에 진흙까지 덧칠하자, 아이소테르에서 본 흑마법사 놈들과 비슷한 생김새가 됐다.
겉보기엔 추레하고 음흉한 흑마법사 둘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나.”
“음… 그렇지 않을까?”
“적어도 해골 몇 개는 달고 있어야 하지 싶다만.”
“해골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흑마법사들의 왕국인데, 그 정도는 해야 다른 놈들 사이에서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을 테니까.
혹시나 하는 김에 이슬린이 챙겨 준 짐을 뒤적였다.
하지만 해골로 보이는 건 없었다.
“아쉽지만… 이대로 가야겠네.”
“그래야겠군.”
애먼 사람 붙잡아 해골을 뜯어 낼 수도 없으니.
일단 아쉬운 대로 이 정도만 하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으음…….”
동굴 밖으로 나오자 잎이 뾰족뾰족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란 숲이 나타났다.
확실히 북쪽에 치우친 지역이라 그런지 아이소테르보다 쌀쌀했다.
로브가 없었더라면 조금 춥지 않았을까 싶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아마… 이쪽일 거야.”
조잡하게나마 그려진 지도를 챙겨 들곤 숲길을 걸었다.
“르델에 대해선 잘 아나?”
“…조금은 알지. 녀석이 ‘그런’ 짓을 벌이기 전까진 그래도 흑마법은 제도 안에 편입되어 있었으니까.”
“음…….”
아르칸 르델.
흑마법이 대역죄 취급을 받게 된 건, 녀석이 카잔 제국의 편에 드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그 전까진 흑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강한 놈으로 인기가 많았던 놈이었다.
그래 놓곤 대전쟁 이후엔 홀로 왕을 칭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으니.
여러모로 난 놈이다.
‘뭐 그래 봤자 결국엔 죽지만.’
소설에서 놈은 진짜 라크레시아한테 개겼다가 죽는다.
덕분에 흑마법사들의 왕국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진 잘 묘사되지 않았다.
그저 왕인 녀석이 개겼다가 목이 달아나고, 그 밑에 흑마법사들의 삶은 그닥 조명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소설로 흑마법사들을 봐 왔고, 실제로도 접한 내가 봤을 때 대강 상상은 갔다.
인간들을 노예로 부리고, 힘이 다하면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왕국.
소설에서도 그런 묘사가 언뜻언뜻 나오긴 했다.
힘이 다하고 죽을 때가 된 노예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 구울이 돼 버린다고.
꿀꺽.
우린 지금 그런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소테르 최강의 검과 함께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무섭달까.
‘애초에 검술 랭크랑 흑마법 랭크는 상성 차이가 좀 있기도 했고.’
무시무시한 데스 나이트들을 앞세워 고기 방패로 세우곤, 끔찍한 저주와 마탄 세례를 퍼붓는 흑마법사들.
그런 녀석들 한가운데라면 나나 빈트하겐이라 해도 맘대로 날아다닐 순 없을 거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야지.’
난 품 안에 웨이 포인트 파편을 꼭 쥔 채 생각했다.
이제 난 함부로 죽어도 될 사람이 아니다.
임페라 백작령의 사람들, 그리고 날 기다리고 있을 이글렌을 위해서라면 절대 죽어선 안 된다.
“저기군.”
숲길을 따라 계속 걷자 높다란 성채 하나가 나타났다.
“…응?”
겉보기엔 꽤나 멀쩡한 성채였다.
붉은 달이 뜨고 24시간 어둠만이 물든 그런 풍경을 상상했는데, 실제론 조금 추운 지방에 위치한 평범한 성채 같았다.
“저기… 맞지?”
“난들 알겠나.”
“으음. 그건 그렇지.”
일단 가까이 가서 봐야 알 것 같았다.
…퍼억!
“헉.”
성채 가까이 다가가자, 근처에 농사를 짓고 있는 녀석들과 마주쳤다.
땅에 곡괭이질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노예인가?
“저기…….”
난 그런 이들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곤 이내 녀석들의 정체를 확인하자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구울?”
뻥 뚫린 두 눈과 썩어 문드러진 살점.
이미 죽은 지 한참은 된 시체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왜 농사를……?
신기한 건 놈들도 마찬가지로 놀란다는 것이다.
[…크르륵?]
구울들은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듯 고갤 갸웃거리며 괴성을 흘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