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82화 (182/222)

182화

“…네?”

카잔 제국?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릴 하는 걸까.

이 세계는 결혼 앞두고 짓궂은 농담이라도 하는 게 유행이었나?

“그게 뭔 해괴망측한 소리십니까.”

“…….”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농담이에요, 이안.”

이글렌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껏 이글렌을 소설로도 보고, 직접 본 난 알 수 있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내게 농담이라 하곤 혼자 카잔 제국으로 가겠다는 뜻이지.

“…안 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안 된다뇨? 농담 좀 해 본 거 가지고.”

“농담이 아니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휴.”

이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맞아요. 이안. 미안하지만… 전 진심이에요.”

“왜 그런 짓을…….”

“그야… 그래야만 하니까요. 우리 앞에 닥칠 재앙을 상대하려면.”

가짜 라크레시아.

절망 앞에 변해 버린 이 소설의 주인공.

그런 놈을 상대하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내가 대륙 전역을 돌며 고대인들의 유물을 챙기는 것처럼, 이글렌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차를 든 이슬린이었다.

“…혹시 제가 들어가기 부적절한 상황인 건가요.”

방금까지 결혼이니 뭐니 하더니만 벌써부터 부부싸움이라니.

괜히 민망해졌다.

“아니야, 이슬린. 차 새로 끓여 온 거야?”

“…네, 여왕님.”

“후훗. 안 그래도 되는데. 이슬린이 끓여 준 차는 언제 먹어도 맛있으니까.”

“과찬이십니다.”

이슬린은 따끈따끈한 차를 내려놓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난 고갤 돌려 이글렌에게 물었다.

“방금 말씀하신 내용.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른 녀석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그건…….”

“제 상식선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요. 다른 녀석들도 듣고 동의해 준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슬린은 우리 둘 사이에 껴서 눈치를 살폈다.

난 그런 그녀에게 고갤 끄덕였다.

“곧 데리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 회의실에 임페라 백작령의 사람들 대부분이 모여들었다.

프리아나, 이슬린, 디아.

거기에 마침 결재 서류를 들고 온 이스바르트도 엉겁결에 자리했다.

“허윽… 여, 여왕님……?”

“반가워요. 이스바르트라 했죠? 이야긴 많이 들었어요.”

딱히 이글렌한테 이스바르트 얘길 한 기억은 없는데.

이슬린이 해 준 건가?

“가, 감사합니다…….”

이스바르트는 여왕 앞이라는 게 떨리는 듯 두 볼이 붉어진 채 고갤 숙였다.

“이스바르트라. 어딘가 낯이 익은 이름인데. 출신 가문은 어디지?”

회의실엔 빈트하겐도 자리해 있었다.

전직 기사단장이라 그런지 감이 예리했다.

이스바르트의 가문은 볼턴가.

과거 대전쟁 때 카잔에 동조했다 멸문당한 가문이니까.

전왕 에런골드 2세 때부터 일하던 녀석이다 보니 주의 감시 대상으로 어쩌다 봤을 수도 있었다.

“그, 그게…….”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아들이라도 소개시켜 주려고?”

“…뭐라? 이 X끼가…….”

“진정하세요. 칼로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흥.”

난 괜히 빈트하겐한테 까칠하게 대했다.

녀석이 혼자 이글렌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 대략적으로나마 이글렌의 계획을 알고 있었단 거니까.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라 그러면 뜯어말려야지.

얌전히 이글렌을 임페라 백작령까지 호위해 온 건 또 뭐람.

하여간 왕한텐 거역 한 번 못하는 놈다웠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후.”

이글렌은 차분히 자신의 계획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카잔 제국 영토는 혼란 그 자체다.

힘 좀 세다 싶으면 저마다 왕을 칭하고 난리도 아닌 상태.

가짜 라크레시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얀 공작이란 가명까지 써 가며 세력을 키웠으니까.

‘…그러고 보니 얀 공작이라. 웃기는군.’

얀 공작.

이안을 이 세계 발음으로 빨리 말하면 얀이 된다.

애초부터 날 놀리려고 만든 가명이었다.

난 지금껏 몰랐지만.

‘뭐 아무튼.’

난 다시 이글렌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혼란한 상황.

이를 끝내기 위해선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힘이야 얀 공작이 가장 강하긴 하다만, 녀석은 카잔 제국을 통일하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저번 던전화 소동을 낸 이후론 조용했으니까.

일부는 그저 힘을 비축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거라곤 했지만, 실상을 아는 내가 봤을 땐 아니다.

놈은 온 대륙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카잔 제국의 옛 땅에서 칠 깽판은 다 쳤으니 자릴 뜬 걸 거다.

“그래서…….”

이글렌은 마침내 그녀의 본심을 얘기했다.

“카잔 제국의 옛 땅에 새로운 왕을 세울 겁니다.”

“새, 새로운 왕이요?”

프리아나의 상식선에선 상상조차 힘든 내용이었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런 반면, 빈트하겐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역시.”

이글렌의 얘기를 들어 보면서 대충 짐작은 갔다.

카잔 제국의 공백을 메꿀 새로운 왕국.

이글렌은 그 왕국의 킹 메이커가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성공만 한다면, 아이소테르 급으로 강한 왕국이 하나 탄생하게 되는 거니까.

그것도 아이소테르에게 우호적인 왕국.

카잔을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만 있다면, 이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럼 생각해 둔 자는 누굽니까.”

“….”

이글렌은 좀처럼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오물거렸다.

“…이미 카잔 제국에 왕으로 군림하는 자들 중 하납니다.”

“…설마?”

“르델. 흑마법사들의 왕입니다.”

“하!”

흑마법사들의 왕.

아르칸 르델.

카잔 황제에게 협력해 거짓된 증언으로 대전쟁을 불러일으킨 흑마법사.

그놈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고?

“하, 하지만 흑마법은 연합법상 대역죄에 해당하는…….”

“그건 어디까지나 연합법일 뿐입니다. 대전쟁 전엔 흑마법사들도 다른 랭크 보유자들처럼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흑마법사 중에 미친놈이 많은 거지, 흑마법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니까.

대전쟁 이전엔 그냥 마법사나 흑마법사나 별다를 게 없긴 했다.

하지만 그건 대전쟁 전 이야기다.

이미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착한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죽었다.

주변과 거리낌 없이 녹아들던 흑마법사들은 금세 연합의 표적이 되어 분풀이 대상으로 처형당했으니까.

이제 남은 건 음지에서 악랄한 짓만 골라서 하던 흑마법사들뿐이다.

그런 놈들이 득실대는 흑마법사들의 왕, 르델을 왕으로 세운다고?

“…그래서 왕국 사람들한텐 비밀로 한 거였군요.”

“…그래요. 하지만 르델도 어디까지나 유력한 후보일 뿐, 다른 왕들도 선택지는 많아요.”

“하지만 여왕님은 르델이 제일 마음에 드시겠지만요.”

“…그렇죠.”

“하아…….”

난 한숨을 깊게 내쉬곤 이글렌을 다시 바라봤다.

결연한 그녀의 눈빛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두 눈은 또렷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렌의 제안이 아주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카잔 제국의 옛 땅에 새로운 왕을 세우는 거?

좋다. 우리 입장에선 든든한 우군이 하나 생기는 거니까.

그 후보자로 르델을 점찍은 거?

나쁘지 않다. 애먼 녀석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쉬울 테니까.

“르델에겐 아이소테르에서 흑마법을 금지하지 않겠단 걸 조건으로 내걸 겁니다. 그 외에 금전적으로나 힘을 빌려주는 것도 걸 거구요.”

“으음.”

“물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계속 금지시킬 겁니다. 그건 대전쟁 이전에도 금지였으니까요.”

그렇담 더더욱 좋은 생각이다.

연합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지로 파고 들어간 흑마법사도 많으니까.

지금 연합법은 물렁물렁한 찰흙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덕분에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온 흑마법사들이 여기저기서 깽판 치고 다니는 거고.

차라리 흑마법사들의 왕국을 만들고 관리는 하는 게 백번 나았다.

“…….”

들으면 들을수록 괜찮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굳이 여왕님이 가실 필요는…….”

“간단한 제안이 아니니, 이쪽도 제대로 나서 줘야 르델도 맘 놓고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려면 여왕인 제가 직접 그와 거래에 나서야겠지요.”

“아…….”

어떻게든 이글렌의 생각에 반대해 보려 했지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답답한 마음에 괜히 머릴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르델이 거절이라도 한다면, 적지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거나 다름없…….”

“그건 걱정 마라. 내 한 몸 바쳐 여왕님껜 손끝 하나 댈 수 없게 할 테니까.”

빈트하겐이 한마디 거들었다.

어떻게든 이글렌을 말리고 싶은데, 녀석이 한 마디 하자 이글렌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한 대 때릴까.’

은근슬쩍 녀석의 머리에 꿀밤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뭐 그랬다간 곧바로 다진 고기가 되겠지만.

“…하.”

“이안. 어떻게 생각해요?”

“그게…….”

난 회의실에 앉은 다른 녀석들을 둘러봤다.

다들 입을 꾹 닫은 채 서로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지금껏 섬기던 주인에게 반기를 들까, 아니면 그 주인의 주인인 여왕에게 반기를 들까.

뭐 하나 선택하기 힘든 선택지라 그런지 다들 대답 대신 내 눈을 피하기 바빴다.

‘이 자식들이…….’

“여왕님.”

그런 그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슬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슬린. 너밖에 없구나.’

얼른 이 당돌한 여왕님을 말려 주렴.

“여왕님께서 직접 가시는 건 저도 반대입니다.”

‘그래! 더! 더 말려라!’

하지만 이슬린은 내 기대완 정반대의 이야길 내뱉었다.

“그럼 여왕님까진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이가 대신 가면 되지 않을까요.”

“…응?”

“예를 들면… 여왕님의 부군이라든가.”

이슬린은 그러면서 날 흘긋 바라봤다.

“…앗.”

그 말인즉.

여왕이 가는 게 싫으면 내가 가라고?

“그건… 위험할 텐데요.”

“그래도 여왕님이 가시는 것보단 덜 위험하겠죠.”

둘은 죽이 잘 맞는 자매 마냥 대화를 이어 갔다.

“이안… 가능하겠어요?”

“그, 그게…….”

이글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봤다.

여기서 내가 거절하면, 아마 이글렌이 직접 가겠다고 할 거다.

“…하아.”

이런 상황에서 거절을 어떻게 하겠나.

난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네. 여왕님.”

“…고마워요! 이안!”

이글렌은 내 품을 꼭 그러안은 채 말했다.

“그럼.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슬린이 그런 우리 둘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뭔데.”

“뭐긴요. 결혼이죠.”

“…아.”

* * *

이글렌이 몰래 임페라 백작령으로 온 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지난 건지 잘 기억도 안 난다.

너무 바빴으니까.

한 왕국의 주인과 하는 결혼이다 보니 준비할 게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양쪽 다 부모님이 없다는 점.

뭔가 욕 같긴 했지만.

덕분에 우리 둘 모두 거창한 양가 상견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아마 아이소테르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만에 성사된 결혼 준비가 아닐까 싶다.

이미 약혼도 한 터라 보름 안에 끝난 거지, 아마 그게 아니었더라면 몇 달은 족히 걸렸을 테니까.

결혼식 당일.

여왕의 결혼답게 대륙 거물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었다.

연합의 수장들은 뭐 당연한 얘기고, 심지어 자이겔론드의 새로운 왕, 레오윈까지 자리해 줬다.

내 결혼식에 참석해 준다길래 공간 도약용 마핵은 선물로 마련해 줬다.

결혼식은 테라리움에서 히테라교 방식으로 치러 줬다.

대신관들이 와서 주절주절 기도도 읊어 주고, 축복도 내려 줬다.

주에른과의 인연 덕에 대신관들 대부분이 결혼식에 참석해 줬다.

연합의 수장들이 결혼식에 참여한 이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게 인상적이었다.

무투왕 탈리스가 살짝 아쉬운 티를 내긴 했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전생까지 합하면 꽤나 오래 살긴 했지만, 결혼은 처음이다.

긴장 탓인지 아님 정신없던 탓인지, 난 그냥 이글렌이 준비해 놓은 관례에 따라 결혼식을 진행했다.

주변인들의 성대한 축복 아래, 결혼식은 별 탈 없이 끝났고.

그렇게 난 유부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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