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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81화 (181/222)

181화

“…푸하핫!”

한창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이글렌의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긴 했다.

“가, 갑자기 왜 웃으…….”

“역시 이안답네요.”

“…네?”

“…흐흐.”

이글렌은 비실비실 웃으며 이야길 이어 나갔다.

“정말이지 당신은 신기한 사람이에요. 어떨 땐 무서울 정도로 영리한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떨 땐 어리숙한 남자 같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부려 먹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떨 땐 끔찍이 여기시니까요.”

“그런…….”

칭찬인가?

욕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웃으면서 하는걸 보면 칭찬 같기는 했다.

“…그래도 저한테 제일 먼저 반지를 고르게 해 주신 거죠?”

“당연하죠. 여왕님이신데.”

“후후…….”

다른 애들도 보여 주려곤 했지만,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

고르는 건 이글렌이 먼저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건 고맙네요. 절 제일 먼저 생각해 주셨단 거니까.”

“아… 그렇죠.”

뭔가 살짝 핀트가 어긋난 것 같지만, 이글렌이 좋게 생각해 줬다면야 나쁠 건 없다.

“흠…….”

이글렌은 반지들을 세심히 살피려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씩 집어 들곤 왼손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아.”

생각해 보니 이글렌 입장에선 반지를 봐도 구분이 안 갈 거다.

고대인의 유물은 일반 아티팩트와는 달리 착용한다고 왼손에 세부 사항이 뜨거나 하지 않으니까.

“이건 치유력을 극대화 시키는 거고…….”

난 녀석에게 반지의 효능을 하나씩 설명해 주려 했다.

“잠깐 조용히 해 봐요. 깜짝 선물인데 그런 걸 미리 알아서 좋을 건 없잖아요?”

“…넵.”

난 조용히 이글렌의 선택을 기다렸다.

“흠.”

한참을 고민하던 이글렌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반지 하날 골랐다.

“이걸로 할게요.”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후후. 그런가요?”

개중에 제일 예쁘장하게 생긴 반지였다.

이글렌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비하면 조금 초라한 감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저건 그저 큼지막한 보석만 박힌 거다.

이 고대인의 유물에 비하면 그저 평범한 돌멩이 박힌 반지에 지나지 않았다.

착용자의 체내 마나를 극대화시키고, 가벼운 쉴드까지 생성해 주는 반지니까.

‘불멸의 암석이 박힌 반지였지.’

소설에서도 중반에 나온 반지치고 극후반까지 요긴하게 쓰던 녀석이다.

“그럼…….”

이글렌은 반지를 꺼내 들어 자기 손가락에 끼우려 했다.

“잠시만요.”

“…네?”

난 이글렌에게서 반지를 다시 받아 들었다.

그리곤 그녀의 왼쪽 손을 붙잡았다.

“앗…….”

연애 소설에서 보니까 이런 건 준 사람이 직접 끼워 줘야 의미가 있댄다.

“읏…….”

이글렌의 손을 붙잡자 녀석의 뺨이 붉어졌다.

방금까진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꽤나 괜찮은 연애 소설 같았다.

이글렌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제대로 된 연애 소설이란 거겠지.

‘제목이… [왕자님의 유혹]이었지.’

나중에 일이 다 풀리고 나면 준남작 작위 하나 정도는 줄 거라 다짐했다.

연애 소설 속 남자 주인공에 비하면 상황이 좀 다르긴 했다.

거기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백마탄 왕자님이고, 여자 주인공은 시골 깡촌의 몰락귀족 영애님이었으니까.

살짝 상황이 역전된 것 같긴 했지만.

“…….”

난 조심스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이글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줬다.

후우웅.

그러자 이글렌의 주위로 훈훈한 열기 같은 게 느껴졌다.

불멸의 암석이 가진 효과 같았다.

“그…….”

난 연애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말했던 대사를 떠올렸다.

“저와… 평생을…….”

그다음에 뭐였더라.

긴장해서 그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였나? 아니면 평생을 바치겠다는 거였나?

“…그래요! 이안!”

마지막 대사를 읊기도 전에, 이글렌이 와락! 달려들었다.

이글렌은 그렇게 날 꼭 끌어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숨이 좀 막히긴 했지만, 이글렌의 품 안에선 기분 좋은 냄새가 난 덕에 버틸 만했다.

“…푸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글렌은 꼭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었다.

“…후훗!”

이글렌은 싱긋 웃으며 몸을 베베 꼬았다.

난 그런 그녈 보며 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글렌과의 첫 만남.

대전제 당시 몰래 빠져나와 모래밭을 거닐던 가냘픈 소녀.

원래 운명대로라면 미친 왕 갈렌과 귀족들의 정쟁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어야 할 여인.

그랬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아이소테르의 주인이 되어 마주하고 있었다.

운명은 틀어졌다.

이글렌도, 나도.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넵.”

방금까지 날 보고 실실 웃던 이글렌이 호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결혼할 사이긴 해도 프라이버시란 게 있으니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잘 다녀오십쇼.”

“…헤헤.”

민망한 듯 멋쩍게 웃던 이글렌은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후아!”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이글렌은 가까스로 참았던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흐흐.”

그리곤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봤다.

참으려 해도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흐!”

애써 고갤 털며 마음을 다잡았다.

왕성 테라리움에서 머나먼 임페라 백작령까지 호위 하나만 덜렁 데리고 온 건 나름 이유가 있어서다.

교황 주에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들어 보기도 해야 했고. 그에게서 공간 도약 기술에 대해 물어볼 것도 있어서였다.

뭐 따지고 보면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없진 않았지만.

“…헤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글렌은 들뜬 마음이라도 진정시킬 겸 산책하러 쪼르르 달려 나갔다.

* * *

이슬린은 입꼬릴 씰룩거리는 이안을 불렀다.

“백작님.”

“…응? 이슬린? 불렀어?”

“…에휴.”

이슬린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안 임페라 백작.

그녀가 섬기기로 한 남자.

묘한 남자다.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군데군데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세상에 결혼 반지를 줄 타이밍에 우정 반지 같은 걸 주는 남자가 어디 있나.

심지어 여왕님한테만 줄 게 아니라 다른 녀석들 것까지 주렁주렁 들고 오다니.

이글렌이 착해서 그렇지, 보통 여자라면 단단히 삐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아. 너도 하나 고르지 그래?”

“…네?”

“주인ㄱ…이 아니라 라크레시아 같은 놈이랑 싸우려면 뭐라도 하나 다 걸쳐야지. 안 그래?”

“…그렇죠.”

이슬린은 이안의 평소 같은 모습을 보자 입가에 작게 미소가 드리웠다.

“…그렇게 좋나? 맨날 무뚝뚝하던 녀석이 웃기까지 하고 말이야.”

“…네.”

이슬린은 짧게 대답하곤 반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안이 건넨 반지 중 제일 무난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다른 반지들과는 달리, 은색 빛깔을 은은하게 비추는 반지였다.

“오호. 그것도 나름 괜찮지. 착용자의 마나를 극대화시켜 주는…….”

이안은 신이 난 듯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이슬린은 그런 그를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름은 아마…….”

이안은 반지에 이름을 지어 주려는 듯 눈쌀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름은 됐습니다.”

“…응?”

“백작님이 주신 거면 충분합니다.”

“어… 뭐. 그래 그럼.”

이제 이 남자는 넘볼 수 없는 남자다.

다른 이도 아닌 아이소테르의 주인과 결혼할 남자니까.

더 이상은 미련만 될 뿐이었다.

“…….”

이글렌은 좋은 여자다.

잠깐이나마 마탑에 있을 당시, 왕녀란 신분에도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 줄 정도였으니까.

이안도 마찬가지다.

이슬린의 가문을 속인 것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 했던 도적 클랜 출신임에도 그녀를 받아 줬다.

둘 사이라면 미련은 없다.

“…차가 식었군요. 새로 차를 끓여 오겠습니다.”

“으음… 아무래도 여왕님이면 식은 것보단 뜨끈뜨끈한 게 입에 맞겠지?”

“…그렇죠.”

이슬린은 짧게 대답을 마무리하곤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 * *

“휴.”

다행히 별 문제 없이 끝났다.

이글렌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

이슬린에게도 반지 하날 줬으니 이제 남은 건 단 두 개.

이스바르트나 일레느한테도 줄까 생각도 해 봤다.

다른 녀석들처럼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아니지만, 둘 다 임페라 백작령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해 줬으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직접 싸우는 애들한테 주는 게 나을 듯 싶어 그렇게 정했다.

둘한테는 적당한 호위를 붙여 주는 게 나을 거다.

“…흠.”

사람 마음이란게 또 신기하다.

프리아나와 디아한테 막상 주기로 마음 먹으니 뭔가 좀 아깝달까.

프리아나는 이미 검술 랭크 7의 기사단장급 강함을 갖고 있고.

디아는…….

결국엔 주인공이니까.

“에잇. 주기로 했으면 줘야지. 또 뭔 소리냐.”

애초에 주인공 거기도 했고.

고갤 홰홰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의 디아는 나쁜 놈이 아니다.

나쁜 건 가짜 라크레시아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그놈이지.

굳이 최악의 적을 둘이나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내 마음을 다잡자, 이글렌이 다시 돌아왔다.

이슬린은 아직 차가 덜 끓었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흠흠.”

프로포즈를 하고 난 이후라 그런가 괜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안.”

방금까지완 다르게 이글렌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여왕님.”

아무리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 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나도 이글렌에게 맞춰 이름이 아닌 여왕이란 존칭을 사용했다.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죠.”

“…맞아요.”

이글렌은 오늘 제대로 된 공문이나 사절단도 없이 홀로 임페라 백작령에 당도했다.

호위는 다름 아닌 빈트하겐 칼로스.

그가 강한 건 맞지만 결국엔 기사단장 직위를 내려놓은 야인이다.

그런 그를 호위로 대동했다는 건, 그가 강한 이유 말고도 테라리움엔 비밀로 하고 싶어서였을 거다.

“우선 당신이 자이겔론드까지 금방 왔다 갔다 한거에 대해 묻고 싶은게 있어서예요.”

“으음.”

자이겔론드와 임페라 백작령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공간 도약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공간 도약. 맞죠?”

이글렌은 곧바로 정곡을 찔렀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아니라고 잡아뗐겠지만 이글렌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맞습니다.”

“후… 역시.”

이글렌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일단은 신성 왕국에서 곧바로 직행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긴 했지만… 아마 하나 둘 의심을 품기 시작할 거예요.”

“차라리 잘됐군요. 드워프들 상대로만 공간 도약용 마핵을 팔긴 좀 그랬는데. 이참에 여기저기 다 팔죠.”

“공간 도약용 마핵……?”

“그런 게 있습니다.”

난 이글렌에게 마핵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원리에 대해선 적당히 옛날 책에서 본 걸 재현해 본 거라 덧붙였다.

“호오… 그런 책이……?”

“…그런 게 있습니다.”

“흠. 저한테도 비밀로 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크흠.”

이글렌은 조금은 섭섭한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쩔 수 없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말하면 복잡해지니까.

“아마 가격은… 요 정도로 정할 예정입니다.”

“…음! 딱 좋네요.”

이스바르트가 나중에 정해 준 가격을 써서 보여 주자, 이글렌도 그쯤 생각했는지 고갤 끄덕였다.

“그럼… 하나 부탁이 있는데요.”

“네?”

이글렌이 부탁이라.

아마 지금부터 말하는 게 이글렌이 직접 임페라 백작령까지 온 이유일 거다.

난 숨을 죽인 채 이글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뭔가요? 부탁이란 게.”

“그게…….”

이글렌은 주윌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카잔 제국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그때 그 공간 도약 기술을 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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