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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80화 (180/222)

180화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황혼은 여전히 표정 변화를 하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어쩌긴.”

모든 일들의 배후에 주인공 녀석이 있었단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지금 내 주변 상황이 변하는 건 없었다.

주인공이 가짜 라크레시아란 탈을 쓰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녀석이 내 적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가장 큰 적이 원하는 게 뭔질 잘 모르겠다는 것 정도.

소설 속 진짜 라크레시아의 목표는 결국엔 카잔 제국의 부활이었다.

처음엔 아버질 버린 세상을 파괴한다니 뭐니 했지만, 결국엔 영겁의 기사단도 흡수하고 하더니 그렇게 됐다.

하지만 주인공 녀석이 진짜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토대로 한다면, 지구를 멸망시키고 날 이쪽 세상으로 불러들인 것도 주인공 녀석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살던 세상이란 게 실존은 했을까?

그저 주인공 녀석이 임페라 백작령의 망나니 공자 놈한테 환상을 보여 준 게 아닐까?

사실 이 가설도 확실치는 않다.

지구가 멸망한 건 그저 고대인들의 무수히 많은 보험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게 틀어지는 바람에 고대인들은 그대로 절멸하고 애꿎은 지구만 멸망한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 녀석을 막을 대항마로 오베론이 날 불러들인 걸 수도 있다.

‘엄청 많네.’

지금 당장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많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인공 녀석은 크나큰 적수다.

프리아나, 이슬린, 이글렌… 그리고 수많은 인연들이 이 세상에서 생겨났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가만히 앉아 신세한탄만 할 순 없었다.

“…….”

일단은 주인공 녀석이 이 모든 일의 배후라는 가설을 채택해 보자.

그럼 질문이 하나 나온다.

녀석이 원하는 게 뭐지?

“…아.”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한 여자다.’

라크레시아인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 녀석과의 첫 대면.

그때 녀석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젠장.”

머릿속이 골치 아파졌다.

진짜 녀석이 원하는 게 그것뿐이라면.

더 골치 아파질 테니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오베론이나 그 이상으로 강해진 주인공 녀석마저 할 수 없는 거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죽으면 사흘 만에 혼이 소멸해 버리니까.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이 세상 속 사후 세계에 의하면, 단 사흘 만에 새로운 육신을 찾아 다시 태어나 버린다.

그 순간부턴 죽기 이전 삶의 발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말 그대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셈.

“그걸 거스르겠다는 건데.”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그 방법’을 통한다면.

그래서 주인공 녀석이 지금껏 깽판을 치고 다니는 걸 테고.

“…푸흐.”

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라도 하는 것마냥 얼굴을 벅벅 문지르자, 눈두덩이가 욱씬거리면서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 행동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일종의 의식이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마음을 다잡게 해 주는.”

[흥. 아무런 의미 없다는 소리군.]

“후후. 그런가?”

황혼은 팔짱을 낀 채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나야 생각은 정리됐다만. 그쪽은 어쩔 생각이지?”

[그야…….]

“주인에게 되돌아갈 생각인가?”

[…….]

황혼은 한참을 아무런 말도 안 한 채 입을 다물었다.

고민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의 주인공 녀석은 황혼이 알고 지내던 녀석과 판이하게 달라져 버렸으니까.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는 미친 광인.

오베론과의 결투에서 황혼이 부러졌을 땐, 오히려 해방된 느낌이었을 거다.

그 누구보다도 주인공의 패악질을 가까이서 봐 왔으니, 거부감도 상당했겠지.

[…녀석은 날 버렸다.]

“…….”

황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혼을 버렸다라.

아마 맞을 거다.

지금 진짜 주인공의 힘이라면 부러진 황혼을 되살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부러진 황혼을 그대로 두고 자릴 떠나갔다.

녀석과 세상을 이어 주던 마지막 끈이 끊어지고 만 거다.

끈을 놓아 버린 건 다름 아닌 주인공 자신.

황혼도 이를 아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새로운 주인을 택해야겠지.]

“그렇다는 건…….”

파앗!

황혼의 몸이 밝게 빛나며 다시금 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타오를 듯 붉게 물든 도신.

인간 형태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붉은 머릿결마냥 매혹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날 가져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전언.

“…훗.”

에고 소드가 직접 자길 가지라고 했다.

이 세상 기사들이라면 뛸 듯이 기뻐하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난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쿡쿡 찔려 왔다.

“그래도 되겠나?”

[…….]

“된다는 걸로 받아들이지.”

난 바닥에 쓸쓸히 내던져진 황혼을 집어 들었다.

파아앗…….

훈훈한 기운이 가슴을 따스하게 안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뭔가 서글픈 기운이 느껴지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 할 것 좀 하러 가 볼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난, 집무실 바닥에 숨겨진 웨이 포인트로 향했다.

* * *

“이것도 챙기고… 이것도 챙겼고…….”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죽죽 줄을 그었다.

출발하기 전 정리해 놓은 품목들이었다.

내용은 당연히 주인공 녀석이 마주했던 기연들.

대체로 웨이 포인트 근처에 있어 쏙쏙 빼먹을 수 있는 녀석들만 정리해 뒀다.

자이겔론드 지하에 있는 고대인 녀석도 없겠다, 공간 도약을 하는 데 거리낄 건 없었다.

“읏챠.”

[그렇게까지 챙길 필요가 있나?]

“당연하지. 아무리 못해도 그놈과 비빌 정도로는 강해져야 하지 않겠어?”

[…흥. 욕심이 많군.]

“욕심?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냐. 이게 다 내 건 줄 알아? 이건 프리아나 거고… 이건 이슬린. 이건 이글렌… 아! 이건 그냥 팔 거야.”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만.]

“…흥.”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라.

그럼 아마 이런 의미였을 거다.

이깟 고대인들의 유물 따위론 주인공 녀석을 이길 수 없다.

하기사 소살 최후반부에선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도 이긴 녀석이다.

아마 지금쯤 그때보다 더 강해졌을 테니.

황혼이라고 그저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어쩌겠나.

뭐라도 해야지.

[이런 걸론…….]

“에잇. 자꾸 그러면 검집에 넣어 버린다?”

그 말에 황혼이 입을 앙다물었다.

소설에서도 황혼은 도신을 붉게 물들인 이후론 검집에 들어가는 걸 싫어했다.

갑갑하다나 뭐라나.

[…괜한 녀석을 골랐군.]

“후후. 네가 고른 주인이야.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구.”

[…그래야겠지.]

방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황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운 것만 같았다.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걸까.

주인공 녀석이랑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 한 걸 본 것도 같았다.

우우웅.

“엇.”

고대인의 유물을 한보따리 챙기고 있는데, 품 안에 통신용 마법구가 작게 울렸다.

[뭐지?]

“영지에서 온 연락이네. 긴급 알람이 안 뜨는 걸 보면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마법구에 마나를 살짝 흘려 넣자 이슬린의 얼굴이 나타났다.

[백작님. 지금 바로 영지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런 말을 하는 이슬린의 표정은 어딘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슬린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여왕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엥? 이글렌이?”

[네.]

보통 여왕쯤 되면 영지로 찾아오기 전에 이래저래 연락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론 따로 연락을 준 적은 없었는데.

‘그냥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건가?’

그럴 만했다.

지난번 연락 땐 폭탄 발언으로 당황했는지 통신을 그냥 끊어 버렸으니까.

“마침 잘됐네. 금방 갈 테니까 대신 말 좀 해 줘.”

[네. 백작님.]

그렇게 이슬린과 통화를 끊자 황혼이 입을 열었다.

[어딘가 신나 보이는군.]

“후후. 뭐 따지고 보면 일생일대의 빅 이벤트니까.”

[이벤…트……?]

난 녀석에게 자랑스레 챙겨 놓은 상자 하나를 열었다.

“어때. 이만하면 녀석도 좋아하겠지?”

[호오. 내 관점에서 봤을 땐 충분히 기뻐하지 않을까 싶군.]

“흐흐.”

녀석의 관점이란 말이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뭐 어떤가.

둘 다 여자인 건 같은데.

“자. 그럼…….”

지금 위치한 곳은 대륙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고대인의 보고 중 하나.

솔직히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공간 도약을 할 석판만 있으면 되니까.

찹.

난 근처에 위치한 웨이 포인트 위로 손을 올렸다.

황혼 녀석도 다시 붉은 검으로 변해 내 곁에 앉았다.

미세하게 마나를 불어넣자, 이내 주위가 환하게 빛났다.

* * *

“음.”

이제 몇 번 타 봐서 그런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없었다.

도착한 곳은 임페라 백작령의 집무실.

아무래도 저택 한복판에 웨이 포인트를 놓는 건 좀 위험하지 싶다.

공간 도약을 할 줄 아는 적이라면 아무것도 거릴 것 없이 저택 한복판에 튀어 나올 수 있는 거니까.

이슬린도 치우는 게 좋을 것 같다 말하긴 했다만.

이게 원체 편해야지.

“뭐 안 들키면 그만이지.”

게다가 사실상 최악의 적인 주인공 녀석이라면, 웨이 포인트가 없어도 이 저택쯤은 마음껏 드나들 수 있으니까.

“흠흠.”

목을 한 번 가다듬곤 집무실 문을 열었다.

때마침 차를 내어 오던 이슬린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안 치우셨나 보군요, 그 석판.”

“으응. 뭐… 금방 치울게.”

“…네. 그럼.”

이슬린은 차를 가득 채운 쟁반을 든 채 내게 눈짓했다.

이글렌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어우.”

[긴장되나?]

황혼이 약간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전언을 쐈다.

“…솔직히 안 되면 이상한 거지.”

난 주머니 안에 상자를 꼭 쥔 채 손님 접대용 회의실로 향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여왕님.”

이슬린이 문 앞에서 작게 말했다

“응! 어서 들어와!”

문 너머에서 이글렌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슬린 혼자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글렌과 눈이 마주쳤다.

“…허윽.”

날 본 이글렌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덩달아 나도 부끄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오셨습니까. 여왕님.”

“앗… 그, 그래요.”

이글렌도 솔직히 내심 기대하는 눈치긴 했지만, 막상 마주하려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내가 오히려 나서 줘야 했다.

‘…책에서 그랬지.’

주인공 녀석이 쓴 소설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세상 속 귀족집 영애님들이 좋아하는 연애 소설.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다르다 보니 연애관에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참고도 할 겸 연애소설도 몇 번 읽긴 했다.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다고 할까.

오묘한 느낌이 드는 연애 소설이었다.

“여왕… 아니, 이글렌.”

이럴 땐 존칭보단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다 그랬다.

“…네. 이안.”

이글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응을 보니 그리 나쁜 것 같진 않았다.

난 녀석에게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해 둔 반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헉…….”

적잖이 놀란 듯 침음을 삼키는 이글렌.

난 그녀에게 상자를 열어 보였다.

“…응?”

“…잉.”

뭔가 실수를 했나.

이글렌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이게… 뭐죠?”

“뭐긴요. 반지입니다.”

“아니 그렇긴 한데…….”

이글렌의 묘한 반응에 속으로 고갤 갸웃했다.

설마 이 세상에선 반지로 기념하는 의식 같은 게 없나?

‘아닐 텐데… 소설에선 많이 그러던데.’

“이안… 고, 고맙긴 한데. 이건 너무 많아요.”

“네?”

난 반지 상자를 다시 들여다봤다.

총 4개의 반지.

프리아나 이슬린 디아, 그리고 이글렌.

이렇게 넷에게 줄 반지였다.

뭘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4개 다 보여 줬다.

“아. 이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걸 하나 고르시면 됩니다.”

“…네?”

“다른 건 다른 녀석들한테 줄 거니까요. 모두 이 대륙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반지들입니다.”

“…하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는지 이글렌의 미간이 구겨졌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 완벽한 계획인 것 같았는데.

뭔지도 모를 이유에 의문을 품은 채 식은땀이 허릴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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