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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9화 (179/222)

179화

“…….”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홀로 높다란 구릉지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과연 그에게 더 이상 뭐가 남아 있을까.

그는 부러진 검 자루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너도 없구나.”

파앗.

텅 빈 눈빛의 남자를 위로 하려는 듯, 그의 주변에 일곱 기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녀석들도 그들의 주인처럼 텅 비어 있는건 마찬가지였다.

혼이랄 것도 없이 그저 공허히 주인만을 따라다니는 데스 나이트.

남자는 그런 데스 나이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개중에 단 하나.

남자처럼 하얀 머릿결을 가진 여인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봤다.

“…타르옌.”

“….”

남자의 부름에도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나 혼이 소멸해 버린 뒤였으니까.

그건 더 이상 남자가 사랑하던 이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모습을 한 시체일 뿐.

“…….”

남자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최후의 선택에 앞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그는 얼마 전 있었던 한 노인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

랭크 9의 싸움.

이는 자칫했다간 세상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충돌이었다.

때문에 오베론은 폐허 한가운데서 결계를 펼쳤다.

마치 별천지라도 된양 외부와 단절된 땅.

오베론이 현 시점 대륙에서 누구보다 강한 마법사인 건 맞았지만, 결계를 펼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순 없었다.

그런 그와는 반대로, 라크레시아는 거리낄 게 없었다.

애초에 그가 한 행위들 자체가 세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싸움의 승패는 정해져 있었고.

결국 정해진 운명대로 승자는 라크레시아였다.

“허억……! 허억……!”

오베론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랭크 9의 특성상 숨 쉬는 것만으로 마나가 금세 회복되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라크레시아가 이미 주변 대기의 마나를 모두 흩날려 버린 뒤.

체내의 마나까지 모두 쥐어 짜낸 오베론은, 이젠 그저 힘없는 노인네일 뿐이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허억……. 허억…….”

오베론은 대답 없이 그저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마치 최후를 기다리는 처형대의 죄수마냥, 그는 조용히 라크레시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대답해!”

“…후회는 하고 있다.”

“…뭐?”

오베론의 말에 라크레시아는 부러진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후회하고 있다고?

자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라크레시아가 내심 바라고 있던 대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어진 오베론의 말은 라크레시아의 얼굴을 사납게 구겨 버렸다.

“…차라리 그때 죽였더라면. 같잖은 동정심에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이익……!”

챙그랑!

라크레시아는 부러진 검자루를 내던졌다.

그리곤 오베론의 멱살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콰악!

“커헉……!”

“네놈이 그렇게 자랑하던 마법으로 끝내 주지……!”

콰드득!

오베론 스테이라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 조화.

오로지 그만이 쓸 수 있는.

랭크 8의 괴물이어도 한순간에 돌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최강의 마법.

오베론은 자신이 개발한 마법에 의해 다리 쪽부터 서서히 굳어 가기 시작했다.

“크흐흐…….”

라크레시아는 광기에 물든 눈빛으로 오베론과 눈을 마주쳤다.

공포와 절망에 빠져 죽어 가는 그의 눈빛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뭣……?”

하지만 왜인지, 오베론은 절망에 가득 찬 눈빛을 내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구원이라도 받은 것마냥, 평온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왜, 왜……!”

이미 허리를 지나 가슴팍까지 돌덩이로 굳어 가는 와중이었지만, 오베론의 반응은 여전했다.

어느덧 그의 마법이 턱 끝을 지날 때쯤.

오베론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너에게 이런 짐을 지게 해서.”

“그게 무슨……!”

콰드득!

라크레시아는 오베론에게 되물어봤지만, 이미 전신이 돌덩이가 돼 버린 그에겐 그저 공허한 외침뿐이었다.

“…….”

라크레시아는 석상이 되어 버린 오베론을 보고 나서야 잡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끝…난 건가?”

홀로 중얼거려 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끝났구나!”

과거 대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대마법사 오베론.

그는 더 이상 없었다.

그저 그의 모습을 빼닮은 석상만 남아 있을 뿐.

“…크하하하! 그래! 끝났어! 내가 이겼다고!”

라크레시아는 승리에 도취해 광기 어린 웃음을 내뱉었다.

“크하하…….”

풀썩!

그리곤 오베론의 석상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크흐흐…….”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라크레시아의 가슴속에 맴돌았다.

이제 끝이다.

지긋지긋하게 그를 방해하던 오베론도 더 이상 없다.

“흐… 흐흑…….”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몰락의 성채.

그 가운데서 한때 디아 제니스라 불렸던 영웅은 홀로 주저앉은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

“화, 황혼?”

“…젠장.”

난 신경질적으로 붙잡고 있던 디아의 멱살을 풀었다.

드디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녀석이었지만, 디아는 충격에 빠진 듯 여전히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

황혼은 타오를 듯 붉게 물든 머릿결을 찰랑이며 조용히 디아를 내려다봤다.

[이, 이게 나라고……?]

디아의 자그마한 황혼은 어른스런 황혼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둘 다 황혼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실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이 녀석이 진짜 황혼이라면, 지금껏 대륙에 깽판 치고 다니던 놈이 디아라는 거니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지?”

“그, 그게… 저도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카악! 퉤!”

신경질적으로 괜히 가래침을 한 번 뱉었다.

“X발.”

지금껏 날 괴롭히던 놈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니.

“…….”

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표정으로 디아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진짜 이게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아마 모르는 게 맞을 거다.

아까 녀석과 검을 맞부딪혔을 때.

일부러 녀석에게 틈을 내보였다.

하지만 녀석은 이를 보고도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소설로 봐 왔고, 날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면서도, 동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까지 떼어 주는 녀석.

‘지금’의 디아는 그 녀석이 아니다.

동시대에 존재하는 두 명의 디아.

불가능할 건 없다.

마탄이 날아다니는 세상에 시간을 되돌리는 게 불가능할 거라 못 박는 것도 우습다.

‘당장 나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왔는데.’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녀석이 그 지경이 된 걸까.

‘설마 마지막 화에서 무슨 일이라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기서 진짜 라크레시아가 무슨 수작을 부렸고, 그 바람에 디아를 제외하곤 모두 죽어 버린 거라면.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녀석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오베론이 만든 실험체.

주변 동료들과의 추억 덕에 간신히 살아 있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주변 동료를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린다면?

솔직히 지금 내가 그런 일을 당해도 미쳐 버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마신 아쉬타르에게 주변 동료들을 모두 잃었을 땐, 나도 반쯤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때야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냥 혼자 미친놈이었겠지만.

디아는 다르다.

절망에 빠진 자신과는 달리 세상은 멀쩡히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녀석은 광기에 물들고도 여기저기 깽판 칠 압도적인 힘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

난 여전히 바닥에 고갤 처박고 있는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백작님…….”

“…뭐, 이 X끼야.”

“흐흑…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녀석은 이젠 눈물까지 글썽인 채 바닥에 고갤 처박았다.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이 녀석은 아직 아무 잘못 없는 놈인데.

“…에잇. X팔.”

괜히 욕지거릴 내뱉으며 엉덩일 툭툭 털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라.”

착잡한 마음을 간직한 채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 백작님….”

“일어나라고! 빨리!”

“네, 네엣!”

디아는 소매로 대충 눈가를 훔치곤 내 손을 잡았다.

일어선 채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날 보는 디아.

“이걸 확.”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려 하자 녀석은 자라마냥 목을 잔뜩 움츠렸다.

“어윽…….”

“…어휴.”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곤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작님…….”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미치지 말아라.”

“그게 무슨…….”

“그럴 거지?”

“…….”

“빨리! 대답부터 해!”

“네, 네엣!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미치지 않겠습니다!”

“…그래.”

녀석은 잔뜩 쫄아 가지곤 얼른 대답했다.

“…푸흐흐.”

잔뜩 쫄아 있는 녀석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디아는 그런 날 이상하게만 쳐다볼 뿐이었다.

“프리아나.”

“네. 백작님.”

“이 녀석 좀 달래 줘라. 정신 나간 주인 놈 때문에 이래저래 많이 서러울 테니까.”

정신 나간 주인 놈.

날 칭하는 말이었다.

디아는 정곡이라도 찔린 듯 괜한 말 한마딜 했다.

“다, 당치도 않…….”

“시끄러!”

“허윽…….”

“…에휴.”

난 그렇게 프리아나와 디아를 연무장에 두곤 터덜터덜 내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내 뒤로 붉은 긴 생머리의 황혼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백작님! 일어나셨어요?”

“…그래.”

내 방을 정리하던 일레느가 반갑게 날 맞이했다.

가볍게 인사하자 녀석은 뒤 따라오는 황혼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여성 분은…?”

겉보기엔 평범한 여인의 모습이었던 터라 일레느는 황혼이 검일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손님이다. 친구의 친구 같은 거지.”

[…….]

“아! 그렇군요! 그럼 차라도 내어드릴까요?”

“…됐다. 차는 아마 못 마실 테니까.”

“…그런가요?”

일레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젓자 녀석은 알았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자릴 비워 줬다.

철컥.

방에 들어가 걸쇠까지 걸어 놓은 난 침대에 반쯤 몸을 뉘운 채 눈을 감았다.

[…당신이 ‘그 남자’로군.]

그제야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연 황혼.

까랑까랑한 지금의 황혼과는 달리 성숙하고 요염함이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녀석은 나와 일면식이 없을 텐데도, 마치 날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뭐 그렇겠지.”

[보아하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아는 듯한데.]

“…그것도 그렇겠지.”

[내 주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알고 있으니 입 다물어.”

[흠. 그게 편하다면야.]

“…….”

난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이 많을 때마다 으레 하는 버릇 같은 거였다.

가짜 라크레시아.

내가 본 소설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는 황혼의 물음.

이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금껏 이 대륙에 깽판을 치고 다닌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황혼이 한 말엔 크나큰 진실이 하나 더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구만.”

무언가 군데군데 빠져 있는 것만 같았던 주변 상황.

어째서 멀쩡하던 지구에 나타난 아쉬타르가 고대인의 생체 병기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 세상 속 이야기가 그대로 적혀 있던 소설은 대체 누가 쓴 거였는지.

그 모든 일들의 시작엔 단 한 남자가 있었다.

디아 제니스.

훗날 연합의 영웅이라 불리게 될 기사.

불가능할 건 없었다.

이미 신에 필적하는 존재인 오베론마저 이기는 강함.

디아도 소설 줄거리대로라면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다.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란 건 확실했다.

모든 일들을 깨달은 난, 착잡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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