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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8화 (178/222)

178화

“아…….”

녀석을 마주한 난,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밖에서 나돌아 다니는 건 진짜 라크레시아가 아니다.

녀석의 모습을 한 가짜일 뿐.

뭔가 이상하긴 했다.

카잔 황제는 자신의 아들의 봉인이 풀릴 시간을 정해 놨다.

그래야 오베론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나’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긴 했어도, 라크레시아의 봉인을 앞당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절대 상종해선 안 될 최악의 적.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의 손이었다.

그런 녀석의 손이 왜인지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지금 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젠장.”

“놀라는 것도 무린 아니지. 나도 주군의 아드님이 둘이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

카잔이 숨겨 둔 아들이 있었단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분명 이곳 유적지에 봉인되어 있어야 할 놈이 밖에 나돌아 다니고 있단 걸 말하는 거다.

“그럼… 밖에 나돌아 다니는 ‘그건’ 뭐지?”

“나도 모르지. 그러니 더더욱 따를 수 없는 거고.”

“…….”

이 말이 그 말이었나.

‘가장 중요한 걸 모른다’고 하던 카이세리우스의 말이.

“…이 녀석은 살아 있는 건가?”

내 물음에 카이세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슬슬 진짜 라크레시아의 봉인이 풀릴 시점이긴 했으니까.

게다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일제히 불이 꺼져 있는 수조 주변의 장치까지.

“저건 이미 죽은 상태더군. 혼이 사멸한 육체 같은 거니까.”

“혼이 사멸한 육체라.”

아무리 고대인의 기술이라 해도 혼이 사멸한 육체는 되살릴 수 없다.

사흘이면 이승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이 소설 속 설정이니까.

아마 되살린다 해도, 그건 원래의 사람이 아닐 거다.

그저 움직이는 고깃덩이일 뿐이지.

난 수조 안의 라크레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팔뚝에 자그마한 구멍 같은 게 나 있었다.

셀리버트에서 크로드가 가져온 라크레시아의 혈액.

‘저기서 뽑아 온 거였나.’

“…고생 좀 했겠구만.”

난 피식 웃으며 크로드를 흘긋 쳐다봤다.

“…흥.”

녀석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콧방귀만 꼈다.

“하아.”

수조를 들여다보던 난 이내 마음을 정리하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모르겠군.”

어떻게 해야 할까.

가짜 라크레시아를 상대할 방법은 대체 뭘까.

소설엔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 먼치킨 빌런이라.

상대할 방법이 있을까 싶다.

그나마 오베론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녀석도 지금은 돌덩이가 돼 버린 지 오래다.

“…….”

일단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여기 있는 영겁의 기사단 녀석들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는 거.

적의 적은 동료란 말도 있지 않나.

녀석들 입장에선 지금 밖에 나돌아 다니는 라크레시아는, 진짜 라크레시아를 죽인 원수나 다름없었다.

어찌 됐건 카잔 제국을 부흥시키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하나뿐인 후계자를 죽인 거니까.

“그러는 너희들은 이제 어쩔 생각이지?”

난 카이세리우스에게 물었다.

라크레시아의 죽음은 곧 카잔 제국의 끝.

유일한 후계자가 죽어 버린 마당에 이들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해졌다.

“후후. 나도 같은 대답을 들려줘야겠군.”

카이세리우스는 본인도 아직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난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시적으로나마 동맹을 제안하겠단 의미였다.

“…좋아.”

카이세리우스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 이후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르겠다만, 일단은 저 가짜 라크레시아를 해결해야 했다.

“그럼. 오늘 일은 여기까지인가?”

“…그래. 연락은 크로드를 통해서 할 테니 알아 두라고.”

“후후.”

카이세리우스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가는 건가.”

“왜. 앉아서 수다라도 떨었음 하나?”

“…여전히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크로드는 뭔가 아쉬운 듯 괜한 말을 덧붙였다.

난 한번 피식 웃곤 웨이 포인트로 다가갔다.

‘이안 임페라.’

‘응?’

별안간 크로드 녀석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껜 따로 말씀 안 드렸다만. 그 애송이 녀석의 정체는 대체 뭐지?’

애송이 녀석.

디아를 말하는 듯했다.

진짜 라크레시아를 본떠 만든 오베론의 실험체.

덕분에 디아의 피로도 카이세리우스의 봉인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크로드는 이 사실을 다른 영겁의 기사단 일행들에겐 말하지 않은 듯했다.

여유분으로 가지고 있던 진짜 라크레시아의 피로 봉인을 푼 걸로 대충 얼버무린 건가?

그 점은 나름 고맙긴 했지만…….

‘…나도 모른다.’

그걸로 녀석의 물음에 대답했다.

짧게 대답하자 크로드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난 그 대답을 끝으로 석판 위에 손을 얹었다.

찹.

이내 석판이 밝게 빛나며 사위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카이세리우스와 임시 동맹.

이는 내 입장에선 그닥 나쁜 일은 아니었다.

뭐가 됐건 검술 랭크 8과 동맹을 맺었다는 거니까.

탈리스까지 포함하면 랭크 8 둘과 동맹을 맺은 거다.

아마 전력만 놓고 보면 이 동맹이 연합보다 세지 않을까.

임페라 백작령으로 돌아온 난,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거니와 생각을 정리하려면 혼자 있을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거울을 보니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하암.”

졸리긴 한데 잠은 안 오는 최악의 기분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할 건 해야지.”

달칵.

집무실 탁자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주위에 다시금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카앙……. 카앙…….

밖에선 여느 때처럼 검술 수련에 매진 중인 프리아나의 검 소리가 들려왔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디아와 대련 중인 듯했다.

“…….”

난 착잡한 마음을 간직한 채 연무장으로 향했다.

카앙! 캉!

아니나 다를까 프리아나와 디아는 한창 검술 수련 중이었다.

“허억……! 허억……!”

프리아나의 검술이 버거운 듯 가쁜 숨을 내쉬는 디아.

그렇게 수련에 매진 중이던 둘은 날 보자마자 검을 멈췄다.

“백작님! 일어나셨어요?”

날 보곤 반갑게 인사하는 디아.

그와는 대조되게 프리아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백작님.”

“…그래.”

내 눈빛을 읽은 프리아나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몸은 좀 괜찮은가?”

“네! 그리고 말씀하셨던 일들은…….”

“그건 좀 나중에 듣지.”

“아… 넵.”

차갑게 대하는 내 말투에 디아는 조금은 풀이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가슴 한켠이 더욱 찔려 왔다.

“디아.”

“네! 백작님!”

“검을 들어라.”

“네?”

“오랜만에 솜씨 좀 보지.”

“아… 네!”

디아는 땀을 훔쳐 내곤 다시 자셀 잡았다.

평범해 보이는 철검.

아직도 황혼은 제 본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평범한 철검인 척하고 있었다.

용린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허리춤이 허전했다.

녀석은 이미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 나 버렸으니까.

대신 자이겔론드에서 수리를 끝마친 에고 소드를 뽑아 들었다.

타오를 듯 붉게 물든 도신.

마나를 불어넣자 금세 화려한 기세의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간다.”

“네…엣?”

짧은 말 한마딜 시작으로 디아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대련에선 적당히 손속을 두는 게 예의다.

하지만 지금의 난 달랐다.

마치 진심으로 녀석을 죽일 작정인 것마냥 검엔 살기가 가득했다.

…콰앙!

“으앗!”

살기가 가득한 오러 소드가 격돌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디아의 균형이 흐트러졌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고작 이건가?”

“으읏……!”

녀석도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곤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쪽도 이미 검술 랭크 6의 경지.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기사 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다.

그런 녀석이 내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콰앙! 콰아앙!

“으윽……!”

계속된 매서운 공격에 디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순히 대련을 위한 공격이 아닌, 급소를 베어 버리겠다는 집요한 검격들뿐이었다.

“…….”

난 그러는 와중에 일순간 검을 멈췄다.

일부러 보여 주는 듯한 작은 틈.

디아도 이를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검이 내 뺨을 훑고 지나려는 순간, 디아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배, 백작님! 대체 왜 그러시는…….”

“장난치지 마라!”

카앙!

난 녀석에게 대답 대신 매서운 검격을 먹였다.

“으악!”

그 바람에 손이 저릿해진 녀석은, 들고 있던 에고 소드 황혼을 놓치고 말았다.

…파각!

디아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황혼은 그대로 저만치 떨어져 나가 땅에 처박혔다.

“백작ㄴ…….”

콰악!

눈물까지 글썽이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사정없이 땅 바닥에 내다 꽂았다.

콰앙!

“으윽!”

그대로 고갤 연무장 바닥에 처박은 디아.

녀석은 옴짝달싹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디아는 옆에 있는 프리아나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

하지만 이미 얘기를 끝내 놓은 터라 프리아나는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대,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대답을 애원하는 녀석을 향해 오러 소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녀석이 움직였다.

파아앗!

디아의 검이 환한 붉은빛을 내뿜었다.

[인간! 지금 뭐하는거야!]

에고 소드 황혼.

저만치 나가떨어져 있던 황혼이 제 모습으로 변신했다.

양 갈래로 묶은 붉은 머릿결의 꼬마 아이.

녀석은 내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이 아이가 네 명령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이나 알고 이러는 거야!?]

“…….”

[이 나쁜 인간! 당장 풀어 줘!]

당장이라도 목을 벨 기세인 날 향해 디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백작님…….”

“…X팔! 차라리 저항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 그게 무슨……?”

여전히 디아를 땅 바닥에 처박은 채로 욕지거릴 내뱉었다.

차라리 저항이라도 해라.

날 욕하고, 숨겨 왔던 속내를 드러내라.

그러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디아는 아니었다.

멍청한 건 아니지만, 한 번 동료라 여긴 이를 위해선 뭐든 할 남자.

멸망한 세상 속에서도 유일한 여흥거리였던 소설의 주인공.

내가 그토록 봐 왔던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예?”

일어나라면서도 여전히 제 멱살을 붙잡고 있는 날 향해 디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고 소드 황혼! 일어나라고!”

[뭣……?]

내 팔을 부여잡고 있던 황혼이 고갤 갸웃했다.

하지만 내가 부르는 황혼은 ‘저 녀석’이 아니다.

‘이 녀석’이지.

디아를 향해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했던 검.

타오를 듯이 붉은 도신을 가진 에고 소드.

몰락의 성채에서 녀석을 봤을 땐, 아니길 빌었다.

녀석이 황혼이 아니라 그저 닮은 에고 소드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내가 세운 가설이 맞다면, 모든 게 설명됐다.

왜 라크레시아가 예정보다 먼저 봉인에서 깨어난 거고.

실은 봉인을 깬 게 아니라 가짜 라크레시아가 진짜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닌 것부터.

절대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에고 소드가 두 자루나 존재했던 것까지.

파아앗……!

내 손에 붙들려 있던 붉은 도신의 검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곤 디아의 황혼이 그랬던 것처럼.

황혼은 몽글몽글 한 빛의 형태를 따라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디아의 황혼처럼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타오를 듯 붉게 빛나는 긴 생머리의 어른 여성.

이는 소설 속 최종장에 등장하는 황혼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리고 이런 도도한 녀석을 다룰 수 있는 건, 소설 속 모든 인물을 통틀어도 단 하나.

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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