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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7화 (177/222)

177화

[…엣.]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붉어졌을 거다.

귀가 떨어질 것같이 화끈거렸으니까.

이는 이글렌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이 내뱉은 프로포즈에 이글렌은 전기 마법이라도 맞은 것마냥 얼어붙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두 뺨과 귀에 홍조가 선명했다.

…파앗!

“…잉?”

갑자기 통신용 마법구가 꺼졌다.

대체 왜?

설마 이글렌한테 무슨 일이라도?

“…여왕님도 쑥스러우신가 보군요.”

“뭐?”

“마법구가 점등 없이 바로 꺼졌잖습니까. 정상적으로 통신이 종료되면 이렇습니다만.”

“정상적으로 종료된 거라면…….”

“여왕님이 직접 끄셨단 거죠.”

“…….”

난 또 뭐라고.

이글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줄 알았다.

하긴.

나도 지금 부끄러워서 정신 나갈 것 같은데, 이글렌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럼. 마법구는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여왕님께서 진정되시면 다시 연락해 주실 테니까요.”

“어어, 그래.”

난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슬린에게 마법구를 건넸다.

남 앞에서 프로포즈를 한다는 게 이렇게 쑥스럽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두 분은… 행복하셔야 합니다.”

“…응? 뭐라고?”

“…아닙니다.”

이슬린은 한 번 피식 웃곤 연무장을 떠났다.

“나 참.”

멀어져 가는 이슬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다시 검을 휘두르던 프리아나가 다가와 물었다.

“뭐… 무슨 일 있긴 했지.”

“호오… 대체 어떤……?”

“결혼하기로 했다. 이글렌이랑.”

“오오……! 드디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날짜는 언제로 하실 생각이시구요? 또…….”

“하나씩만 물어봐라 좀.”

“하하하! 이거 제가 오히려 더 흥분되는군요! 드디어 두 분이 결혼을 하신다니!”

“크흠.”

난 민망함에 괜히 머릴 긁적였다.

이래저래 준비할 게 많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저런 일로 골머릴 썩고 있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의 안식처가 하나 생긴 것만 같았다.

“…결혼이라.”

이진수의 삶을 살았을 때도 결혼은 해 본 적 없었다.

결혼은 무슨,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삶이었으니까.

이따금 주위에 마음이 맞아 맺어지는 동료들을 보긴 했지만, 대부분 끝이 좋지 못했다.

‘뭐 결국엔 다 죽었으니 전부 안 좋았다 해야 하나?’

때문에 나도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만큼 슬픈 건 없으니까.

“…….”

심장이 멎는 듯한 절망감.

이는 아무리 선한 이라도 한순간에 악인으로 만들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다.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주변에 그렇게 골로 가 버린 녀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각성자 랭크 탑티어였던 놈들이 절망감에 빠져 광인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까.

당장 나도 그럴 거다.

이글렌이나 이슬린, 프리아나 같은 녀석들이 모두 죽어 버린다면?

갑자기 라크레시아가 나타나 모두를 죽여 버리고 사라진다면?

아마 나도 제정신을 유지하긴 힘들 거다.

‘그러니 그런 일 없도록 강해져야 하는 거고.’

콰악.

난 바닥에 앉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주인공 녀석에게 기연을 몰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니야.”

마음을 정했다.

일단 나부터 강해지고 그다음 주변인부터 챙기기로.

“프리아나.”

“네! 백작님!”

“오늘 오후엔 잠깐 나가 봐야 할 것 같다.”

“아… 혼자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리고 내일 아침에…….”

난 프리아나에게 내일 아침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굳이 왜 그런……?”

“…확인해 볼 게 있어서다.”

“음… 알겠습니다, 백작님.”

다소 어이없는 명령일 수 있었겠지만, 프리아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갤 끄덕였다.

“후후. 그래, 고맙다.”

난 녀석을 향해 푸근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래저래 할 게 많았다.

내가 생각한 가설이 진짠지 확인하려면.

* * *

일단 프리아나한테는 뭘 할지 말만 해 놨다.

그리곤 잠시 조용히 있을 곳이 필요해 집무실로 올라왔다.

탁.

홀로 집무실에 앉은 난, 소음 차단용 결계를 펼쳤다.

바아앙.

이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곤, 품 안에 있던 마법구 하날 꺼내 들었다.

자이겔론드에서 뿌린 전용 통신 라인마냥, 이것도 정해진 통신 루트 하나와만 연결이 가능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치지직.

“…크로드. 들리나.”

대전제 이후 난 녀석에게 조금 더 고성능의 통신용 마법구를 줬었다.

그 뒤로도 간간히 연락을 시도하긴 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 대부분 장난스럽게 한 거긴 했지만.’

물론 제대로 연락이 된 적은 없었다.

덕분에 셀리버트에서 녀석과 마주쳤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녀석과 나 사이엔 어쩔 수 없는 벽이란 게 존재했다고.

그 뒤론 나도 녀석과 연락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렇다. 듣고 있으면 대답 좀 해 주지?”

[…….]

녀석과 연결된 마법구는 조용했다.

조금 진지하게 나오면 녀석도 뭔 일인가 싶어 대답 할 줄 알았는데.

녀석 성격 상 마법구를 버리거나 하진 않았을 거다.

지금껏 간간히 연락했을 때도 듣긴 들었을 거다.

그냥 무시한 거겠지.

하지만 이미 한 번 셀리버트에서 대판 싸웠던 터라 지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 이후로 버렸을지도…….

[…무슨 일이지.]

“어엇……!”

마법구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하면서도 묵직한 음색.

녀석이 셀리버트에서 한 짓을 생각해 보면 화도 좀 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잘 지냈나?”

[…흥. 진지하게 할 말이란 게 고작 그건가?]

“뭐… 그건 아니지.”

[…잘 지내고 있긴 하지. 네 녀석 덕분에 말이야.]

묘하게 들뜬 듯한 음성.

내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라.

나름 비꼬는 거다.

나 때문에 기사왕 카이세리우스가 봉인에서 깨어났으니까.

아마 지금은 상당히 기분 좋은 축에 속할 거다.

[그래서. 용건은?]

녀석답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이 들어왔다.

“…상의할 게 생겼다.”

[호오.]

이제 곧 아이소테르의 부군이 될 녀석이 영겁의 기사단과 상의라.

연합이 발칵 뒤집힐 발언이긴 했지만 괜찮다.

안 들키면 안 한 거라고, 지금 이 통신이 도청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잠시 만났으면 하는데.”

[…장소는?]

“라크레시아가 봉인되어 있던 고대인의 유적.”

[…네 녀석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

[…이젠 놀랍지도 않군.]

잠시 크로드는 말이 없었다.

[…그래. 시간은…….]

“지금 당장.”

[후후.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그럼. 잠시 후에 보지.]

파앗.

그 말을 끝으로 크로드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하아.”

텅 빈 마법구를 앞에 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해야지. 일.”

그리곤 집무실 한복판에 위치한 카펫을 들춰 냈다.

그러자 바닥 한쪽에 손가락을 집어넣자, 밑에 자리하고 있던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엔, 엔델로 광산에서 가져온 석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간 도약을 가능케 하는 웨이 포인트였다.

찹.

난 석판 위에 손을 얹은 채 정신을 집중시켰다.

공간 도약이 편한 게 이거다.

따로 양 방향에 공간 전이용 마법진을 설치할 필요도 없고.

직접 가서 위치를 잡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해당되는 위치에 대한 정보만 대략적으로 알면 된다.

나머진 웨이 포인트가 알아서 해당되는 지점을 찾아 준다.

“…….”

난 머릿속으로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카잔 라크레시아가 봉인되어 있던 고대인의 유적.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나도 모른다.

소설에 거기까진 안 써 있었으니까.

하지만 웨이 포인트라면 따로 알 필요도 없다.

[…축축하면서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밀실. 그 가운데서 낯선 기계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정된 시간축에 도달했습니다.

-봉인이 해제됩니다.

-충격에 주의하세요.

단 세 번 울린 음성이었지만, 그 여파는 간단치 않았다. 대륙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대재앙, 카잔 황제.

그의 아들이 오랜 시간 감고 있던 눈을 뜬 순간이었다.

…….]

라크레시아가 봉인에서 풀려나는 시점.

아마 지금쯤 원작대로라면 녀석이 봉인에서 깨어날 때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녀석의 봉인은 소설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풀려났다.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선, 반드시 녀석의 봉인이 있던 장소를 확인해야 했다.

[해당 위치를 검색 중입니다.]

[대상으로 확인되는 지점은 총 ‘1’곳입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

[확인되었습니다. 충돌에 주의하세요.]

…파앗!

이내 석판 위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여긴가.”

소설에서 본 것처럼 축축하면서도 음울한 기운이 가득한 밀실이다.

발밑엔 집무실에 있는 석판과 똑 닮은 녀석이 하나 있었다.

앞으로 고대인의 유물들을 독차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기네들을 위해 이곳저곳 중요한 지점이라면 웨이 포인트를 하나씩 갖다 놨으니까.

“…일단 그건 그거고.”

찾으러 온 물건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달칵.

그러자 동작을 감지한 건지, 천장에 붙어 있던 조명이 빛을 밝혔다.

“음…….”

밝은 빛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이내 빛이 눈에 적응되자 주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인의 유적지라 하기엔 다소 초라한 풍경이었다.

유적 한가운데 위치한 수조 말곤 별다를 게 없었으니까.

한 가지 특이한 건,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평범한 갈색빛 탁자.

그 위엔 이미 수명을 다 한 마핵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래된 것 같긴 했지만 고대인이 쓰던 물건 같지는 않았다.

십수 년 정도 된 듯한 마핵등.

아마 카잔 황제가 쓰던 물건이리라.

“…….”

난 조심스레 유적 한가운데 놓인 수조를 향해 걸어갔다.

파아앗!

그러던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보자, 웨이 포인트 파편 위에 사람 셋이 서 있었다.

맨들맨들한 대머리의 마법사, 검은 흑발의 기사.

그리고 하얗게 센 백발의 남자였다.

솔루스와 크로드, 그리고 기사왕 카이세리우스였다.

“…….”

녀석들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만나기로 한 건 크로드 하나였지만, 둘이 따라올 건 어느 정도는 예상하긴 했다.

그래도 진짜 녀석을 마주하려니 오금이 저려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루스도 비슷한 반응이긴 했지만, 기사왕 녀석은 조금 달랐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띤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안 임페라.”

“…카이세리우스.”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그쪽한테 딱히 적의는 없으니. 지난번에 말했듯이 오히려 감사할 정도야.”

“…….”

크로드는 그런 우리 둘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곧 연합의 수장이 될 자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온 거지?”

“…확인해 볼 게 있어서다.”

“후후. 그런가?”

카이세리우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딱히 적의랄 게 느껴지지 않는 건 분명했다.

“…여기가 그곳이 맞나.”

“그래. 주군의 아드님이 묵혀 있던 장소지.”

“그렇군.”

카이세리우스와 라크레시아는 조금 애매한 관계다.

그가 섬기던 건 카잔 황제지 라크레시아가 아니니까.

라크레시아도 카이세리우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건 황제를 보필하는 데 실패해, 죽게 만든 놈들이니까.

때문에 소설에서도 둘 사이에 묘한 알력 같은 게 있긴 했다.

그런 사이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건지, 카이세리우스는 여전히 라크레시아를 향해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한 번 확인해 보지 그래? 너도 생각하는 게 있어서 온 걸 텐데.”

“…….”

카이세리우스는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 유적 가운데 위치한 수조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난 그런 그의 말에 화답하듯 천천히 수조를 향해 다가갔다.

“…….”

제발 아니길.

내가 생각하는 가설의 첫 번째 단추가 틀어져 있길.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수조 안을 들여다봤다.

“…이런.”

수조 안을 들여다 본 난,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라크레시아는 분명 봉인에서 깨어났다.

지금껏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깽판 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하지만 수조 안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녀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봤던 라크레시아와 똑 닮은 남자.

‘진짜’ 라크레시아는 수조 안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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