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후아.”
싸움이 끝나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스읍.”
다시 숨을 들이켜 봤지만, 대기 중 마나의 농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고대인이 숨이 끊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스읍. 스읍.”
한 줌의 마나라도 더 빨아 들이려 숨을 바쁘게 쉬었다.
“백작님!”
“아. 프리아나. 상태는 좀 괜찮나?”
“백작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숨을 그렇게 가쁘게 쉬시다니…….”
“…괜찮지 뭐.”
난 두 동강 난 고대인의 사체를 내려다봤다.
마신 아쉬타르와 똑 닮은 생김새.
하지만 그 힘은 내가 아는 녀석에 비해 한참이나 못 미쳤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라 해야 하나.
쓰는 스킬의 종류만 비슷할 뿐, 힘이나 스킬 위력적인 측면에선 훨씬 약했다.
“…….”
하지만.
녀석이 아쉬타르와 같은 놈이란 건 분명한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생각을 해 봐야했다.
게다가 녀석을 베는 데 큰 역할을 한 에고 소드까지.
아직 인간형으로 실체화하진 않았지만, 검 상태를 보니 제정신을 차린 것 같긴 했다.
이 녀석도 나중에 따로 확인해 봐야…….
“아버지!”
“…아.”
레오윈 론 말라크.
알루윈의 아들이자 자이겔론드에 하나뿐이 없는 왕자.
녀석은 차갑게 식은 알루윈의 몸뚱일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탐욕스런 놈이긴 해도 알루윈에겐 하나뿐인 아버지다.
자신의 아비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레오윈…….”
하룬은 그런 조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인의 왕관을 써 거대하게 자라난 손으로 흐느끼는 조카의 등을 토닥여 줬다.
“흐흑… 삼촌…….”
하룬은 말 없이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벗었다.
그리곤 흐느끼고 있는 조카에게 아비의 유품을 건넸다.
“이건……?”
“…왕이 죽었으니 왕자가 그 자릴 채우는 게 맞지 않겠느냐.”
“하, 하지만…….”
“조금은 매정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왕이란 자린 한시라도 비워서 좋을 게 없…….”
“그게 아닙니다! 제 아버진 삼촌의 왕위를…….”
하룬은 레오윈이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아하니 하룬은 공석이 된 왕위를 꿰찰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로선 다행이었다.
그럼 알루윈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건 레오윈일 테고.
대외적으로 하룬은 왕위를 선양 받기 싫어 도망간 걸로 알려져 있다.
뭐 아는 놈들은 알긴 하겠다만.
차기 국왕이란 녀석이 제 살 깎아 먹는 말을 해서 좋을 건 없었다.
하룬은 푸근한 미소를 조카에게 지어 보였다.
“후후. 그런 소리였던 게냐?”
“삼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거라. 이미 내겐 더 좋은 집이 있으니.”
하룬은 슬쩍 곁눈질로 날 쳐다봤다.
“흐흠.”
난 멋쩍은 맘에 괜히 녀석의 눈을 피했다.
“…….”
레오윈은 고갤 푹 숙였다.
그리곤 소매로 대충 눈가를 훑었다.
이제 그는 철부지 왕자가 아니다.
자이겔론드란 거대한 왕국을 짊어져야 할 하나의 왕.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하룬이 건넨 왕관을 받아 들었다.
파아앗……!
이내 거대한 덩치로 자라난 그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와, 왕자 전하…….”
그런 그를 향해 상처 입은 드워프들이 하나 둘 다가갔다.
레오윈은 다시금 결연한 의지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부상자를 구호하는 게 먼저입니다! 어서 왕성의 병사들을 소집하십시오!”
“네,네! 왕ㅈ…… 국왕 전하!”
레오윈의 말에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드워프들이 부상자들을 부축했다.
소설에서도 나름 멀쩡한 녀석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제법 왕의 태가 났다.
“아버지…….”
레오윈은 작아진 알루윈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편히 쉬시길…….”
*
고대인은 죽었다.
알루윈도 죽었다.
이제 남은건 살아남은 자들의 몫.
일단은 급한 대로 레오윈이 차기 자이겔론드의 왕위에 올랐다.
소설과 비슷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원작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훨씬 나았다.
자이겔론드 전역을 반파 수준까지 깽판 칠 뻔한 녀석이, 고작 알루윈과 드워프 몇만 죽이는 걸로 끝났으니까.
게다가 레오윈과 끈끈한 인연까지 맺었으니.
다른 이도 아니고 자이겔론드의 국왕에게 빚을 지운건 큰 이득이었다.
“그럼.”
우린 석판 위에 선 채로 레오윈을 바라봤다.
녀석은 거인의 왕관을 쓴 채 고갤 끄덕였다.
“나중에 또 보자구.”
“예. 삼촌.”
나머지 뒷마무리는 레오윈이 알아서 잘 해 줄 거다.
소설에서 이보다 더 한 난장판도 잘 치운 녀석이니까.
“아. 그리고 임페라 백작님.”
“…뭐지?”
이제 막 웨이 포인트에 마나를 불어넣으려는데 레오윈이 우릴 붙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간 도약용 마핵을 너무 싸게 부르신 것 같습니다. 입은 은혜도 있고 하니 나중에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해 주시는게…….”
“오호.”
이미 내뱉은 말이라 어쩔 수 없지 싶었는데, 고맙게도 녀석이 먼저 말을 꺼내 줬다.
나름 은인에게 값을 치러 주고 싶은 거겠지.
“그래.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해 주지…요.”
“후후.”
예전엔 왕자였다지만 지금은 왕이다.
백작급이 반말하는 건 아무리 녀석이라도 입장상 난처하겠지.
“그럼. 이번엔 진짜 갑니다.”
“고마웠습니다. 이안. 삼촌과 다시 만나게 해 줘서.”
“크하핫! 뭘 그렇게까지 말하는 게냐! 내 가끔씩 들를 테니 그땐 기대하고 있으라구! 아마 배가 터지도록 술을 마셔야 할 테니까!”
“흐흐. 네! 삼촌!”
파아앗!
레오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곤 임페라 백작령을 떠올리자, 눈부신 광채와 함께 주변이 밝아졌다.
“우읍…….”
올때와 똑같이 끔찍한 승차감이 뒤를 이었다.
몇 번 겪어서 그런 건지 비교적 버틸 만했다.
…파앗!
이를 악물고 버티자 금세 도착지에 도달했다.
거무튀튀한 돌들이 가득한 어두컴컴한 동굴.
엔델로 광산이었다.
“…제대로 왔군요.”
“그러게.”
*
임페라 백작령으로 되돌아온 우린, 서둘러 각자가 할 일을 시작했다.
나와 이슬린은 백작령에 한가득 쌓인 일감을 처리했고.
프리아나와 하룬은 평소처럼 수련과 아티팩트 제작에 돌입했다.
저마다 느낀 게 있을 거다.
프리아나는 사람이 아닌 괴생명체의 변칙적인 공격에 꽤나 느낀 게 많을 테고.
하룬은 왕의 대장간을 사용하며 잊혀진 옛 감각을 되찾았을 테니까.
서둘러 일부터 시작한 건, 이제 곧 새로운 일감들이 넘칠 걸 대비하는 것이었다.
알루윈의 죽음으로 자이겔론드는 발칵 뒤집혔다.
자이겔론드가 어디 깡촌의 자그마한 영지도 아니고,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연합의 어떤 왕국에게도 뒤지지 않는 왕국이다.
덕분에 소란은 금세 바다 건너 대륙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거기에 당연히 우리 일행들의 얘기가 안 낄 수는 없을 테고.
지금쯤 이글렌이 골머릴 앓고 있을 거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소테르에 있던 내가 자이겔론드로 온 거니까.
거리상 ‘공간 도약’을 쓴 게 아닐까 생각도 할 테고.
밀린 서류 결재도 대부분 끝났고 해서 이튿날 아침, 연무장으로 나왔다.
“…백작님!”
이른 아침부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프리아나.
혼자 있는 걸 보니 디아는 아직 없는 듯했다.
통신용 마법구론 오늘쯤 백작령에 되돌아올 것 같다 하긴 했는데.
“흠…….”
너무 섣불리 움직인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검은 반드시 수리해야 했으니까.
“…….”
난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왼손을 펼쳤다.
[이름 : 이안 임페라.]
랭크 : 6(검술), 6(마법), ….
“검술 랭크 6이라.”
거기에 마법 랭크까지 6.
하나라면 모를까 두 종류의 랭크를 6 이상 끌어올린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선 내가 유일할지도 모를 정도다.
검술 랭크 6.
이를 본 난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했다.
물론 검술 랭크6이면 어마어마하게 강한 거다.
처음 크로드를 마주했을 당시 랭크가 이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에고 소드의 보정치까지 붙으면 빈트하겐과 몇 번 검을 섞을 순 있을 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딱 그 정도 수준.
라크레시아나 카이세리우스 같은 먼치킨 괴물들을 상대하는 내겐, 한참이나 모자란 수준이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프리아나가 이를 엿듣곤 되려 호들갑을 떨었다.
“배, 백작님! 검술 랭크 6이 되셨다구요?”
“뭐… 그렇지. 이제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축하드립니다! 마침 저도 이번 전투로 랭크가 올랐거든요! 이거 겹경사가 따로 없습니다! 하하핫!”
“뭐……?”
검술 랭크 7?
그럼 빈트하겐 그 괴물이랑 동급이라고?
아니 뭐 소설에서도 랭크 7을 찍을 녀석이긴 했고, 그간 수련을 거듭했으니 그럴 만하긴 한데…….
“추, 축하한다…….”
“하핫! 감사합니다! 백작님!”
“…….”
뭔가 은근히 배알 꼴리는 이 기분은 뭘까.
‘좀 따라잡는가 싶으면 매번 강해진단 말이지. 이 녀석.’
“…하아.”
“헤헤.”
뭐 아무렴 어떤가.
녀석의 힘이 곧 내 힘인데.
가만있어 보자.
이제 검술 랭크 7이 됐다는 건…….
현재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 자리는 공석이다.
빈트하겐이 멀쩡히 살아 있긴 했지만, 갈렌의 트롤링에 동조했던 점에 스스로 죄를 물어 얼마 전에 결국 자릴 내려놓았다.
듣기론 여기저기서 검술 스승 자리라도 해달라 아우성이지만, 죄다 거절하곤 꾸준히 칩거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프리아나만큼은 예왼지 틈만 날 때면 임페라 백작령까지 찾아와 검술 수련을 시켜 주고 있었다.
여러 여건 상 프리아나 말곤 차기 기사단장 감이 없긴 했다.
“…프리아나.”
“네! 백작님!”
“기사 단장 생각은 없나?”
검술 외길인 녀석답게 돌려 말하면 못 알아먹을 거다.
녀석한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하하! 전혀요!”
“…그래?”
“네!”
“…….”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기사단장 자릴 거절했다.
‘뭐 나야 고맙긴 한데…….’
세상사가 그렇듯, 강한 힘엔 그만한 대가가 있는 법이다.
녀석 수준이라면 이제 온갖 정치적 개입이 들어올 터.
검술 랭크 7인 녀석이 계속 내 밑에 있는 건 여러모로 그림이 좋지 않았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방법이 뭔지는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아잇! 깜짝이야.”
어느새 내 옆에 쪼르르 달려온 이슬린이 한마디 했다.
마치 내 맘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한 발언.
이슬린 말이 맞다.
프리아나를 내 곁에 두면서, 여러모로 그림도 괜찮을 만한 방법.
가장 문제는 내 직위가 좀 낮았다.
이안 임페라 백작.
절대 낮은 계급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백작 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문제다.
그런 녀석을 호위로 두려면…….
“적어도 공작은 돼야겠죠.”
“…….”
“마침 백작님께선 공작위에 오를 길도 있구요.”
“크흠.”
공작, 정확히는 대공.
여왕의 부군이 될 경우 대부분 대상의 작위는 대공으로 승계시킨다.
애먼 백작이랑 여왕은 급이 안 맞으니까.
즉, 이글렌과 결혼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아, 글쎄. 한다니깐.”
“억지로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싫으신가요? 여왕님이?”
“…아니.”
“그럼 좋아하시나요?”
“굳이 따지자면… 뭐 그렇지. 하지만 그… 지금 여러모로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해서….”
“그럼. 계속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이십니까?”
“으응… 그건 아니지.”
“그럼 다행이군요. 마침 여왕님께서 연락을 하신 참입니다.”
“…뭐?”
이슬린은 품 안에서 통신용 마법구를 꺼내 들었다.
붉은 빛을 내뿜는 마법구는 왠지 모르게 이글렌의 분노를 담고 있는 듯했다.
“아마 화가 좀 나셨을 겁니다. 여러모로 나라 안팎을 시끌시끌하게 만드는 분 때문에.”
“허윽.”
“이글렌 언… 여왕님은 화나면 무섭다구요. 한 번도 못 보셨죠?”
“그…런가?”
“적당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왕님의 분노를 잠재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아마 이대로 화나시면 한동안 백작님과 얼굴도 안 보려 할 겁니다.”
“으윽…….”
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마법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곤 소량의 마나를 주입하자, 마법구에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하얀 피부에 약간은 굴곡진 금발.
확실히 미모만큼은 내가 본 사람들 중 제일 이쁘긴 했다.
[…이안!]
“아이고.”
마법구가 켜지자 이글렌이 인상을 팍 썼다.
결혼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
평소라면 쩔쩔 맸을 나였지만, 왠지 모르게 짜증 내는 이글렌의 모습도 뭔가 귀여웠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
난 한참동안 말없이 쨍알 대는 이글렌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이안?]
“…아. 네. 여왕님.”
[…어디 아파요?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방금까지 화내더니 이젠 또 내 걱정까지 해 주는 이글렌.
[어디 아픈 거면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마 자이겔론드에서 부상이라도 입은 줄 아는 듯했다.
“여왕님.”
[…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진짜 어디 아파요?]
나 때문에 뒤처리 할 일이 산더미 같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내 걱정까지 해 주다니.
“후후.”
왠지 모르게 녀석을 마주하고 있으니, 머릿속 가득하던 고민이 누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난 피식 웃으며 이글렌이 투영된 마법구를 바라봤다.
“이제야 이 말을 하게 되는군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예전에 한 번 했던 말.
그리고 언젠가 했어야 했지만, 미루고 미뤄 왔던 말.
난 나지막이 이글렌을 향해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