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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3화 (173/222)

173화

자이겔론드 전역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

난 이내 전언을 보낸 녀석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신 아쉬타르를 빼닮았던 수조 속 고대인, 녀석이 깨어났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어떻게?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너석이 깨어난 거지?

녀석이 깨어나려면 지금보다 한참은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아직 알루윈이 고대인이 위치한 지점까지 파고 들어가려면 멀었으니까.

“…설마?”

난 빠르게 지금까지 내 행적을 되짚었다.

먼 대륙에서 한 일들이 영향을 끼쳤을리는 없다.

그럼 자이겔론드에 오고 나서 일들이 영향을 끼쳤다는데.

“…아.”

난 이내 그 원인으로 한가질 떠올렸다.

고대인의 근처에 위치해 있던 웨이 포인트.

우린 거기서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왔다.

검을 수리하는 데 신경 쓰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애먼 흙밭을 뚫고 올라왔으니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는 걸.

그게 마침 우리 뒤를 밟던 알루윈에게 들통나고만 거고.

정황상 고대인이 한 말은 우릴 향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을 거다.

자신들의 근처에 다가온 드워프.

알루윈과 녀석의 하인들에게 한 말이었을 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한 걸 보면…….

“…X발.”

내가 부주의 했던 탓에 고대인의 봉인이 풀리고 말았다.

지하 땅굴을 파는 거였다면 몇 년은 더 걸렸을 길이, 환풍구를 통하는 바람에 금세 이어진 걸 테니까.

“어, 어떻게 된 거죠? 이 진동은 또 뭐고…….”

레오윈은 두려움에 가득찬 눈빛으로 주윌 살폈다.

괜히 애꿎은 왕의 대장간 도구들을 매만지기까지 했다.

아직 지진의 원인조차 모르는 레오윈은 혹여 검을 수리한 탓에 벌어진 일일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이를 어쩐다.’

애초에 계획은 검만 수리하고 잽싸게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럼 그냥 그렇게 할까?

‘…그건 안 되지.’

자이겔론드의 드워프들이 불쌍해서 그런 건 아니다.

뭐 그런 마음이 없진 않다.

주인공 일행이 고대인이 깨어날 때 마침 자이겔론드에 있어서 망정이지.

아마 녀석들이 없었더라면 자이겔론드는 그대로 멸망해 버렸을 테니까.

왕인 알루윈 마저 힘없이 당해 버리는 고대인의 파괴력.

알루윈이 재수 없는 놈인 건 맞지만, 자이겔론드의 드워프들에겐 죄가 없다.

하지만 결국 남이다.

이대로 깨어난 고대인에 의해 자이겔론드가 멸망한다 해도, 난 사실 상관없다.

여기 자이겔론드와 임페라 백작령은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

문제는 고대인의 정체를 내가 알아 버렸다는 거다.

마신 아쉬타르.

불과 수년 만에 지구를 황폐화시킨 미친 마물.

그 크기에 상당한 차이가 있긴 해도, 아마 고대인 녀석도 아쉬타르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을 거다.

만약 그런 녀석을 초장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재앙은 자이겔론드에서 끝나지 않을거다.

바다를 넘고, 머나먼 대지를 넘어 임페라 백작령까지 미치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녀석이 가장 약할 때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녀석을 자이겔론드를 실컷 집어삼키고 더 강해질 터.

그땐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지경을 아득히 넘긴 뒷일 게 분명했다.

“…젠장.”

“…백작님? 혹시 저희가 검을 수리한 것 때문에 이런 일이…….”

프리아나까지 애먼 검을 범인으로 짚곤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다. 이 지진은…….”

이내 결심을 굳힌 난 왕의 대장간에 함께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고대인이 봉인에서 깨어났다는 뜻이다.”

“…예?”

“음…….”

프리아나와 이슬린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프리아나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이슬린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곤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둘이 내뱉은 다음 말은 같았다.

“백작님. 부디 명령을 내려 주시길.”

“…그래.”

내가 그냥 아이소테르로 도망가자 하면, 녀석들은 지체 없이 따를 거다.

반대로 고대인을 막기 위해 싸우자 해도 따를 테고.

내 명령의 결과물이 뭐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미 내 입술은 둘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고대인을 막으러 간다.”

“네!”

“네.”

“…고대인?”

레오윈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아직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실컷 보게 될 테니까.

찹!

레오윈의 목에 걸린 웨이 포인트 파편을 붙잡았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아까 고대인을 마주했던 어두컴컴한 방을 떠올렸다.

파아앗!

이내 밝은 빛이 터져 나오고, 우린 어디론가 내던져졌다.

* * *

“이건…….”

알루윈은 반투명한 수조 속 마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의 사지에 비해, 곱절은 달려 있는 팔다리.

보기만 해도 파괴력이 느껴질 것 같은 강인한 육체.

턱에 달린 흉측한 촉수까지.

이를 본 알루윈은 생각했다.

녀석이 가진 힘, 그리고 기술을 모두 갖고 싶다고.

그걸 손에 넣기만 한다면, 자신은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막만한 자이겔론드 화산섬에서 왕으로 군림할 게 아닌, 바다 너머 광활한 대륙까지 아우르는 황제.

대륙 모든 걸 손에 넣고 싶었다.

“…….”

알루윈의 거친 손이 수조를 어루만졌다.

“…게르크.”

“예! 전하!”

“녀석을 꺼내라.”

“…하,하오나 전하…….”

자이겔론드 망치 수호단장 게르크.

무력만 놓고 보면 자이겔론드에서 손에 꼽는 강자였지만, 그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저걸 꺼내라시는 건…….”

절대로 자이겔론드 최심부를 건들지 마라.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선조들의 금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금기를 건드렸다.

그걸 너머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녀석을 꺼내라니.

그건 아무리 게르크라 해도 넘고 싶지 않은 선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알루윈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뜻.

게르크가 망설이자 알루윈의 눈빛이 사납게 뒤틀렸다.

다른 드워프들의 반응도 게르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망설이자 알루윈이 입을 이죽거렸다.

“…멍청한 놈들.”

“…죄송합니다! 전하!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선조들의 명을 어겼다간…….”

“비켜라.”

“허윽…….”

보다 못한 알루윈은 허리춤에서 망치 하날 꺼내 들었다.

일반 드워프들의 몸뚱이만 한 거대한 망치였지만, 거인의 왕관을 쓴 알루윈에겐 자그마한 손 망치 같았다.

먼 과거, 그의 형이 만들었던 거대한 망치.

탐욕스런 성격답게 녀석은 형의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망치까지 빼앗았다.

수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걸작.

하룬의 망치.

알루윈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형이 만든 망치라면, 분명 이 세상 누구의 것보다 뛰어날 거라고.

때문에 그는 두려웠다.

결국 두려움에 그는 망치가 아닌 방패를 만드는 걸 택했다.

운 좋게 둘 다 선왕의 인정을 받긴 했지만.

아마 똑같이 망치를 만들었더라면 왕이 되는 건 그의 형이었을 거다.

때문에 그는 아직도 가슴 한복판에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죽고 없을 형을 향한 열등감.

지금은 이 구멍을 탐욕이란 감정으로 메꾸고 있었다.

더 강한 힘과 기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라면, 형을 향한 열등감도 해소될 거라 생각했다.

“…….”

알루윈은 하룬의 망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쿠구구……!

붉은 크래프트 오러가 아닌 푸른 오러가 망치에 맴돌았다.

이는 곧 고대인을 가둔 수조를 향해 내리쳤다.

콰앙!

맹렬한 굉음이 망치를 타고 울려 퍼졌다.

미스릴조차 가루로 만들 파괴력이었지만 수조는 작은 흠집만 냈을 뿐이었다.

부그르륵!

하지만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기포가 올라오며 녀석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너희들은 누구지?]

“…히익!”

갑작스레 들려온 전언.

이에 드워프들은 귀신이라도 마주한 것마냥 헛바람을 삼켰다.

“호오.”

모두가 벌벌 떨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오로지 알루윈만이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었다.

검은 턱수염 사이로 흰 이까지 드러내 보이며 미소 짓는 알루윈.

녀석은 고대인을 향해 물었다.

“네놈이 바로 그 고대인이라는 존재인가?”

알루윈은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대인은 대답 대신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해라!”

[네놈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하지만 알루윈의 질문 따윈 아랑곳하지 않으며 다시 되묻는 고대인.

알루윈은 모종의 기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여기서 밀려나면 끝이다.

녀석에게서 고대인들이 가진 힘과 기술들을 끄집어내려면, 녀석과 기싸움을 이겨 내야 했다.

“놈!”

…콰앙!

알루윈의 거대한 망치가 수조를 다시 한번 내려쳤다.

쩌저적!

이번엔 제대로 균열까지인 수조.

알루윈은 거미줄처럼 퍼져 나간 균열 너머로 고대인을 응시했다.

“그딴 식으로 나오겠다면… 억지로라도 끄집어내 주지.”

고대인의 기술을 빼낼 수만 있다면 고문이라도 하리라.

하지만 녀석의 마지막 전언은 알루윈의 기대완 사뭇 달랐다.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쩌적!

수조에 나 있던 자잘한 균열.

그 너머 고대인이 움찔하자 균열의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으윽!”

알루윈은 황급히 방패를 꺼내 들어 파편 조각을 막아 냈다.

미스릴보다도 단단했던 수조의 파편.

이는 산개하는 것만으로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운 좋게 알루윈의 뒤에 있던 드워프들은 무사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은 유리 파편에 그대로 직격 당하고 말았다.

“으악!”

망치 수호단장 정도야 어찌어찌 버티긴 했지만, 알루윈을 따라온 건 대부분 평범한 드워프들.

그들은 그저 파편만으로 온몸이 난도질 당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어윽……! 저, 전하! 피하십시오!”

본인도 상처를 입은 게르크였지만, 왕을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서둘러 왕을 보호하려 망치를 꺼내 들었지만, 고대인의 첫번째 손이 더 빨랐다.

촤아악!

분명 갯수만 많은 팔처럼 생겼던 것들은 순식간에 들어나 알루윈을 향해 내달렸다.

“어딜!”

하지만 알루윈도 자이겔론드의 왕.

단련을 하는 이는 아니었지만, 온갖 아티팩트와 거인의 왕관까지 도배된 상태다.

어쩌면 일국의 기사단장마저 상대할 수 있을 수준.

알루윈은 자신감 넘치는 기세로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앙!

맹렬히 터져 나오는 굉음.

분명 이대로 녀석의 팔 하나가 짓이겨져야 했다.

그게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산이라도 마주한 듯, 알루윈의 망치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으윽!”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리긴 했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막을게 아니라 피했어야 했으니까.

콰드득!

알루윈이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만들었던 방패.

이는 고대인의 손짓 한 방에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방패를 뚫은 매서운 공격은 그대로 자이겔론드의 왕의 심장을 향해 내질러졌다.

파아앗!

때마침 지하 깊숙히 숨겨져 있던 웨이 포인트.

이를 탄 일행이 공간 도약을 통해 나타났다.

아이소테르에서 온 인간 일행과 알루윈의 아들 레오윈.

그들이 마주한 건.

고대인의 팔 하나에 그대로 꿰뚫린 왕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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