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절… 아시는 분들이십니까?”
“호오.”
레오윈이 여기 있을 줄이야.
탐욕에 물든 왕 알루윈 론 말라크.
하지만 그에 비해 아들인 레오윈 론 말라크는 비교적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레오윈은 날이 갈수록 탐욕에 눈이 먼 아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왕성 내부를 모조리 금으로 도배하는 미친 짓까지 서슴지 않았으니까.
그럴수록 자이겔론드 드워프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고.
광맥은 매말라 갔다.
‘그러다 선조의 금기마저 범했지.’
[광산 최하층에 숨은 녀석을 절대 건들지 마라.]
이미 탐욕에 물든 알루윈이 이를 지킬 리가 만무했고.
녀석은 계속해서 자이겔론드의 최심부를 향해 진격했다.
왕정이란 게 이래서 문제다.
왕이란 작자가 미쳐 버리면 컨트롤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나마 정상적이면서 알루윈에게 제동을 걸 유일한 드워프.
레오윈은 아비의 탐욕을 경계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당연히 그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고, 알루윈은 레오윈을 감옥에 가두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은 아들.
처음엔 무시하다가 잠깐 감옥에 유폐시키는 정도로 그친다..
그러다 몇 번 풀어 주고, 다시 레오윈이 반기를 들면 다시 가두고.
그러다 나중엔 범죄자들이 득실대는 일반 감옥에까지 녀석을 집어넣는다.
다행히 아직은 그때가 아닌지라 레오윈은 이곳 왕성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프리아나.”
“네! 백작님!”
“열어 줘라.”
“…네!”
파캉!
프리아나는 지체 없이 레오윈이 갇혀 있던 철창문을 뜯어 냈다.
“으읏…….”
레오윈은 그런 프리아나의 모습에 살짝 겁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억울하긴 해도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였던 터라 겁먹는 게 당연했다.
‘어쩌면 레오윈을 인질로 삼으려는 걸 수도 있고.’
사실 그것도 한 방법일 거다.
알루윈의 하나뿐인 아들인 이상 인질의 가치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욘 없었다.
반짝.
녀석의 목에 매달린 웨이 포인트 파편.
저거 하나면 귀찮은 짓 없이 바로 탈출이 가능했으니까.
“겁먹지 마라. 해코지 할 생각은 없으니.”
“…….”
내 말을 못 믿는 듯한 눈치였지만, 이내 내 눈빛을 읽었는지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누굽니까? 당신들은?”
“아이소테르에서 온 사람들이다.”
“아이소테르에서 왜…….”
“그야 검 좀 수리하러 온 거지. 알루윈은 그런 우릴 감옥에 가뒀고.”
이를 들은 녀석은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갤 떨궜다.
“…죄송합니다. 먼 타지에서 오신 분들께 이런 대접을 보이다니…….”
“그쪽이 미안할 게 뭐가 있겠나.”
녀석은 순순히 내 말을 믿는 듯했다.
불 같은 제 아비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도망치신다면 아버지의 성미를 더 돋우기만 할 겁니다. 그럴수록 검의 수리는커녕 자이겔론드를 무사히 빠져나가시기 어려워질 테구요.”
“괜찮다. 우린 공간 도약 기술로 여기까지 온 거니까. 갈 때도 그렇게 가면 그만이지.”
“고, 공간 도약 기술이요?”
“그래.”
레오윈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해 자잘한 설명을 덧붙였다.
애초에 공간 도약 기술을 대가로 에고 소드를 수리하러 온 거라고.
“아… 그런거라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나온 게 이해가 가는군요.”
“…뭐?”
“그, 그러니까 이해만 간다는 뜻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잘못하신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으음…….”
비교적 정상적인 녀석까지 저런 소릴 하다니.
공간 도약 기술이 드워프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기술인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으음… 아마 웨이 포인트라면 왕성 보고에 몇 개 있긴 할 겁니다. 정말로 공간 도약 기술을 써서 오셨다면… 그걸로 다시 되돌아가실 수도 있겠군요.”
“뭐 그렇긴 하지.”
“…제 아버지의 추태에 대해선 아들인 제가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후후.”
알루윈 대신 사과까지 하고 나서는 레오윈.
아비 탓에 감옥에 수감된 녀석치곤 제법 당돌한 소리였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네?”
“정말로 우리한테 미안하냐고.”
“그, 그렇습니다만…….”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레오윈이 불안한 눈빛을 내보였다.
“그럼 ‘그것’ 좀 잠깐 빌려줘 봐.”
“…‘그것’이라뇨?”
영문 모르겠다는 듯 고갤 갸웃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내 내 손가락을 보곤 눈치챘다.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그 끝엔 거무튀튀한 돌 파편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레오윈은 목걸일 보며 조금은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 어렸을 때 네 삼촌이 준 거 아닌가?”
“그, 그걸 어떻게……?”
“뭐 다 아는 수가 있지.”
그야 소설에 나왔으니까.
어렸을 적 레오윈은 하룬을 잘 따랐다.
엄한 아버지보단 그를 사근사근하게 대해 주는 하룬이 어린 그에겐 더 살갑게 다가왔을 테니까.
하룬도 그게 싫진 않았던 터라 이런 저런 선물도 자주 주고 그랬다.
그러던 중 레오윈에게 준 웨이 포인트 파편.
웨이 포인트 연구에 넌덜머리가 나 반쯤 버리듯 준 거였지만, 레오윈은 이를 보물처럼 아꼈다.
그러다 알루윈에 의해 하룬이 축출 당했고.
레오윈은 삼촌의 유품이라 생각하며 보물처럼 목에 매달고 다녔다.
비록 자그마한 파편이긴 했지만, 웨이 포인트처럼 똑같이 사용할 수 있었다.
대신 여러 번은 못 쓴다.
아마 앞으로 두, 세 번 정도?
“제 삼촌까지 아시다니…….”
레오윈은 삼촌 이야기에 퍽 서글퍼진 듯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
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룬의 조카라.
얘한텐 얘기해 줘도 되려나?
하룬이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레오윈도 바보는 아니다.
대외적으론 하룬이 왕좌에 실증을 느껴 도망쳤다곤 했지만, 이미 자랄 대로 자란 지금의 레오윈은 알고 있었다.
비열한 수작으로 하룬을 제거하고 알루윈이 왕위에 올랐다는 걸.
“…아무튼. 정말 우리한테 미안하면, 그 웨이 포인트 파편을 한번 빌려줘 봐라.”
“그, 그건…….”
“한 번 쓴다고 고장 나는 것도 아닌데. 좀 빌려주지?”
“…….”
레오윈은 고민되는 듯 망설였다.
“하, 하지만 이건 돌아가신 삼촌의 유품입니다! 함부로 사용했다가 파괴라도 됐다간…….”
“…하아.”
이것 참 시간 질질 끄네.
그냥 이참에 확 말해 버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끼리 몰래 왕의 대장간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보단, 레오윈의 조력이 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삼촌을 보고 싶나?”
“…네?”
“그럼 목걸이 좀 빌려주고, 왕의 대장간까지만 안내 좀 해 줘라.”
“그게 무슨…….”
“그럼 네 삼촌을 만나게 해 주지.”
“…그런 질 나쁜 농담을 그만하십시오! 이미 돌아가 버리신 삼촌을 어떻게…….”
“…….”
난 대답 대신 녀석을 지긋이 바라봤다.
처음엔 콧김까지 씩씩 내뿜으며 화내던 그였지만, 이내 표정 변화 없는 내 얼굴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놀라는 건 조금 이따가 하지.”
난 얼른 녀석의 목에 걸린 웨이 포인트 파편을 낚아챘다.
“어엇……!”
녀석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단전에서 끌어올린 마나가 웨이 포인트 파편을 향해 스며들었다.
*
파아앗!
“으악!”
급작스럽게 공간 도약에 빨려 들어간 레오윈.
녀석은 처음 놀이기구 타는 놈마냥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녀석은 잠시 내버려두고,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부신 빛과 함께 우린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아마 자이겔론드 왕성의 보고일 거다.
공간 도약은 시전자가 원하는 위치를 생각만 해도 가까운 위치로 이동된다.
덕분에 자이겔론드 어디에 웨이 포인트가 있는지도 몰랐던 우리가 지하 깊은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거다.
내가 떠올린 건 왕성에 위치한 보고.
사용할 순 없지만 웨이 포인트도 꽤나 귀한 물건이다 보니 왕성 보고에 보관해 둘 것 같았다.
“흠…….”
다행히 제대로 짚은 듯, 주변엔 별에 별 희한한 아티팩트들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아.”
다행히 근처에 익숙한 배낭이 하나 보였다.
덮개를 열자, 곤히 자고 있는 하룬이 안에 들어 있었다.
“크어억…….”
요란한 코골이까지 해 가며 잠든 녀석.
인식 저해 마법이 없었으면 바로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정말 공간 도약을……?”
“허윽!”
요란 법석 떠는 레오윈 덕에 곤히 자고 있던 하룬이 잠에서 깼다.
“허으윽… 이게 대체 무슨……?”
눈을 부비적거리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 이안! 자네가 있다는 건… 일이 제대로 풀렸단 소리겠군!”
“뭐, 그렇지.”
“…어?”
한가롭게 안부 인사나 나누고 있던 그때.
뒤에서 레오윈이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곤 천천히 다가왔다.
“이, 이 목소린?”
“이크! 이안! 다른 드워프를 데리고 오면…….”
도망자 신세인 하룬은 다시 얼른 고갤 배낭 속으로 처박았다.
하지만 녀석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배낭 밖으로 슬그머니 고갤 뺐다.
“이, 이 목소린…….”
“아…….”
검은 수염의 드워프와 구릿빛 수염의 드워프.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리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물을 터뜨렸다.
“레오윈! 내 조카!”
“삼촌!”
하룬은 배낭에 든 채로 조카를 부둥켜안았다.
그 모습이 좀 우습긴 했지만, 오랜만에 상봉한 가족이니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어흐흑……!”
“이야. 둘이 사이 좋았나 보네.”
“좋다마다! 알루윈 그 개자식에 비하면 오히려 내가 부모 같았을 정도야!”
“흐흑! 사, 삼촌…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아버지를 욕하는 건 좀…….”
“크하핫……! 그건 또 그런가?”
눈물겨운 이산가족 상봉은 좋다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부러진 검은…….”
주윌 두리번거리자 어렵지 않게 부러진 도신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배낭에 반쯤 꽂혀 있었으니까.
하룬이 조금만 더 키가 컸더라면 자다가 칼침 맞고 비명횡사 했을 뻔했다.
“…….”
쑤욱!
난 하룬 몰래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자자. 빨리 검 수리하고 빠져나가자고.”
“으음… 그래야지.”
난 하룬에게 말하면서도 눈빛은 레오윈에게 향해 있었다.
하룬도 은근히 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죽은 줄로만 아셨던 삼촌이 살아 돌아오셨는데. 그 정도 부탁 하나 못 들어줘야 되겠어요?”
“크흐흐! 그래! 어디 조카 잘 둔 덕 좀 보자고!”
그새 의기양양해진 레오윈은 성큼성큼 왕의 대장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곳인가.”
“네!”
알루윈은 왕성 근처에 위치한 숲에 섰다.
다른 드워프들보다 몇 곱절은 큰 덩치.
그런 알루윈의 앞에 나무꾼 드워프가 납작 엎드린 채 오들오들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전하! 갑자기 여기 흙바닥을 뚫고 녀석들이…….”
“…그러는 네놈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 그건…….”
나무꾼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왕성 근처의 숲은 왕성의 소유, 즉, 알루윈의 것이었다.
이를 함부로 베는 건 당연히 중죄.
알루윈은 그를 따라온 신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
신하들은 아무런 말없이 거대한 망치를 건넸다.
드워프 머리통만 한 머리에 팔뚝만 한 두께의 거대한 망치.
거인의 왕관을 쓴 자이겔론드의 왕만이 쓸 수 있는 거대한 망치였다.
“부, 부디 자비를…….”
나무꾼 드워프는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하지만 알루윈은 그런 녀석을 쳐다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롯이 아이소테르의 인간들이 나타났다던 흙바닥뿐.
그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흙바닥 주윌 걸었다.
퉁.
이내 느껴지는 공허한 발자국.
알루윈은 그곳을 향해 지체 없이 망치를 들어 올렸다.
이내 망치 주위로 붉은 오러가 매섭게 소용돌이쳤다.
그 어떤 드워프들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크래프트 오러.
…후웅!
거대한 망치는 그대로 흙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파앙!
망치에 얻어맞은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를 붉은 오러가 뒤따르듯 파동 쳤다.
가가가각!
기괴한 소릴 내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이하기 시작한 흙바닥.
이내 평범한 흙바닥은 네모반듯한 통로로 재구축됐다.
알루윈의 크래프트 오러는 땅 자체를 새로운 존재로 연마시켰다.
아무것도 없었던 흙바닥.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큼지막한 통로가 하나 자리 잡은 뒤였다.
새로운 입구를 만든 통로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로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군.”
선조들조차 접근을 금기시 했던 자이겔론드 최심부.
하지만 알루윈은 옛날 옛적부터 궁금해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보물이 숨겨져 있길래 접근조차 꿈꿀 수 없는 걸까 하고.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리고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아이소테르에서 온 이방인들에 의해 알루윈의 탐욕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