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70화 (170/222)

170화

“…이안 임페라 백작.”

무겁고 중후한 음색의 남자.

통신용 마법구로 봤을 때 느껴지던 압박감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왕은 왕이란 건가.’

단순히 느껴지는 기운만 강한 게 아니었다.

알현실에 자리한 다른 드워프들보다 곱절은 더 큰 키.

허리깨에 겨우 오는 드워프들과 달리 여기서 키가 제일 큰 프리아나와 비슷할 정도였다.

드워프를 확대시킨 것마냥 생긴 덕에 덩치도 곰같이 거대했다.

난 그런 녀석의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을 살펴봤다.

자이겔론드의 왕들만이 쓸 수 있다는 아티팩트.

‘거인의 왕관.’

왕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만이 쓸 수 있는 특이한 아티팩트다.

저걸 쓰면 키는 물론이고 신체 능력까지 다른 드워프들보다 몇 곱절은 더 강해진다.

비록 알루윈이 왕위를 찬탈한 놈이긴 해도 선대 드워프의 피를 이어받은 이상, 거인의 왕관도 무리 없이 쓸 수 있었다.

“이렇게 보게 되니 반갑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후후. 그런가?”

불과 단 하루만에 임페라 백작령에서 자이겔론드에 왔으니.

내가 공간 도약 기술을 쓸 줄 안다는 걸 입증할 증거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었다.

“…구르한. ‘그걸’ 가져와라.”

“옙!”

우릴 안내해 준 드워프가 알루윈의 말에 가슴에 손을 얹으며 경례 자셀 취했다.

그리곤 곁에 있던 다른 드워프 무리들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이 가져온 건, 큼지막한 크기의 석판이었다.

공간 도약술의 이정표로 쓰이는 웨이 포인트였다.

“흐읍…….”

드워프 장정 여섯이 달라붙어 겨우 든 석판.

알루윈은 석판을 단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

마치 배달집 책자라도 보는 것마냥 석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루윈.

하지만 석판은 여전히 빛 한 점 내뿜지 않고 있었다.

…쿵!

녀석은 석판을 내 앞에 집어 던졌다.

묵직한 무게에 육중한 소음이 일었다.

“한 번 보여 봐라. 네 말이 사실이란걸 입증해야 하지 않겠나?”

“거 참. 의심 많네.”

녀석은 아직도 내 말을 믿기 힘든 듯 직접 자기 눈 앞에서 시연을 해 보라 했다.

반쯤은 못 믿겠어서 그러는 거고, 반쯤은 내가 쓰는 걸 보고 사용법을 알아내려는 걸 거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거다.

찹.

석판 위에 손을 얹은 난, 단전에서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러자 석판이 요동치며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오오……!”

“저, 저런……!”

이를 본 드워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그저 손을 얹었을 뿐인데도 활성화됐으니.

자기네들이 수많은 세월 동안 시도했어도 실패만 거듭했던 기술이 이토록 쉽게 사용 가능할 줄은 몰랐을 거다.

“…여기까지.”

공간 도약을 할 필요까진 없을 듯 해 서둘러 마나를 거둬들였다.

“대,대체 어떻게 한 거요?”

알현실의 드워프 하나가 입을 쩍 벌린 채 물었다.

“그건 비밀이지. 이런 걸 공짜로 알려 줄까 봐?”

“…….”

알루윈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자존심이 상하긴 할 거다.

기술력이라면 그 어떤 종족보다 앞서고 있다 자신하고 있었을 테니까.

“…수리하고 싶다던 검은 가져왔나.”

“후후.”

난 허리춤에 매고 있던 부러진 검의 도신을 꺼내 들었다.

검 손잡이는 이미 날아가 버려 붉은 도신만이 남은 검.

옆에 드워프 녀석에게 전해 주자, 녀석은 쪼르르 달려가 알루윈에게 이를 건냈다.

“…….”

알루윈은 부러진 검을 시큰둥한 얼굴로 살펴봤다.

“…쓸 만한 검이군.”

“아마 여기서 만든 걸 거야. 아주 옛날에.”

“그렇겠지. 에고 소드를 만들 수 있는 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만이 가능했으니까.”

“뭐… 그렇지.”

사실과는 살짝 다르긴 했지만, 굳이 태클을 걸진 않았다.

“…….”

알루윈은 옆에 선 드워프에게 붉은 도신을 건넸다.

설마 바로 수리해 주겠다는 건가?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혹시 싫다고 땡깡 부리면 어쩌나 싶어서 하룬을 데리고 왔던 건데.

하지만 이내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이자들을 투옥하라.”

“…뭐?”

투옥?

설마 우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옛!”

녀석에게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드워프들이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스릉!

“물러나십시오!”

프리아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녀석의 으름장에 드워프들이 주춤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드워프들은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는 겁니까!”

“…….”

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봤다.

‘이 X끼…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데.’

“괜찮다.”

난 프리아나의 등을 두드리며 녀석을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녀석이 맨 배낭에 마법 두 개를 걸었다.

‘슬립.’

“…….”

그러자 배낭에 숨어 있던 하룬이 쥐 죽은 듯 곯아떨어졌다.

거기에 가벼운 인식 저해 마법까지 곁들였다.

난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미소 지었다.

이건 알루윈의 계략이다.

강하게 나가면 우리가 쫄 거라 생각하는 거다.

미안하지만 더한 사지도 경험해 본 나다.

이까짓 협박에 놀아날 내가 아니지.

“그럼…….”

투구를 눌러쓴 드워프들이 우리들의 손에 수갑을 채워 넣었다.

프리아나는 분한 듯 콧김을 씩씩 내뿜었지만, 내가 가만히 있자 별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

“…….”

드워프 하나가 배낭을 열고 살펴봤지만, 안에 든 하룬을 보지 못하고 짐을 어디론가 가져갔다.

*

그렇게 자이겔론드에 온 셋은 수갑을 찬 채 사이좋게 왕성 감옥에 투옥됐다.

철컹!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지, 우리 셋은 모두 한 감옥에 갇혔다.

“백작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게다가 녀석들이 가져간 배낭엔…….”

“그건 걱정 마라. 아까 안엘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챈 걸 보면 마법이 제대로 걸린 듯하니.”

“으음… 그렇긴 합니다만…….”

그나저나 나도 이렇게 알루윈이 강짜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일이 귀찮아지겠는데.’

계속 죽치고 버티면 녀석도 어쩔 수 없이 내 제안에 응해 주긴 할 거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애초에 시간 아끼려고 공간 도약을 한 거니까.

하는 수 없지만 정공법보단 뒷길을 써야겠다.

하룬을 데려오길 잘했다고 해야 하나.

“끄으응…….”

양손에 채워진 수갑에 힘을 불어넣었다.

콰드득…….

작은 소릴 내뱉으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수갑.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파캉!

“…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갑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부서진 건 내 수갑이 아니라 프리아나 거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백작님!”

콰드득!

프리아나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수갑을 뭉개자 무슨 과자 부스러지듯 수갑이 산산조각 났다.

“…나 혼자도 충분히 했을 거라고.”

“그럼요! 백작님은 강하시니까요!”

“…….”

이 자식이 지금 누구 놀리나?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낯빛을 보니 악의는 없어 보였다.

파캉!

프리아나는 이내 이슬린의 수갑까지 부쉈다.

“고맙습니다.”

“이게 무슨 소…….”

수갑을 부수자 간수들이 달려왔다.

“슬립.”

“어윽…….”

하지만 이내 시전 된 마법에 까무룩 잠들었다.

혹시나 해서 철창 밖으로 고갤 빼꼼 내밀어 봤다.

주변 감옥은 아무도 없는 듯 텅 비어 있었다.

여긴 자이겔론드 왕성이 위치한 감옥.

진짜 범죄자들을 투옥시키기 위한 감옥은 아니었다.

‘좋아.’

소설에서도 주인공 일행이 자이겔론드 감옥에 투옥된 적이 있다.

그때도 검을 수리하러 온 거긴 했는데.

그때에 비하면 양반이다.

쥐뿔도 없는 주인공 일행에 비하면 난 공간 도약 기술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쪽은 그래도 거래할 건덕지 하난 들고 있는 셈.

게다가 이런 왕성 감옥이 아니라 진짜 범죄자들이 득실대는 감옥이었으니.

“…….”

하지만 공간 도약 기술을 알려 줘도 문제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뭐 알아서 해결하겠지 했을 거다.

하지만 고대인의 생김새로 미루어 볼 때, 녀석은 분명 아쉬타르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을 거다.

크기가 작으니 힘도 훨씬 못 미치긴 하겠지만, 그런 녀석을 봉인에서 풀어 주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소설 속 스토리에 따르면, 공간 도약 기술을 알려 주면 녀석은 반드시 깨어나게 될 거다.

뭐 내가 안 알려 줘도 깨어나긴 할 테지만…….

굳이 그걸 앞당기고 싶지는 않았다.

“끄응….”

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소설 속 장면을 떠올렸다.

디아가 황혼을 수리하기 위해 들렀을 때, 알루윈은 대뜸 황혼을 수거해 가겠다고 한다.

당연히 디아가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고, 결국 알루윈의 꼬장에 주인공 일행은 감옥에 갇힌다.

시점으로 따지면 적어도 3, 4년은 뒤에 일어났을 일이다.

당시엔 지금과 달리 자이겔론드의 지하 갱도도 더욱 깊숙이 파고든 뒤였다.

이미 지하에 위치한 고대인까지도 발견해 놓은 상태.

알루윈은 녀석을 깨우기만 한다면 잊혀진 고대인의 기술 상당 부분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선조의 금기를 깬 것도 모자라 고대인을 깨우기 위해 고심하던 그때.

감옥에 갇혀 있던 주인공 일행이 웨이 포인트를 건드린다.

그러다 녀석들은 아까 우리 일행이 온 고대인의 봉인 장소로 이동된다.

덕분에 감옥에서 탈출은 할 수 있었지만, 익숙한 마나의 파장을 감지한 고대인은 그대로 봉인에서 풀려난다.

주인공 일행이 없었더라면 녀석의 봉인이 풀리는 일도 없었을 거라곤 하지만…….

아마 그대로 냅뒀어도 녀석의 봉인은 풀렸을 거다.

때마침 나타난 주인공이 촉매 역할을 해, 빨리 깨어났을 뿐이지.

뭐 그러다 때마침 고대인의 비밀을 연구하던 알루윈도 맞닥뜨리고.

알루윈은 그 자리에서 고대인에게 사망한다.

주인공 일행도 죽을 뻔하긴 했지만, 광폭화 찬스로 어찌어찌 녀석을 무찌르긴 한다.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주인공 버프가 사기긴 사기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아쉬타르처럼 생긴 녀석을 이기다니.

광폭화 덕분에 가능했던 건가?

“…일단 하룬을 구하는 게 먼저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차라리 일반 감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순전히 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주인공 버프.

거기 있는 ‘그 녀석’이 마침 웨이 포인트 조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웨이 포인트를 발동시켜 탈출했지.

“아쉽지만… 들어온 길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소란이 조금 일겠지만 괜찮다.

검만 수리하고 바로 임페라 백작령으로 도망치면 끝이니까.

“…거기 누구 있습니까?”

“응?”

왕성 감옥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조금은 앳된 목소리였다.

“빈 곳이 아니었나?”

“아…….”

녀석은 오랜만에 만난 외지인이 반가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미안합니다. 꺼내 줄 순 없어요.”

프리아나가 어둠 속 목소릴 향해 말했다.

“…잠깐.”

여긴 그냥 감옥이 아니다.

왕성에 위치한 감옥.

이런데 갇혀 있으면 보통 놈은 아니란 건데

‘…설마?’

“라이트.”

허공에 손을 뻗은 채 주문을 외자 밝은 마법구가 소환됐다.

이는 곧 어둠 속에 감춰진 드워프 녀석을 비췄다.

“으윽…….”

오랜 기간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갑작스런 불빛에 녀석이 침음을 내뱉었다.

“호오…….”

난 눈을 잔뜩 찡그린 녀석을 살펴봤다.

검 검은 수염.

비교적 탱글탱글한 피부만 아니었더라면 알루윈과 헷갈릴 정도의 외모였다.

녀석의 낯짝을 확인한 난 이네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을 떠올랐다.

“…레오윈?”

“…으응?”

탐욕의 왕 알루윈은 고대인에게 죽는다.

왕이 죽은 건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만, 그가 죽고 나서 자이겔론드도 제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라 하는 게 맞을 거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아비인 알루윈에 비해 비교적 정상적인 아들이 왕위를 이을 수 있어서였다.

레오윈 론 말라크.

그가 바로 알루윈의 아들이자 하룬의 조카였다.

“…보아하니 외지인 같은데. 절 아십니까?”

레오윈은 여전히 빛이 눈에 익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난 그런 그의 목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정확힌 목에 매달린 채 반짝이는 돌 조각.

웨이 포인트 파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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