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파아앗……!
‘우욱…….’
환한 빛과 함께 눈앞이 핑 돌았다.
어디 고약한 놀이기구라도 타는 기분이다.
문제는 제일 끔찍한 코스만 골라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계속 그러고만 있으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우우웅…….
‘…언제 끝나지.’
슬슬 질리는 것 같을 때쯤, 머릿속으로 안내 문구가 들려왔다.
[대상 지점에 장해물이 위치해 있습니다. 충격에 주의하세요.]
“…뭐?”
…콰아앙!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눈 앞에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으악!”
덕분에 코 앞에 나타난 장해물에 얼굴을 그대로 처박았다.
태애앵.
맑고 경쾌한 울림 소릴 내뱉는 장해물.
뭔가에 제대로 얻어맞은 난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콰직.
“끄악!”
뭔가 묵직한게 내 등 위에 올라탔다.
자이겔론드의 드워프인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굉장히 무거웠다.
“어이쿠!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어머.”
내 등 뒤에 올라탄 건 다름 아닌 프리아나와 이슬린이었다.
“괜찮은겐가! 친우여!”
거기에 짐짝 취급 당하던 하룬까지 더해지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빨리 내려라.”
“아앗……! 넵!”
그제야 부랴부랴 등 뒤에서 내려온 녀석들.
내 덕에 녀석들은 어디 부딪히지 않고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으윽…….”
시큰시큰한 콧잔등을 부여잡고 주변을 살폈다.
내 앞길을 막은 녀석이 대체 뭔…….
“…허억!”
난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용린검에 손을 얹었다.
“배, 백작님? 대체 왜…….”
“허억……! 허억……!”
반투명한 막.
그 너머엔 잊을 수 없는 녀석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아는 녀석보단 그 크기가 훨씬 작지만,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나.
“이, 이건…….”
하지만 왜?
왜 이 녀석이 이렇게 생긴 거지?
소설 속 묘사로 봤을땐 몰랐다.
그건 그림이 아닌 그저 텍스트로 이루어진 묘사였으니까.
“…….”
“…신기하군요. 여기에도 이런게 있다니.”
이슬린은 반투명한 막 위에 손을 얹은 채 안을 들여다봤다.
지난번에 한번 봤던 구조물이라 그런지 둘은 놀라는 게 덜했다.
반투명한 막.
그건 지난번 고대인의 보고에서 마주했던 수조 같은 거였다.
수만 년의 세월을 지나도 버틸 수 있도록 만든 고대인들의 보관함.
먼 과거에 있었던 대재앙을 견뎌 내기 위해 만든 일종의 보험.
임페라 백작령에 위치한 녀석이 혼을 담을 ‘그릇’이었다면, 여기 있는 건 혼을 담을 ‘병기’다.
“몬스터…인가요?”
이슬린은 괴상하게 생긴 녀석의 얼굴을 보며 고갤 갸웃했다.
하지만 녀석의 ‘눈으로 보이는’ 건 굳게 닫혀 있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맞다.”
자이겔론드에 위치한 고대인.
이건 엔델로 광산에 숨겨 놨던 녀석보단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묘사된다.
같은 보험이긴 했지만, 다른 집단이 만든 거니까.
소설 속 설정에 따르면 인간을 이루는 건 ‘혼’과 ‘그릇’이다.
때문에 엔델로 광산에 혼을 담을 그릇, 고대인을 본따 만든 그릇이 잔뜩 있었던 거다.
하지만 수만 년이란 세월 앞에 혼은 점차 무뎌지고, 깎여 나갈 수밖에 없다.
고대인들 나름대로 연구를 해 본 결과에 따르면 보통 3년이면 혼이 소멸된다고 하니까.
나름 혼을 보관할 방법도 간구해 봤겠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대륙 곳곳에 남은 건 그저 ‘그릇’들뿐이다.
하지만 이곳 자이겔론드에 있는 건 다르다.
애초에 혼과 그릇을 따로 분리할 게 아니라.
혼을 강인한 그릇에 보관한 채로 수만 년을 기다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서 선택된 게 바로 이 괴물에 가깝게 생긴 생체 병기.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실패한다.
아무리 고대인들의 기술이 접목됐다곤 해도, 이런 괴물 안에 갇힌 채 수만 년을 버텼다간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거다.
결국 그릇뿐만 아니라 혼까지도 괴물 그 자체가 돼 버린 고대인.
수만 년 만에 깨어난 녀석은 그렇게 주인공 일행에게 퇴치 당한다.
고대인도 결국엔 인간이다.
사지가 달려 있고 눈 코 입이 달려 있다.
하지만 수조 안에 녀석은 사람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달린 사지에 징그럽게 돋아난 촉수까지.
소설 속 묘사 그대로의 모습이다.
“…….”
그땐 그저 괴물이니까 그렇게 생겼겠거니 했는데.
이건…….
‘아쉬타르잖아.’
마신 아쉬타르를 소형화시켜 만든 듯한 생김새.
다른 이도 아닌 내가 녀석의 생김새를 잊을 수는 없었다.
녀석의 역겨운 촉수에 동료들을 모두 잃고 지구까지 멸망해 버렸으니까.
“이게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고대인이 만들었다는 생체 병기가 왜 아쉬타르의 모습을……?
“…백작님?”
“…아. 그래.”
프리아나의 부름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수조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난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가자고. 제대로 도착은 한 것 같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은 많았다.
그저 생김새가 비슷한 걸 수도 있고, 같은 녀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죽치고 앉아 충격에 빠져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건… 뭐죠?”
“이 녀석은…….”
나도 뭔진 잘 모르겠다만 한 가진 확실했다.
“고대인…이다.”
“이, 이 녀석이 고대인이라구요?”
이미 예전에 한 번 고대인들을 봤던 터라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뭐… 좀 다른 버전 같은 거지.”
“오… 고대인들도 엘프나 인간처럼 종족이 나뉘어 있었던 건가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라.”
자세한 설명은 귀찮아서 넘어갔다.
애초에 나도 저 녀석이 왜 저렇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그럼…….”
난 허공에 빛의 마법구를 소환했다.
그러자 어두컴컴하던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수만 년간 버려진 시설답게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가득했다.
자이겔론드의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했으니.
이곳의 드워프들조차 이곳의 존재는 몰랐다.
“일단 나가자고”
“어… 어떻게 나가죠?”
난 대답 대신 바닥에 있던 흙 한 줌을 흩뿌렸다.
사아악…….
그러자 먼지 구름이 한쪽을 향해 빠져나갔다.
“저기군.”
소설에 따르면 환풍구가 하나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 빠지는 곳으로 향하자 지상 쪽과 주욱 이어진 통로가 나타났다.
“가자고.”
“네!”
* * *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법한 작은 통로.
이를 비집고 나아가자 자이겔론드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푸핫!”
통로 끝자락은 흙으로 뒤덮여 있어 파내느라 고생 좀 했다.
겨우 흙을 다 파내고 나오자 웬 숲 끝자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
자이겔론드는 본디 하나의 거대한 화산섬이었다.
거기에 풍부한 광맥까지 보유한 땅은 자연스레 드워프들의 왕국으로 자라났다.
자이겔론드의 거대한 산을 주위로 군집한 자이겔론드 왕성.
연결되어 있던 건 자이겔론드 왕성 주변의 작은 숲.
“…흐아아악!”
“뭐, 뭐야?”
느닷없이 흙바닥을 뚫고 나온 한 무리의 일행.
덕분에 옆에서 나무를 캐고 있던 녀석이 기겁했다.
짤막한 키에 덥수룩한 턱 수염.
드워프였다.
‘제대로 오긴 했군.’
“겁먹지 마십쇼. 아이소테르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아, 아이소테르?”
프리아나의 설명을 들은 드워프 녀석이 고갤 갸웃했다.
“…아!”
그러다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쳤다.
다행히 드워프들은 엘프들과 달리 그렇게까지 폐쇄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난데없이 땅바닥을 뚫고 나왔던 터라 눈빛엔 경계심이 흐르고 있었다.
“그, 그런 분들이 어떻게 여길…….”
“뭐긴. 공간 도약 기술로 온 거지.”
“뭐, 뭐라?”
평범한 나무꾼 같았지만 공간 도약 기술이란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간 도약 기술은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꿈에 그리는 기술.
덕분에 평범한 나무꾼조차 아는 듯했다.
“그, 그렇다는 건…….”
“이미 너희들 왕과 다 얘기해 놨다.”
“아…….”
“혹시 좀 불러다 줄 수 있겠나?”
“그, 그러죠…….”
녀석은 경어까지 써 가며 잽싸게 왕성을 향해 달려갔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곧 왕성에서 사람을 내어 올 거다.
“으음…….”
짐짝에 숨어 있던 하룬이 고갤 빼꼼히 내밀었다.
“…오랜만이구만.”
“아는 마을인가?”
“그야 당연하지! 자이겔론드에 속한 마을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꿰고 있다구.”
“오호.”
“…….”
신이 나서 떠들던 하룬은 본인의 처지를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한때 자이겔론드의 주인이 될 뻔했던 남자.
그런 그가 지금은 배낭에 숨어 정체를 들킬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미안하군. 이런 델 오게 해서.”
“으음. 괜찮다네. 자네한테 얻은 은혜가 있는데.”
“…….”
하룬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검을 수리하려면 왕의 대장간이 필요했으니까.
“저, 저깁니다!”
“빠르군.”
어디 소식통이라도 있는지 나무꾼이 뛰쳐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워프 한 무리가 몰려왔다.
“이크!”
녀석들의 등장에 하룬은 다시 고개를 배낭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깊게 눌러 쓴 투구와 큼지막한 도끼.
제 키보다 큰 양날 도끼를 든 드워프들은 투구 너머의 눈을 우릴 향해 부라렸다.
자그마한 키에 덥수룩한 턱수염.
투구가 없었더라면 하룬과 헷갈릴 듯한 생김새였다.
인간인 내겐 드워프들이야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개중에 금줄을 덧댄 듯한 투구를 쓴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입니까? 공간 도약 기술을 써서 왔다는 게?”
“그렇다.”
“…그렇다면 아이소테르의 이안 임페라 백작?”
“그래.”
“…….”
녀석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뭐 감수할 만했다.
녀석들 입장에선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공간 도약 기술을 쓴 척 한 걸 수도 있으니까.
“…자세한 얘긴 가서 듣죠.”
“뭐. 그게 좋다면야.”
녀석은 눈을 한 번 가늘게 뜨곤 뒤돌아섰다.
“…짐은 이리 주시지요.”
조금 계급이 낮아 봬는 드워프가 프리아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된다.
배낭엔 그냥 짐이 아니라 하룬, 자이겔론드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녀석이 들어 있었으니까.
‘…백작님! 어떡하죠?’
‘가만있어라.’
“싫다면?”
“…네?”
“내가 왜 짐을 넘겨야 하지?”
“그, 그야…….”
드워프 녀석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의 태도에 혀가 굳었다.
그야 어쩌다가라도 자이겔론드에 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태도가 똑같았으니까.
조금이라도 값을 깎기 위해 절절 매는 게 인간들이었으니까.
“…지금 당신네들이 누굴 만나러 가는 줄은 아십니까?”
뒤돌아섰던 드워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지. 너희들 드워프한테 기술 이전을 해 주려고 온 거니까.”
난 지금 말하고 있는 거다.
여기서 갑은 너네들이 아니다.
나지.
매번 갑의 위치에만 있었던 터라 녀석들은 이런 반응이 어색한 듯했다.
“…하지만 전하를 뵙는 이상 검문검색은 필수입니다.”
“뭐. 잠깐 살펴보는 것 정도라면야.”
난 녀석에게 배낭을 열어 보였다.
“…별건 없군요.”
배낭을 열자 보이는 건 단순한 옷가지와 먹을 게 전부였다.
그 밑에 하룬이 숨어 있긴 했지만, 분위기 탓에 함부로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빨리 안내하라고.”
“…예.”
눈빛엔 불만이 가득했지만, 녀석들에게 이 거래의 갑이 누군지 확실하게 인식시켜 줬다.
이내 녀석들을 따라 승강기 같은 곳에 올라탔다.
쿠르르…….
짤막한 키 탓에 드워프들은 걷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기술력도 있겠다, 이처럼 자동 승강기 같은 걸 이용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밖엔 우리가 탄 것과 비슷하게 생긴 승강기가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이건 좀 생김새가 다르군.”
“그야 이건 전하의 알현실과 이어지는 거니까요.”
“오호.”
잡다한 절차가 있음 귀찮았을 텐데.
나야 일이 빨리 해결되게 생겼으니 이득이다.
띠링!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강기가 멈춰서며 밝은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이내 문이 열리고.
알현실 끝자락에 턱을 괸 채 앉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