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공간 도약 기술.
먼 과거 고대인들이 쓰던 유실된 기술이다.
공간전이 마법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차원에 균열을 찢어 먼 거리를 하나의 점으로 잇는 게 공간전이 마법.
양쪽에서 균열을 만들어야 하는 마법이다 보니, 마나 소모량도 꽤 되고.
거리가 멀면 멀수록 요구되는 마나량도 몇 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공간 도약 기술은 좀 다르다.
시전자의 마나를 쓰는게 아니라 대지에 흐르는 마나.
즉 용혈을 쓰는 기술이다.
‘진짜 드래곤들 몸에 흐르는 용혈이랑은 전혀 다른 거지만.’
대지에 흐르는 마나가 마치 용의 움직임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그렇게 놓고 보면 같은 거라 해야 하나.
아무튼 용혈을 쓰는게 공간 도약 기술.
자이겔론드의 드워프들도이 기술이 뭔지는 안다.
머나먼 타대륙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대륙과 무역을 하는 게 큰 장애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공간 도약 기술을 되살리려 숱한 노력을 해 봤지만, 여태껏 다른 고대인의 유물들은 사용했어도 공간 도약 기술까진 드워프들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난 알지.’
공간 도약 기술 재현이 불가능한 건 드워프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드워프들도 결국엔 고대인이 아닌 지금 시점의 사람들.
다른 인간이나 엘프들처럼 다 똑같이 랭크 시스템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안 되는 거다.
공간 도약 기술엔 단전에서 뽑아 올린 마나가 필요하니까.
아무리 노력해 봐도 녀석들의 몸뚱이론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일종의 편법 같은 게 있긴 했다.
만약 이를 전수해 주는 대가로 거래를 이끌어 낸다면…….
‘이 녀석을 수리할 수 있을지도.’
난 붉게 물든 도신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 녀석은 반드시 수리되어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준비됐습니다. 백작님.”
“그래.”
이슬린은 네모난 상자 같은 걸 가져오며 내게 말했다.
각진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불룩한 유리 판.
흡사 지구의 컴퓨터처럼 독특하게 생긴 아티팩트였다.
“이게 자이겔론드 전용 통신 마법구군.”
“네. 제법 비싸더군요.”
이슬린이 암시장에서 따로 발품 팔아 가며 구해 온 통신 마법구.
마법‘구’라기엔 좀 애매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무튼 마법구다.
자이겔론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일반적인 통신용 마법구론 통신이 어려웠다.
대신 전용 통신선을 하나 따 자기네들만을 위한 마법구를 만들었다.
드워프제 물건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다.
때문에 그런 그들과 연결을 가능케 하는 통신용 마법구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출혈이 꽤 크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거… 어떻게 켜는 거야?”
“우측 하단에 스위치를 누르시면 됩니다.”
“오…….”
‘이건 뭐 그냥 컴퓨터구만.’
밑에 난 버튼을 꾹 누르자 마법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독특한 문양이 떠올랐다.
자이겔론드를 상징하는 망치와 모루의 문양.
어딘가 붉은 피가 흐를 것 같은 문양이다.
이내 문양이 사라지자 반듯한 글씨체의 안내 글귀가 나타났다.
[자이겔론드 통판에 연락해 주신 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 연결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삐빅.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인터넷 쇼핑몰을 연상 시키는 화면.
별게 다 있었다.
[아티팩트 개별 구매]
[-아름다운 영애들을 위한 호신용 레이피어]
[-명예로운 기사들을 위한 마검]
[…….]
[무구 대량 구매]
[대형]
[중형]
[소형]
귀족들을 위해 만든 마법구답게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구경하고 싶어지는 걸 보면 제대로 만들긴 했다.
“흠…….”
화면을 쓸어내리자 다른 품목들이 떠올랐다.
잠깐 구경할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계속해서 화면을 맨 아래까지 내리자 눈에 띄는 항목이 떠올랐다.
[기타 문의.]
“여깄군.”
항목을 클릭하자 화면 위로 새로운 안내창이 떠올랐다.
[상담서와의 연결을 원하십니까?]
[예.]
[잠시 후 연결되오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빰. 빠바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휴식용 bgm까지.
이거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러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안내 문구 돌리기만 하는 거 아닌가?
달칵.
“…휴.”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안내 문구로 가득 차 있던 화면이 사라지고.
늙수그레한 드워프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반 안경을 쓴 채로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드워프.
얼굴만 봐도 깐깐할 것만 같은 녀석이다.
얼굴 절반을 가린 턱수염만 아니었더라면 모 게임에 나오는 돈 밝히는 고블린 같은 얼굴이었다.
[자이겔론드 통판 상담사 샤이록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녀석은 심드렁한 얼굴로 안내 문구를 읊었다.
자이겔론드 산 제품이라면 부르는 게 값.
따지고 보면 저들이 갑이란 거다.
게다가 지금 난 일반적인 루트가 아니라 문의까지 넣은 상황.
아직 판매 물품들의 가격은 보지 않았지만, 아마 입이 쩍 벌어질 듯한 가격인 건 분명할 거다.
제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같은 사람.
기타 문의로 가격 좀 깎아 달라 아우성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덕분에 상담사 대부분이 불친절 할 수밖에 없었다.
문의라 해 봐야 좀 깎아 달라는 게 대부분이니까.
“…제품 수리를 맡기려고 한다.”
[호오… 수리 말씀이신가요.]
웬만해선 잘 고장 나지도 않는 제품들이다 보니 상담사는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소속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소테르의 이안 임페라 백작이다.”
[흐흠. 이안 임페라 백작…님. 실례지만 임페라 백작가론 판매한 걸로 등록된 물품이 없습니다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확실한 건 나도 모른다. 이름조차 모르지. 하지만 아마 여기서 만들긴 했을 거다. 이건…….”
난 마법구를 향해 부러진 도신을 보여 줬다.
붉게 물든 도신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검 같지는 않았다.
상담사도 신기한 듯 반안경을 추켜들며 도신을 살펴봤다.
“…얼마나 걸릴 것 같지?.”
[흠… 아무래도 평범한 검 같지는 않군요. 저희 쪽에서 판매한 물품이라면 수리 요금이 할인됩니다만. 아무래도 기록이 없다 보니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일반 수리로 등록해 드려도 될까요?]
“그래.”
[수리 기간과 물품 배송까지 고려해 본다면…….]
상담사는 혼자 중얼 거리며 자판에 뭔갈 두들겼다.
그러자 화면에 수리 요금과 기간이 나타났다.
‘와우.’
눈이 떡 벌어질 듯한 금액.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기간이었다.
[1년.]
이건 뭐 새로 검을 사는 게 더 날 지경이다.
에고 소드가 아니라 평범한 마검이었다면 지체 없이 통화를 끊어 버릴 정도였다.
“1년이라. 조금 오래 걸리는군.”
[하핫.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직접 가지고 가면 바로 수리가 가능한가?”
[으음…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기간엔 별 차이가…….]
“당장 내일 가지고 간다면?”
내 말에 상담사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내일이요? 혹시 이 근처…….]
“아니. 여긴 임페라 백작령이다.”
[하! 그런데 어떻게 내일 오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무슨 장난이라도…….]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녀석.
하지만 내 표정에 별 변화가 없자 녀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난 ‘그걸’ 할 줄 알거든.”
[죄송하지만 자이겔론드엔 따로 손님들을 위한 공간전이 마법을 대비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맞대두.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이안 임페라 백작님.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철컥.
상담사는 심각한 얼굴로 얼른 통신을 종료시켰다.
옆에서 눈칠 보던 하룬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이,이거 정말 괜찮은겐가? 게다가. 자네가 ‘그걸’ 어떻게……?”
“공간 도약 기술 말이군.”
“으음… 그래. 자네가 직접 말하는 걸 보니 아는 게 분명하군. 하지만…….”
“뭐 백작쯤 되면…….”
“하이고. 어련하겠는가.”
하룬은 질렸다는 듯 고갤 내저었다.
삐비빅.
마법구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이크!”
하룬은 얼른 마법구 뒤로 숨었다.
알루윈이 안 찾은 지 오래되긴 했지만 다시 들키기라도 했다간 골치 아파진다.
달칵.
버튼을 다시 누르자 아까완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마법구 주위로 붉은 빛까지 나오는 게 뭔가 다른 통신선을 쓰는 것 같았다.
[…이안 임페라 백작. 맞나.]
검은 턱수염이 굉장히 무성한 드워프가 나타나 말했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매섭게 뜬 두 눈.
어딘가 묘하게 하룬을 닮은 외모다.
뭐 내 눈에야 드워프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맞다만. 그러는 그쪽은?”
[…자이겔론드의 정당한 왕. 알루윈 론 말라크다.]
“…오호.”
왕과 직통으로 연결까지 해 준다라.
붉은빛은 보안상 다른 통신선을 쓰는 게 맞는 듯했다.
“알루윈……!”
마법구 뒤에 숨은 하룬이 작게 중얼거렸다.
항상 호쾌한 얼굴로 웃음만 보이던 하룬.
그런 그의 낯빛이 지금은 목에 핏대가 불룩 솟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하룬은 저놈한테 모든 걸 잃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가신들도,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들도.
자이겔론드의 정당한 후계자란 자리와 모든 명예마저도.
심지어 그런 비열한 짓을 해 놓고도 아직까지 하룬을 죽이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뭐 지금은 죽은 줄 알고 신경 안쓰는 것 같지만.
오랜 세월 잊고 있던 동생의 목소리.
하룬은 화가 잔뜩 났지만 조용히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루윈이 왕위를 차지한 지 십수 년도 더 지났고, 하룬은 그저 도망치는 신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거 영광이군. 자이겔론드의 정당한 왕이 연락까지 해 줄 줄이야.”
자기 이름 앞에 정당한 왕이라고 콕 찝는 게 뭔가 좀 모양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콤플렉스였던지라 매번 저 말을 붙여서 한다는 설정이 있었다.
[…공간 도약 기술을 사용할 줄 안다던데.]
“물론이지.”
[그 증거는?]
“그거야 내일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드워프들의 왕인 자신에게 다소 싸가지 없는 말투에 알루윈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나름 구석에 숨어 있는 하룬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공간 도약 기술을 아는 이상, 갑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니까.
[…원하는 게 뭐지.]
대화가 빨라서 좋다.
이래서 성질 급한 놈들이랑 거래하는 게 좋다니깐.
“왕의 대장간. 그걸 좀 쓰게 해 줬음 하는데. 검 하날 좀 수리해야 하거든.”
[…하.]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많은 의미가 담긴 코웃음이었다.
한낱 변방의 백작 나부랭이가 공간 도약술은 어떻게 아는지.
게다가 왕의 대장감은 또 어떻게 아는지.
그래 놓곤 원하는 게 고작 검 하날 수리하는 거라고 하니.
[…제정신이 아니군.]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당신네들이 그토록 원하던 기술인데. 고작해야 대실 한 번 해 주는 걸로 전수해 주겠다는데.”
[…이놈이……!]
예의가 도를 지나치자 알루윈이 분기 가득한 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난 안다.
녀석이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화 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
능글맞게 미소까지 짓자 녀석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졌다.
본인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꿀밤이라도 먹일 순 없을 테고.
난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나온 대답은.
당연하게도 예스였다.
[네 말이 진짜인지 한 번 기대해 보겠다. 하지만.]
“하지만?”
[왕을 놀린 대가는 그리 싸지 않다는 걸 알았음 하는군.]
“…후후. 그래.”
만약 그게 거짓이었다면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날 조지겠다.
그런 의미였다.
실제로 자이겔론드의 왕이라면 그 정돈 가능했고.
에고 소드 하나 던져 주고 날 죽이라 하면 달려들 기사들이 쎄고 쎘으니까.
[그럼. 기대하도록 하지.]
알루윈의 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마법구는 빛을 잃고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