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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66화 (166/222)

166화

몰락의 성채에서 일이 마무리되고, 우린 곧장 임페라 백작령으로 향했다.

보통 사신단 업무가 끝나면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로 향하는 게 맞긴 하지만, 지금쯤 테라리움은 한창 바쁠 거다.

교황 주에른 4세의 죽음.

그로 인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테니까.

‘장례식도 참석해야 할 테고.’

임페라 백작령에 도착할 즈음, 주에른 4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각 왕국 연합의 수장들도 차례로 참석해 조문을 표할 테고, 앞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거다.

때문에 이글렌한테는 통신용 마법구로 대강 사정만 전해 주고 말았다.

자잘한 업무는 모두 뒤로 미루고, 난 곧장 하룬에게로 향했다.

하룬 론 말라크.

지금은 내 영지에 사는 전속 대장장이 쯤으로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자이겔론드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다.

드워프들의 왕국 자이겔론드.

연합이 위치한 대륙과 따로 떨어진 대륙.

대륙이라 하기엔 크기가 좀 작고, 섬이라 하기엔 너무 큰 땅.

덕분에 대륙에서 연합이니 카잔 제국이니 난리가 났을 때도 자이겔론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이따금 연합에 무기들을 팔고 하는 게 전부였다.

하룬은 그런 먼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자 현 자이겔론드의 주인.

소설에선 ‘탐욕의 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드워프.

알루윈 론 말라크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그의 가신과 가족들까지 모두 살해당하고 도망친 머나먼 땅.

그게 지금 이곳 임페라 백작령이다.

나였다면 속이 뒤집어졌겠지만, 하룬은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듯했다.

나도 최대한 배려해 주려고 일을 몰아주거나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술을 몰아주는 거면 몰라도.’

오죽하면 녀석이 먹는 술값과 만들어 내는 아티팩트 값이 비슷할 정도일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오! 친우여! 여행은 잘 다녀왔는가!”

“…그렇지.”

후루룩!

하룬은 거무튀튀한 뭔갈 벌컥이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셀리버트의 작물로 만든 흑차였다.

“그건 먹을 만한가?‘

“으음… 뭐 먹을 만하더군! 술에 비하면 조금 밍밍한 감이 없진 않지만! 크하핫!”

“후후. 입에 맞으니 다행이구만.”

말은 저렇게 해도 꽤나 맛있는 모양이다.

하긴. 콜라가 맛없을 수가 없지.

“그나저나 다른 일은 다 제쳐 두고 나한테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그래.”

눈치 빠른 녀석답게 내가 뭔갈 원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챘다.

“이거다.”

난 녀석에게 몰락의 성채에서 주워 온 부러진 도신을 건넸다.

이미 반쯤 날아가 버린 검은 여전히 붉은 빛을 선명히 내뿜고 있었다.

“이건…….”

탁!

하룬은 마시던 흑차를 옆에 내려다두고 도신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굉장히 귀한 검이군.”

“…그렇지?”

하룬조차 굉장히 귀하다 칭하는 검이라.

“어디서 난 거지?”

녀석은 도신을 집게에 끼워 요리조리 살펴보며 물었다.

“…오다 주웠다.”

“크흐흐! 그래? 이런 녀석을 줍다니. 운이 좋군.”

“…….”

“이걸 잃어버린 녀석은 운이 나쁜 놈이고.”

“그런가?”

“그럼! 보아하니 이게 어떤 검인지는 대충 아는 눈친데.”

“…그렇지.”

“에고 소드. 맞지?”

에고 소드.

자아를 갖는 검.

마검의 상위 호환인 아티팩트이자 기사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할 검.

부르는게 곧 가격인 어마어마하게 희소한 녀석이다.

먼 옛날엔 에고 소드를 직접 만드는 녀석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눈앞의 하룬조차 맘대로 만들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에고 소드다.

지금 시점에서 에고 소드는 하나의 생명.

만드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존재.

오랜 세월 주인과 함께 하다 스스로 자아를 갖는다.

‘크로드 녀석의 파산검처럼 말이지.’

제 주인마냥 거무튀튀한 녀석으로 나왔었다.

“하지만… 생명을 잃은 상태군.”

“그래.”

에고 소드를 괜히 생명에 빗댄 게 아니다.

단순히 이가 나가는 것 정도는 스스로 치유하겠지만, 지금처럼 두 동강 난 상태라면 그 힘을 잃는다.

마치 사람처럼 죽어 버린 상태라 보면 된다.

“고칠 수 있겠나?”

이 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야 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고칠 수 있냐고? 푸하핫!”

내 물음에 하룬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마냥 크게 웃었다.

“…난 진지해. 고칠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크흐흐… 미안하네! 망치질에 문외한인 자네가 봤을 땐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 그저 뚱땅뚱땅 두들기기만 하면 고쳐질 거라고 말이야!”

“…….”

“…미안하지만 지금 내 솜씨론 불가능하다네.”

“재료가 부족해서 그런 건가? 그거라면 얼마든지 대주겠다. 용광로 증축이 필요하면 증축도…….”

“…그래도 안된다네.”

“…그렇군.”

“…그렇지.”

방금까지 호탕하게 웃던 녀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녀석이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지금‘ 녀석의 솜씨론 불가능하다.

그럼 나중엔 된다는 건가?

아니면… 과거였다면 할 수 있었단 건가?

“…정말 못하는 건가?”

굳은 얼굴로 녀석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하룬이 고갤 떨구며 침음을 내뱉었다.

“…크읏! 역시 눈치 하난 빠른 친구라니깐.”

하룬은 머릴 벅벅 긁으며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난 그런 녀석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왕의 대장간’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왕의 대장간이라니! 아니. 그리고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 겐가!”

되려 역정을 내는 녀석의 모습에 속으로 고갤 끄덕였다.

왕의 대장간.

자이겔론의 왕국에 위치한 온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대장간의 이름이다.

오직 자이겔론드의 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대장간.

하룬도 전에 한 번 보긴 했을 거다.

자이겔론드의 후계자 선정식.

그 자리에서 하룬은 알루윈과 함께 후계자 자릴 놓고 시험에 놓였다.

전통적으로 대장간에 자리한 ‘왕의 망치’를 드는 게 후계자를 선정하는 방식.

하지만 그날 망치를 드는 데 성공한 건 하나가 아니었다.

하룬과 알루윈 둘 모두 망치를 드는 데 성공한 거다.

이따금 발생하는 이런 예외적인 경우엔 선대 왕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선대 자이겔론드의 왕은 두 아들에게 새로운 시험을 명령한다.

자이겔론드를 위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라.

그날.

하룬은 대장장이질을 위한 망치를 만들었고, 알루윈은 자이겔론드를 지킬 방패를 만들었다.

여기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터라, 결국 선대 왕은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다.

그러다 죽는 순간 하룬을 택했고…….

‘이렇게 된 거지.’

“원래 백작 쯤 되면 아는 게 많아진다구. 뭘 새삼스럽게.”

“끄응…….”

눈쌀을 찌푸리는 하룬이었지만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 내 오러 소드를 만들 순 없어도, 고치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네. 내 평생 한 번뿐이 본 적 없는 ‘왕의 대장간’이지만. 거기라면 충분히 가능할 걸세.”

“그렇군.”

“…설마 거길 찾아가겠단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절대 안 된다네!”

‘그렇지.“

“…이보게 이안! 정말 안된데도!”

지금도 알루윈은 눈에 불을 켜고 하룬을 죽이려 안달 나 있었다.

당장 하룬이 내 영지에 온 것도 알루윈이 고용한 암살단 때문이었고.

그리고 그 암살단이 바로…….

“이슬린.”

[네. 백작님.]

통신용 마법구에다 대고 외치자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바로 대장간으로 오도록.”

[네.]

짧은 대답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린이 쪼르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여기 이 친구에 대한 건 어떻게 마무리했었지?”

“일단 처음엔 임무 실패로 위약금을 지불했습니다만, 그 뒤로도 계속 새로운 의뢰가 올라왔는지 확인했습니다.”

“오호.”

역시 이슬린답게 일처리가 깔끔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 이후로도 대륙을 떠도는 드워프를 처치해 달라며 의뢰가 올라오긴 했습니다. 다만 다들 받아들이긴 해도 얼마 못가 실패 위약금만 내더군요.”

“흠… 의뢰가 계속 올라왔다는 건 하룬의 생사를 알고 있었단 건가?”

“그건 아닙니다. 의뢰에 따라 다르지만, 이 의뢰의 경우엔 대상의 위치를 찾는 것도 포함됐었습니다.”

“하긴. 매번 돌아다니는데 자이겔론드에서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려웠겠지. 그러니 의뢰금도 비쌌을 테고.”

“네. 덕분에 위약금도 쌨죠.”

가시 돋힌 듯한 이슬린의 말에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럼 그 뒤론 어떻게 됐지?”

“계속 의뢰가 올라오고 실패하는 클랜만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클랜들 사이에선 자이겔론드에서 거짓 의뢰를 올리는 게 아니냔 소문까지 돌았죠.”

“호오.”

“그러다 결국 아무도 의뢰 수주를 안 했고. 작년 이후론 새로 갱신조차 안 되더군요.”

“후후, 다행이군.”

애초에 하룬은 임페라 백작령에 꽁꽁 숨겨 둔 상태였다.

아티팩트를 만들어 파는 것도 모두 이슬린을 통해 뒷구멍으로 팔고 있었고.

의심?

당연히 받긴 했지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임페라 백작령이 워낙 다사다난해야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란 말도 있지 않나.

워낙 이슈가 많았던 영지라 아티팩트 몇 개 뒷구멍으로 파는 것쯤은 얘기도 안 나왔다.

오히려 베네르 백작가의 지하 금고에 있던 걸 조금씩 팔고 있단 소리까지 있었으니까.

하룬 밑에서 일하던 공방 직원들도 있긴 했지만, 모두 이슬린이 입단속을 철저히 해 놓은 뒤였다.

“그럼…….”

알루윈 녀석도 별다른 의심은 않고 있단 얘기였다.

오랜 기간 이토록 얘기가 안 나오고 있으니. 아마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여기가 뭐 21세기 초 대한민국도 아니고.

방랑객이면 돌아다니다 죽는 일은 부지기수다.

알루윈이 생각했을 때 하룬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렇다는 건 알루윈 입장에서 난 그저 평범한 타 대륙의 귀족.

즉, 소중한 고객이라는 거다.

“…….”

난 조용히 앞으로 있을 계획들을 하나 둘 그려 나갔다.

하지만 여기엔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더럽게 멀지.’

셀리버트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머나먼 거리.

애초에 자이겔론드 왕국은 이 대륙이 아니다.

대륙 끝자락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나오는 땅.

아마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이보게 이안.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일세! 대륙 반대편보다 더 먼 땅을 어찌 가려고!”

하룬도 이를 잘 아는 터라 한마디 했다.

하지만 괜찮다.

라크레시아가 고대인의 유물로 여기저기 난장판을 치고 있으면.

나도 지고만 있을 수야 없지.

지금은 소진된 고대인의 기술.

제아무리 고대인들의 기술을 잘 다룬다는 드워프들조차 쓸 수 없는 기술 하나.

‘공간 도약로.’

말 그대로 공간을 한순간에 도약하는 사기적인 기술이다.

그만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

‘지금 물 불 가릴 때도 아니고.’

어쩌면 공간 도약 기술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자이겔론드와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녀석들도 공간 도약 기술을 쓸 방법 때문에 눈에 불을 켤 정도였으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슬린은 또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내게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묘한 눈빛이 어려 있었다.

“어떡하긴.”

자이겔론드 왕국이라면 주인공 녀석에게 먹일 기연도 산더미처럼 있었다.

나로썬 언젠간 반드시 가야 했을 장소.

난 고갤 한 번 끄덕이곤 나지막이 말했다.

“가야지. 자이겔론드 왕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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