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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65화 (165/222)

165화

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눈앞에 위치한 석상은 분명 그 녀석이었다.

오베론 스테이라.

자길 찾아오라던 녀석이 왜 이런 상태로…….

“…백작님?”

그런 내게 함께 온 일행 녀석들이 달려와 물었다.

하지만 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어떤 미친놈이 오베론한테 ‘조화’를 쓴 거지?

오베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

조화.

체내의 모든 마나와 에너지를 뽑아내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조화시키는 마법이다.

극심한 마나 소모와 복잡한 술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한에 가까운 마나가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오로지 오베론만을 위한, 오베론만이 쓸 수 있는 독자적인 마법.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이를 정면으로 맞서는 광경이었다.

‘오베론이… 조화에 당했다고……?’

설마 자기한테 조화를 사용한 건가?

아니다.

그건 불가능했다.

체내의 마나를 뽑아내면서 극심한 마나 소모를 동시에 견뎌 낼 순 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라크레시아?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다.

라크레시아가 강자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대인의 유물을 통해 가능했던 경지.

아무리 녀석이 강하다 해도 오베론의 흉내를 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럼 대체 뭐지?

머릿속에서 소설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베론을 이 지경으로 만들 녀석은 떠오르지 않았다.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라크레시아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졌다.

지금 시점의 주인공?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이 녀석으론 불가능했다.

거기에 기사왕까지 봉인에서 깨어난 상황.

지금 내가 가진 전력만으론 녀석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제 끝이다.

온 대륙 사람들의 힘을 모은다 해도 카잔 황제의 잔당을 상대할 순 없다.

라크레시아가 가진 힘의 경지가 이 정도인 줄은 나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오베론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그럼 지금 하는 게 다 아무런 의미 없는 거 아닌가?

온 대륙을 상대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오베론.

그런 녀석보다 더 강한 놈이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 없는 게…….

그럼…….

“…작님!”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건 없다.

내심 오베론이 연합의 편에 다시 한번 서주길 바랐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당사자가 이런 돌덩이로 전락해 버린 상황이라면…….

“…백작님!”

“…어?”

누군가 어깰 세차게 잡아 흔든 덕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이슬린?”

굳은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는 이슬린.

그런 그녀의 옆에서 디아와 프리아나도 걱정스런 얼굴로 날 바라봤다.

“대체 이 석상이 뭐길래 그러는 겁니까?”

“이 녀석은…….”

프리아나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모습과 석상을 번갈아 봤다.

“…설마?”

이미 기사왕의 석상을 봤던 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는 듯했다.

이게 단순한 석상이 아니라 봉인 당한 어떤 사람이란 것 정도.

하지만 그게 누군진 꿈에도 모를 거다.

“…….”

이슬린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대충 눈치를 챈 듯했다.

“…백작님.”

“…이슬린?”

“부디 다음 명령을 내려 주시길.”

“…뭐?”

지금 이런 상황에서 명령을?

하지만 결연한 의지로 다져진 이슬린의 두 눈빛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 왔으니까요.”

“…….”

여기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이슬린.

지금껏 날 따르며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준 녀석.

그런 녀석이 내게 말했다.

조금은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날 믿고 있다고.

“…그래.”

이슬린의 말이 맞았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나도 정신이 잠깐 나가 있었나 보다.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 살아 남아온 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감.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함께 싸울 동료들이 있고, 저항할 힘이 남아 있었으니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렇습니다.”

이슬린은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아주 옅은 미소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백작님…….”

뭔가 심상찮음을 느낀 디아와 프리아나.

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곤 녀석들에게 석상의 정체에 대해 말했다.

“이건… 오베론이다.”

난 오베론의 석상에 손을 얹은 채 살짝 기댔다.

“…네?”

“…네엣?”

역시나 둘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니까.

게다가 그런 녀석이 석상 상태로 있단 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기사왕의 봉인을 봤던 터라 석상을 오베론이라 칭하는 미친 소리에도 수긍하고 있었다.

“대전쟁 이후로 왜 안 보이나 했더니만… 이런 곳에 있었군요.”

“아니다. 녀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최근이라 하심은……?”

“셀리버트 대숲림을 나왔을 때. 그때 당시만 해도 녀석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심지어 나보고 여기까지 찾아오라더군.”

“그런...!”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둘은 심각한 얼굴로 석상을 들여다봤다.

“그렇다면 오베론 님을 이렇게 만든 건…….”

“그래. 아마 라크레시아겠지. 그 녀석 말고 이런 짓이 가능한 놈은 없을 테니까.”

사실 라크레시아도 이런 짓까지 가능할 거라 생각은 못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니까.

“그럼… 이제 어쩌죠?”

녀석들은 나만 바라본 채로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다.

홀로 자포자기 한다고 끝나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날 믿고 따르는 이 녀석들.

그런 녀석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어쩌긴.”

난 눈을 한 번 질끈 감곤 대답했다.

“뭐라도 해 봐야지.”

“뭐라도라고 하심은…….”

“일단 주변을 살펴봐라.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녀석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넵!”

프리아나와 이슬린은 몰락의 성채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폐허나 다름없는 땅이었지만 혹시라도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젠장.”

난 석상 앞에 서서 작게 욕지거릴 내뱉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누가 날 이 세상에 끌어들인 건지, 그게 만약 오베론 당신이라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

하지만 석상은 아무런 말 없이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백작님?”

“…그래. 디아.”

멍하니 석상을 바라보고 있던 내게 디아가 다가왔다.

스릉!

그리곤 갑자기 철검을 뽑아 들었다.

“응?”

…서걱!

제 왼 손바닥에 상처를 내는 디아.

녀석은 피를 뚝뚝 흘리며 내게 물었다.

“이번에도…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요?”

“…후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걸 갸륵하다 해야 하나, 아니면 순진하다 해야 하나.

“한 번 해 봐라.”

“네!”

디아는 허겁지겁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석상에 흩뿌렸다.

“…….”

“안 되는군.”

하지만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기사왕의 봉인을 푸는 데 효과가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오베론이 조화의 해금 조건에 디아의 피를 섞었던 것뿐.

게다가 조화를 풀기 위해선 디아의 피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조화를 사용하면서 뽑아낸 마나를 다시 주입시켜야 하는데.

무한에 가까운 오베론의 마나를 다시 주입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죄송합니다.”

디아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추욱 늘어졌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덕분에 단서 하날 얻었는데.”

“네?”

“일단 네 피가 효과 없다는 걸 알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그런가요?”

“그래. 일단 잠시 생각 좀 해 봐야 하니 가서 둘을 도와라.”

“네!”

디아는 고갤 끄덕이곤 프리아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곤 셋이 같이 몰락의 성채 잔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

난 셋을 떠나보내곤 오베론의 석상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여기 라크레시아는 없다.

그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오베론마저 없어진 지금, 녀석이라면 우리 모두를 처치해 버리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오베론과의 싸움에서 큰 부상이라도 당했나?

그렇담 다행이다.

당분간 시간을 벌 순 있을 테니까.

게다가 아직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를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진 못 했을 터.

거기까지 마무리하려면 시간은 더 걸릴 거다.

그 안에 디아가 녀석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하나?

그게 가능할까?

디아에게 아직 남은 기연들을 죄다 먹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5년 정도 여유를 가지며 천천히 먹이려 했건만.

이렇게 된 이상 느긋하게 돌아다닐 여유는 없다.

거기에 주인공이 놓친 기연까지 더하고, 다른 이들의 성장까지 더해진다면…….

“…….”

그러면 조금은 비벼 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애들이 거기까지 따라 줄진 모르겠지만.

“…어?”

석상 앞에서 생각이 잠겨 있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석상 뒤편에 꽂힌 검 한 자루.

정확힌 반밖에 안 남은 붉은 도신뿐이었다.

“이게 뭔…….”

몰락의 성채는 과거 요새였다.

그러니 부러진 검 한 자루 있는 게 이상할 건 아니다만…….

‘이건 너무 깨끗한데.’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한 부러진 검 한 자루.

쑤욱!

땅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자 뾰족한 도신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부러진 상태에서도 타오를 듯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잠깐.”

검을 본 나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동시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검은 분명…….

‘하지만 이게 지금 시점에 있을 수가 없는데……?’

지금껏 외면해 왔던 혹시 모를 가능성 하나.

그게 그저 가설이 아닌 진실이라면……?

“백작님!”

“어……!”

난 황급히 반쯤 부러진 검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자 뭔갈 찾았는지 셋이 동시에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백작님! 이런 걸 찾았습니다!”

“저도요!”

“저도 찾았습니다.”

셋이 가져온 건 부러진 마법봉의 파편이었다.

한눈에 봐도 비교적 상태가 멀끔한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던 녀석 같았다.

“이건…….”

보통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였다.

마법사들은 기사들과 달리 무기가 필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법구나 마법봉을 쓰는 이유는 단순했다.

마나를 집중시키기 편하니까.

마법봉 끄트머리에 달린 마핵을 중심으로 마나를 그러모으고, 이를 마법으로 변환시켜 발사하는 방식이다.

마치 눈을 흩뿌리는 게 아닌, 눈덩이로 만들어 던지는 거라 생각하면 쉽다.

그럼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라면?

오베론마냥 숨 쉬는 것만으로 주변에 마나를 흐트러뜨리고 모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당연히 마법봉 같은 게 필요 없지.’

오히려 무기에 달린 마핵이 주인의 마나를 감당 못해 터지기 일쑤다.

때문에 오베론은 대전쟁 당시에도 거창한 마법봉을 들고 싸우지 않았다.

그저 단출한 나뭇가지 하나.

그게 오베론이 사용하던 마법봉이었다.

전장의 지휘자마냥 이 작은 마법봉 하나로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거다.

그리고 지금 이 셋이 가져온 건, 분명 오베론의 마법봉 같았다.

사라락.

부러진 마법봉을 한데 모아 이어 붙이자 다시금 제 모습을 되찾았다.

“오…….”

“…설마 그게 제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그래. 아마 오베론이 쓰던 마법봉 같은 거겠지.”

“오……!”

“…잘했다. 일단 이건 챙겨 두지.”

뛸 듯이 기뻐할 거라 생각한 거완 다르게 다소 밍밍한 반응.

덕분에 셋은 살짝 민망한 듯 입을 비죽 내밀었다.

“…잘했어. 다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아… 넵!”

미안하지만 이건 딱히 쓸모없다.

그야 거창한 마핵이 달린 마법봉이 아닌, 그저 잘 안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불과한 마법봉.

이런 건 오베론이 쓸 때나 쓸 만한 거지, 다른 사람들에겐 쓸데가 없다.

하지만.

내가 방금 발견한 부러진 붉은 도신 한 자루.

녀석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선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필요했다.

‘하룬.’

녀석에게 이 검의 정체를 물어본다면, 아마 내가 생각한 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리라.

“가자. 임페라 백작령으로.”

“네!”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몰락의 땅.

난 결국 발걸음만 더욱 무거워진 채로 씁쓸히 백작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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