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64화 (164/222)

164화

교황청을 수호하는 신의 대리인.

교황 주에른 4세.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이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알려진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이단 심문을 받던 이단 하나.

녀석은 곧 처형당할 예정이었지만, 라크레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풀려나게 됐다.

이를 교황과 신도들의 힘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교황은 라크레시아의 습격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물론 교황의 반격으로 라크레시아 또한 빈사에 가까운 상태로 겨우 도망치는 데만 성공했다.

언뜻언뜻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긴 했지만, 중요한 건 맥락이니까.

교황이 그간 드래곤 슬레이어를 가둬 두고 있단 사실도 알려져서 좋을 건 없고.

하필이면 내가 들렀던 타이밍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하마터면 난처한 상황에 빠질 뻔했지만.

마지막 순간 그가 대신관들 앞에서 해 준 말 덕에 불편해질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교황이 나서서 감사 인사까지 해 줬으니.

대신관들에게도 교황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런 그가 한 말은 죽어서까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왜 하필 내가 교황청에 왔을 때 일이 벌어진 건지.

난 대체 무슨 이유로 교황청에 들른 거지.

자잘한 이유는 다 묻히고 교황청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을 준 은인으로 남게 됐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신성 왕국에 위치한 트라이어스의 요새.

통칭 몰락의 성채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쿠르르…….

마차는 교황청을 벗어나 몰락의 성채로 나아갔다.

“…….”

몰락의 성채로 향하는 마차는 조용했다.

교황의 죽음을 보고 와서 그런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교황님의 장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 디아가 한마디 했다.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황이 죽었으니.”

“…그렇군요.”

왕이 죽어도 며칠간 이뤄지는 게 장례식이다.

하물며 종교를 믿진 않아도 온 대륙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나마 정신적 지주였던 교황. 주에른 4세.

주에른 3세에서 4세로 이어지는 그저 눈속임뿐인 장례식이 아니라, 교황의 이름 자체가 뒤바뀌는 진짜 장례식.

소설에선 주에른이 죽는 일은 없었던 터라 교황의 장례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관례에 의하면 제법 성대한 규모로 장례식이 열릴 듯했다.

“…….”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라크레시아를 막기 위해 순국한 교황.

녀석에게 대항할 이들의 마음을 모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니까.

“…나도 나쁜 놈 다 됐군.”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속이 더부룩해졌다.

과연 난 교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주신을 내세우곤 이단 심문이란 악마보다 더한 짓을 행한 악인?

아니면 이 망할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던 선인?

“…….”

소설로 수십, 수백 번을 봐 온 세상이었지만, 아직도 난 이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오베론.’

오늘 난 그자를 만나러 간다.

이 소설 속 최강의 사나이.

그리고 어쩌면.

‘나를 이 세상 속으로 끌어들였을지도 모르는 자.’

그게 가능할 만한 녀석은 오베론 말곤 떠오르지 않았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어쩌면 이 세상은 그저 죽어 가는 내가 떠올린 망상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지금 와선 단언할 수 있다.

여긴 진짜 사람들이 사는 또 다른 세상이라고.

[랭킹빨로 세계 정복!]이란 타이틀의 소설은, 단순한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누군가 겪고 실제로 존재했던 이들의 이야기.

그 너머엔 소설에 나오지 않은 수많은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살아온 난 확신한다.

이건 단순한 소설이 아닌 진짜 존재하는 세상의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아 발할라 시스템을 살피던 나.

난 그 최후의 순간에도 보지 못한 게 하나 있다.

이 소설의 최종화.

어쩌면 난 그걸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그럼 주에른의 세례를 받았을 때 본 것도 사실은 그게 아닐까?

이 소설의 최종화를 보고 난 눈물을 흘린 거라면…….

‘하지만 왜?’

소설의 최종화는 딱히 눈물을 흘릴 만한 게 없었다.

카잔 황제를 따르던 이들의 수뇌부도 디아의 손에 궤멸했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영겁의 기사단도 모두 죽었다.

남은 거라곤 카잔 황제의 유일한 아들 하나.

카잔 라크레시아.

이제 녀석의 숨통만 끊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는 라크레시아지만.

소설 속 라크레시아가 봉인에서 깨어나는 건 한참 뒤다.

이미 소설 속 주연과 조연들이 한참이나 더 강해진 뒤.

덕분에 라크레시아의 계획들 대부분이 주인공 디아의 손에 의해 저지당한다.

마지막 남은 거라곤 카잔 황제의 의식을 담은 고대의 유물 하나뿐.

‘그랬지.’

카잔 황제는 처형당할 당시, 광인마냥 초점 잃은 두 눈으로 처형장에 이끌려 간다.

공허한 눈빛으로 침까지 질질 흘려 가며 조용히 처형대로 올라선 카잔 황제.

이는 단순히 그가 충격을 먹어서가 아니다.

그의 온전한 의식은 이미 육신을 떠나 버린 뒤였으니까.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카잔 황제도 자신의 혼, 사념만을 추출해 고대인의 유물에 봉인 시킨다.

정확히는 봉인보단 보관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봉인된 카잔 황제의 사념 앞에서, 라크레시아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정확히는 디아의 검, 황혼이 라크레시아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카잔 황제의 봉인도 풀려나는 것처럼 묘사됐지만…….

하지만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카잔 황제의 사념이 깨어나도 문제다.

이미 주인공 일행의 손에 카잔 황제의 잔당들이 모두 처치된 뒤, 그런 상황에서 녀석의 사념이 깨어나 봤자 뭘 하겠나.

“…….”

하지만 만약.

내가 진짜 주에른의 세례식 때 본 게 이 소설의 최종화였다면?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 눈물을 흘린 거라면?

“크흠.”

난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며 디아를 흘긋 바라봤다.

‘…아니겠지.’

아무리 카잔 황제여도 그런 상황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순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게 지금 뭔 상관이겠나.

소설과는 아예 줄거리 자체가 크게 뒤틀렸는데.

“…그렇지.”

“네?”

괜히 내뱉어 본 혼젓말에 디아가 잘못 들었는지 되물었다.

“아니다.”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다.

오베론 스테이라.

자길 만나고 싶으면 몰락의 땅으로 오라던 그의 전언.

정확한 날짜까지 정한 약속은 아니었다만, 아마 녀석이라면 내가 몰락의 땅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타날 거다.

내가 소설에서 본 녀석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가 보자고.”

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중얼거렸다.

* * *

몰락의 성채.

카잔 황제란 거물의 목을 쳐 낸 역사의 땅.

처음 트라이어스의 요새에서 카잔 황제의 목이 떨어져 나갔을 때, 연합은 이 땅을 승리의 요새라 부르려 했다.

그간 연패를 거듭하던 연합은 누가 봐도 패배가 자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얻은 승리는, 값지다기보단 수치스러웠다.

마치 제 몸에 맞지 않는 명품이라도 걸친 것마냥.

모든 건 오베론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는 연합의 입장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

때문에 카잔 황제를 처형했을 당시엔 되려 호들갑 떠는 수준에 가까웠다.

어떻게서든 자기네들의 승리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고려되던 이름이 승리의 요새.

하지만 연합에게 승리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부서진 요새를 재건하려 할 때마다 일어나는 화재와 각종 사건사고.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카잔 황제의 망령이 외치고 있는 거라고.

이건 당신네들의 승리가 아닌 오베론에 의한 거짓된 승리라고.

덕분에 세월이 지난 지금.

트라이어스의 요새는 폐허에 가까웠다.

재건을 하다 만 요새는 뭐가 그리고 바쁜지 단 십수 년 만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젠 사람조차 살지 않는 버려진 땅.

연합의 사람들에겐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애초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요새기도 했고.

일단 지금은 북부인들과 연합을 이루고 있던 터라 전략적으로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였다.

“…….”

신성 왕국이 아니라 카잔 제국의 옛 영토라 해도 믿을 처참한 풍경.

그 안에 한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 엉덩일 걸터앉은 채로 주변을 감상하는 노인.

이는 영락없이 잠시 산책 나왔다 힘이 부쳐 쉬려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후.”

백발을 치렁치렁 흩날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는 노인.

어딘가 눈빛이 총명해보이긴 했지만, 세월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에 금세 묻혀 버렸다.

대체 뭔 이유로 이 황폐한 땅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보통 노인이 아니었다.

오베론 스테이라.

스테이라 마탑의 주인이자 이 세상 속 최강의 인간.

이미 인간이란 수식어 자체가 어색할 지경인 남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폐허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걸까.

오베론은 착잡한 얼굴로 약속 상대를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누군가가 몰락의 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십대 중반 즈음의 젊은 남자.

하지만 그의 눈빛에선 왠지 모를 세월이 흔적이 느껴졌다.

오베론과 약속이라도 한 걸까.

젊은 남자를 마주한 오베론은 손님의 등장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왔는가.”

“…….”

남자는 오베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그가 담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담긴 듯한 복잡한 심정의 눈빛.

남자는 한참을 응시하던 오베론을 향해 참아 왔던 이야길 꺼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지금까지완 사뭇 다른 말투에 오베론은 살짝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깨닫곤 상대를 향해 작게 말했다.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나.”

“…그렇죠.”

“그럼…….”

오베론은 자길 찾아온 젊은 남자, 카잔 라크레시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하려던 일을 마무리해라.”

그리곤 대전쟁 이후 단 한 번도 꺼내 들지 않았던 무기.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던 마법봉을 꺼내 들었다.

라크레시아는 그런 그를 향해 똑같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붉게 물든 도신을 가진 검.

옅게 떨리는 검 주위로 무색의 오러가 자라났다.

* * *

“여기군.”

한때 승리의 요새라 불리울 뻔했던 요새.

카잔이 처형 당한 뒤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고 듣긴 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상태는 더 심각했다.

“이건 뭐 빈민촌이 부촌으로 보일 지경이군.”

곳곳에 나뒹구는 폐건축 자재들과 뼈대가 훤히 드러난 기둥까지.

저주 탓에 사람들도 잘 들리지 않는 터라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으음….”

디아는 끔찍한 몰락의 성채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교황청에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 했을 때 이상하게 본 거군요.”

“그러게 말이다.”

뭐 일단 오긴 했으니 어쩔 수 없고.

그럼…….

“이 자식은 어디 있는 거지.”

“…이 자식이라심은?”

“아.”

생각해 보니 디아와 프리아나는 몰락의 땅에 온 이유를 몰랐다.

“…너넨 그것도 모르면서 조용히 따라온 거냐.”

“하핫! 백작님 가시는데 저희가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으음… 그렇긴 하지.”

이거 충성스럽다 해야 하나 별 생각이 없다 해냐 하나.

“그럼요. 하핫.”

디아도 프리아나를 따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프리아나는 원래 그랬다 쳐도 디아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자꾸 둘이 붙어 다녀서 그런가?

“뭐 아무튼. 여기까지 온 이유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다.”

“오… 백작님께서 이 먼 땅까지 만나러 오셨다는 건… 그분도 보통 분은 아니란 거군요.”

“후후, 뭐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베론이니.

“그럼… 어디 있는 겁니까? 그 약속 잡으셨다던 분은.”

“…그러게.”

오베론씩이나 되는 인물을 만나는 거다 보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오면 바로 짠! 하고 나타날 줄 알았는데.

“일단 주변 구경이나 좀 해 보자고.”

“구경이요? 쓰레기들 말곤 딱히 구경할게…….”

“음… 그렇긴 한데.”

난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몰락의 성채를 두리번거렸다.

이럴 거면 왜 만나자고 한 건지…….

“…잠깐.”

몰락의 성채가 가지고 있던 무너진 성벽.

개중에 조금은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성벽이 보였다.

주변보다 살짝 높이가 높은 성벽은 불룩 튀어나와 시선을 집중시켰다.

“…….”

난 뭐에 홀린 듯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럴수록 불룩 튀어나온 부분의 진짜 모습이 또렷해져 갔다.

성벽인줄 알았던 건 회색빛깔 바위였고, 평범한 바위는 알고 보니 누군가 깎아 만든 듯한 조각상이었다.

“…이런.”

마침내 조각상 앞에 선 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회색빛깔의 조각상.

이는 한 노인의 얼굴을 한 석상이었다.

그것도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노인의 얼굴을 한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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