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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63화 (163/222)

163화

파아앗…….

한때 신성 왕국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자.

그간 그가 지녔던 명성이 무색하게도 드래곤 슬레이어는 한 톨의 유해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끝…난 겁니까?”

“그래.”

…파각!

디아는 어깨 깊숙이 박혀 있던 창을 뽑아냈다.

구멍 난 틈새는 다시 빠른 속도로 메워졌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여길 법한 현상이었지만, 이미 출혈량이 상당했던 터라 옷가지까지 모두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덕분에 디아의 괴물 같은 치유력은 들키지 않았다.

“…….”

디아는 사라져 버린 드래곤 슬레이어의 빈 자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녀석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곤, 다시 날 바라봤다.

난 녀석의 눈빛에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오베론이 만든 실험체.

그간 그의 괴물 같은 치유력이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건지 깨달은 듯한 눈치였다.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겠지만.’

두두두…….

뒤늦게 신성 왕국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런 그들의 앞엔, 교황청의 대신관들과 이들을 이끌고 온 이슬린도 있었다.

오징어 마냥 불룩 솟은 독특한 모자를 쓴 대신관들.

놈들은 아수라장이 된 교황청의 모습을 보곤 경악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 게냐!”

대신관들은 주로 교황청 밖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청을 비울 수 없는 교황 대신 외부 업무를 도맡아서 하는 녀석들이니까.

“…백작님?”

이슬린은 주윌 두리번거리는 대신관들과 함께 내게 물었다.

난 대신관들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고갤 끄덕였다.

“방금 막 해치운 참이다.”

“해치우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성스러운 교황청에 적이 들이닥쳤단 소립니까?”

대신관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적이라.

적은 맞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존재는 대신관들조차 모르던 비밀.

오직 주에른 4세만이 알고, 연옥에 수감시켜 놨던 오베론의 실험체.

“…이단 하나가 탈출했나 봅니다.”

“이단……?”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드래곤 슬레이어란 단어 대신, 이단이라 둘러댔다.

“이단이 탈출하다니…….”

“설마 저번에 그 녀석이……?”

다행히 대신관들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지하 감옥에 수감 중인 이단들이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으음…….”

대신관들은 주변에 널부러진 신도들의 사체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개중엔 대신관들과 같은 급인 이단 심문관의 투구도 보였다.

내가 아무리 신의 시련이니 뭐니 좋게 포장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알 거다.

주신들의 시련이라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단 걸.

게다가 이를 막은 건 오로지 신도들만의 힘이 아닌 외지인, 그것도 신앙심이라곤 1도 없는 자의 도움이 컸다.

“…….”

난 침울해 있는 신도들을 향해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내뱉었다.

“…이게 모두 히테라교의 신도들이 가진 믿음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지.”

“믿음……?”

이슬린은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는 눈치다.

여긴 히테라 신도들의 영역.

신앙심은커녕 신성 랭크 1도 없는 내가 활약한 것보단, 신도들이 믿음으로 적을 무찔렀다 하는 편이 나았다.

단기적으론 우리들이 녀석을 해치웠다 하는 게 이득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엔 신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의구심을 갖게 될 거다.

이는 자연스레 신앙심의 소멸로 이어질 테고.

‘결국에 악을 멸한 건 신의 심판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 신앙심조차 없던 그들 아닌가?’라면서.

교황청을 우군으로 만들고 싶은 내겐 그닥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어윽!”

난 프리아나의 옆구릴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너도 빨리 한마디 해라.’

‘예? 그게 무슨…….’

뭔 소린지 이해 못하는 프리아나였지만, 대충 눈치까지 주자 어렴풋이 이해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백작님! 이게 다 신도들의 믿음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지.”

“그…렇군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던 대신관들이 고갤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신도들이 소환한 아기 천사들의 공격도 주효하긴 했으니까.

일단 그건 그렇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난 대신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교황청은 교황님의 부름에 응답한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그렇지요.”

“헌데 천사들이 나타나 이단을 심판하다 갑자기 사라지더군요. 혹시 이것도 교황님의 뜻입니까? 신도들의 신앙심을 돈독히하기 위한…….”

“…그럴 리가요!”

그제야 대신관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교황의 본 모습을 아는 건 오직 대신관들뿐.

24시간 교황청이 주에른 4세에 의해 감시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교황의 가호, 천사들이 사라졌다는 건…….

“…설마!”

대신관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황이 워낙 처참했던지라 대신관들도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천사들의 부재.

이는 곧 교황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어서 갑시다!”

“예!”

대신관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교황이 머물고 있는 참회의 방으로 달려갔다.

난 적당히 눈칠 보다 녀석들을 뒤따랐다.

“허억……! 허억……!”

대신관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대신관 자리까지 오르려면 절대적인 신앙심의 양이 많아야 하는데.

당연히 꼬부랑 할배에 가까운 나이여야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까.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노인네들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참회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도착한 13층에 위치한 참회의 방.

역시나 참회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리따운 천사는커녕, 입에 게거품을 문 남자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자는……?”

이단 심문관 텔레인.

녀석은 못 볼 거라도 본 생쥐마냥 얼굴이 창백히 질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런…….”

대신관들은 쓰러진 텔레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인식 저해 마법 같은 걸 당한 건지, 생명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안 임페라 백작. 미안하지만 잠시 나가 줬으면 합니다.”

“…왜죠?”

“그건…….”

…쿠르르!

대신관 하나가 날 내쫓으려던 그때.

참회의 방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날개 달린 천사들과 천사들에게 부축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입에는 이상한 호스를 끼우고, 전신에 난잡한 줄 같은 걸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노인.

저기서 저러고 걸어 나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신성 왕국에 수장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황청을 지키고 관리하는 교황청 최고위의 남자.

제0위계 최고위 신관.

교황 주에른 4세.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전신이 소금물에 절여진 오이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살아 있긴 했다.

“괜찮네. 그자는 이곳을 수호하기 위해 애써 준 자라네. 교황청의 은인을 내쫓아서야 되겠는가.”

교황을 부축하고 있던 천사가 말했다.

공허한 눈빛을 한 채로 애써 웃음 짓고 있는 아리따운 천사.

새액… 새액…….

여전히 교황은 입에 호스를 단 채 힘겹게 숨을 내쉬어 댔다.

이미 본인의 입으론 말조차 어려운지 천사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하고 있었다.

“교, 교황 폐하…….”

“후후. 이 모습으로 움직여 본 건 오랜만이구만.”

“…….”

대신관들은 교황의 모습에 고갤 푹 떨궜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난 서 있는 게 고작인 주에른 4세를 향해 물었다.

그 물음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 교황.

이미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노쇠한 육체.

그런 그에게 다친 데 없냐는 질문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잠시 자릴 비워 줄 수 있겠나.”

“하, 하오나 교황 폐하…….”

“내 교황청의 영웅에게 긴히 해 줄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걸세.”

“…예.”

대신관들은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영향력만으로 따지면 일국의 왕에 버금가는 대신관들조차 교황의 앞에선 한낱 평범한 신도에 불과했다.

“…백작님.”

“그래. 너희도 나가 봐라.”

“옙.”

난 내 일행 녀석들도 밖으로 내보냈다.

프리아나는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텔레인을 질질 끌고 다른 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탁!

이내 참회의 방문이 닫히고.

방 안엔 교황과 나 둘만이 남아 있었다.

“…후.”

교황은 힘겨운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말은 어려운 듯 그의 옆엔 천사 하나가 같이 앉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절그럭.

천사는 품 안에 갖고 있던 뭔가를 내게 건넸다.

“받게.”

“이건……?”

자그마한 철제 단검.

당장 밖에 대장간에 가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만 같은 평범한 단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교황이 그런 걸 줬을 리는 없었다.

“솔직히 궁금하긴 했지. 어째서 아이소테르의 백작이란 작자가 이 먼 교황청까지 찾아온 건지 말이야.”

“…….”

“물론 결혼이니 뭐니 하면서 넘어가긴 했지만. 자네의 속마음엔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예상도 했지.”

“그런…….”

교황도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교황청에 들른 걸 알고 있었던 눈치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어련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넘어간 거겠지.

“…하지만 방금 일로 자네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을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네.”

“싸움이라면…….”

“라크레시아.”

“…….”

“그자가 날 찾아왔더군.”

“그런…….”

난 교황이 건넨 단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범한 철제 단검.

하지만 늙은 노인네의 살점을 뚫고 생명을 앗아 가기엔 충분히 날카로운 무기였다.

“놈이 내 밀실로 찾아와 심장을 향해 단검을 내던졌다네.”

“…그런 것치곤 멀쩡해 보이시네요.”

“후후. 그렇지.”

교황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칼에 찔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겠지.’

“녀석의 단검이 내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했네. 정확히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

“하지만 그 순간. 검이 우뚝 멈춰 서더군.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가 했어. 그러면서 생각했지. 아직 주신님들께서 이 늙은이를 더 쓰고 싶어 하시는구나 하고.”

“…….”

히테라 주신들이 교황을 살리기 위해 기적까지 썼다.

사실 그건 말이 안 된다.

‘녀석’은 필멸자들을 위해 힘까지 쓸 작자가 아니니까.

“후후. 주신님들께서 한 게 아니란 걸 아는 눈치군.”

“그런가요.”

“…그래.”

교황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추욱 늘어졌다.

“자네 생각이 맞네. 그건 분명 신의 힘 같은 게 아니었어. 그저 평범한 마법이었지.”

“…마법.”

“오베론.”

“…….”

“내 밀실에 침입한 녀석이 중얼거리더군. ‘그 망할 마법사가 계속해서 훼방을 놓는다’고.”

주에른의 낯빛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의 가호라 생각했던 게 고작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대마법사에 의한 거였으니까.

나이로만 따지면 오베론보다 주에른 4세가 한참은 더 위였다.

둘 다 대전쟁 이전 사람이기도 했으니.

다른 이도 아닌 교황이 거기서 느낀 감정은 어땠을까.

감사?

아니다.

미치도록 쪽팔렸을 거다.

신의 가호와 풋내기 마법사의 마법조차 구분 못 한 거니까.

그러는 한편, 생각했을 거다. 과연 주신이란 분은 교황을 위해 뭘 했을까 하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교황의 신앙심에 균열이 갔다는 걸 의미했다.

“…이안 백작.”

“예, 교황님.”

파앗. 파앗.

교황의 곁을 지키던 천사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어느덧 그의 곁에 앉은 천사 하나만을 제외하곤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신관들을 불러 주게.”

“…네.”

난 서둘러 참회의 방문 앞에서 대기 중인 대신관들을 불렀다.

다시금 참회의 방으로 되돌아온 녀석들은 교황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대신관이라곤 하나, 어려서부터 주에른 4세의 보살핌 아래 살아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황 폐하!”

“후후…….”

교황은 힘겹게나마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이안 임페라 백작.”

“네.”

“오늘 일은 교황청을 대신해 감사하다 말하고 싶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에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천사도 힘을 잃고 사라졌다.

그는 입에 달고 있던 호스를 떼고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자네의 싸움. 내 응원하겠네.”

“…….”

“교황 폐하!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주에른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 대신관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나이 지긋이 먹은 대신관들이었지만, 교황의 마지막 순간 앞에선 어린아이마냥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 믿음이 부족해 이렇게 먼저 떠나겠네.”

“교황 폐하!”

그는 그렇게 마지막 한 마딜 끝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던 고갤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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