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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62화 (162/222)

162화

교황의 부재.

그것만으로 힘의 축은 드래곤 슬레이어 녀석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녀석도 결국엔 오베론이 만든 실험체 중 하나.

이를 적절히 이용만 한다면 제압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물론 거기까지 갈 순 있을지가 문제지만.’

난 주변에 흩날린 신도들의 옷가질 챙겼다.

콰아악!

그리곤 용린검을 쥔 손을 단단히 동여맸다.

“…아!”

프리아나와 디아도 이를 보곤 나와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지금 드래곤 슬레이어에겐 검이 없다.

여기서 검까지 빼앗기면 안 그래도 암울한 상황이 더 암울해진다.

“이슬린.”

“네, 백작님.”

“넌 지금 바로 도개교 쪽으로 가라. 보아하니 교황도 상태가 맛 간 거 같으니. 지원군이라도 불러야지.”

“…네!”

이슬린은 고갤 끄덕이곤 서둘러 지원군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다.

신성 왕국의 지원군이 오는 게 먼저인지, 아님 드래곤 슬레이어한테 교황청이 박살 나는 게 먼저인가 하는.

난 교황청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녀석과 거릴 벌리십시오!”

구리 가면을 쓰곤 있었지만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던 교황청의 병사들.

일단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신앙심을 뽑아낼 자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 그게 무슨……?”

“…모두 물러서라!”

처음엔 저게 뭔 소린가 하던 녀석들도 있었지만, 개중에 좀 영리한 병사들은 부상자들을 이끌고 적과의 거릴 벌렸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긴 했지만, 처음 놈이 튀어나왔을 때보단 다들 눈빛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난 그런 그들을 향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길 시작했다.

“…이건 주신님께서 내려 주신 시련입니다!”

“시련……?”

“앞으로 다가올 고난을 대비하기 위한 시련 말입니다!”

“…….”

“적을 보십쇼! 고작해야 무기 한 자루 없는 비루한 몸뚱이뿐!”

“그런…….”

“고작 이런 작은 시련 따위에 굴하실 겁니까! 당신들의 신앙심이란 고작 그런 거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모두 그 손으로 무기를 드십시오!”

“하, 하지만 저 녀석은…….”

이미 당해 버린 동료들의 모습에 한 병사가 두려운 듯 물었다.

이단 심문관들조차 칼침 한 번 못 놓고 죽여 버린 상대니까.

“당신들에게 무기는 하찮은 쇳덩이였습니까? 아님 주신님들을 향한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제서야 광신도들은 다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기 시작했다.

절망과 신앙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릴수록 사람은 절망한다.

여기서 끝나는 이들도 있는 한편, 의지할 새로운 존재를 찾는 이도 있다.

그게 바로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믿음.

신앙심이다.

파아앗!

사그라들던 빛이 다시금 교황청 병사들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

이를 본 키르엔의 미간이 뒤틀렸다.

잘그락!

녀석은 주변에 죽어 있던 병사들의 창을 그러모았다.

창으로도 오러를 발현시킬 순 있지만, 그래도 검을 든 것만큼은 못…….

쐐액!

“으왓!”

녀석의 손을 떠나기 무섭게 맹렬한 궤적이 미간을 노리고 들어왔다.

놈의 손을 보고 피한게 아니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었을 공격이었다.

“이 자식이!”

프리아나와 디아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둘의 검이 녀석이 든 창 양끝에 가로막혔다.

푸른색과 무색으로 빛나는 오러 소드가 단단한 창에 틀어막혀 묵직한 소음을 내뱉었다.

“크윽……!”

본디 쓰지도 않던 무기인 창.

게다가 지금 당장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을 두 기사의 협공.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명을 박살 내기엔 살짝 부족했다.

“….”

그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둘을 응시하는 드래곤 슬레이어.

지난번 아도르네이 후작령에서 상대한 오베론의 실험체와는 결이 다르다.

그때의 녀석이 원하던건 그저 평범한 인생.

때문에 녀석의 정신은 자그마한 충격에도 무너져 내려 스스로 삶의 의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눈 앞의 이 녀석은 다르다.

20년 넘게 연옥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카잔 황제를 향한 충성심 하나만으로 버텨 온 진짜 미친놈.

난 소설에서 녀석이 나오던 대목을 떠올렸다.

라크레시아에 의해 연옥의 봉인이 풀린 드래곤 슬레이어.

녀석은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못다한 일을 마무리하라.]

‘그랬지.’

그럼 못다한 일이 마무리되기만 하면 끝이다.

오로지 그것만으로 20년 넘게 연옥에서 버텨 온 놈이니까.

‘문제는 그걸 믿느냐는 건데.’

일단 녀석을 제압하는 게 먼저다.

콰드득!

동시에 놈의 다리 쪽에서 나무 뿌리가 튀어나와 엉켜 들어갔다.

갑작스레 쏟아진 마법 세례에 녀석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하압!”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프리아나가 검을 내질렀다.

이미 빈트하겐과 숱한 대련으로 랭크 7을 목전에 두고 있던 프리아나.

녀석의 재빠른 검격에 그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가슴팍이 꿰뚫렸다.

“하! 싱겁…….”

“물러서라!”

서걱!

가슴팍을 꿰뚫린 드래곤 슬레이어.

하지만 녀석은 고작 그런 걸로 죽지 않았다.

놈은 심장을 꿰뚫린 채 몸을 비틀었다.

프리아나의 검은 그대로 녀석의 살점을 뚫고 어깻죽지로 빠져나왔다.

덕분에 움직임에 자유가 생긴 녀석은, 너덜거리는 팔로 창대를 크게 휘둘렀다.

퍼억!

“커헉!”

창대는 보기 좋게 프리아나의 목덜미에 명중했다.

기괴한 소릴 내며 틀어진 녀석은 그대로 뒤로 나뒹굴었다.

“크윽…….”

다행히 몸 하난 튼튼한 녀석답게 그걸로 죽진 않았다.

대신 오른쪽 승모근이 크게 부푼채로 프리아나가 비틀거렸다.

“어, 어떻게……?”

“흐흐! 저런 놈 한두 번 보나?”

프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슬쩍 디아를 쳐다봤다.

디아도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둘다 전의를 상실하진 않았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이들에게 드래곤 슬레이어의 회복력은 익숙한 편이었다.

“이 정도는 돼야 상대할 맛나죠!”

“좋아!”

다시금 둘의 공격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검격.

녀석은 얇은 창 한 자루로 이를 계속해서 막아 냈다.

아직 창엔 익숙치 않은 듯 오러가 언뜻언뜻 어려 있는 녀석의 창.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창대에 깃든 오러는 더욱 선명해지고 강해졌다.

“…디아! 놈의 움직임을 막아라!”

“네!”

디아는 지체 없이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질세라 매서운 창격이 디아의 어깨 쪽을 노리고 들어왔다.

피하거나, 받아쳐 내라.

그 틈에 프리아나의 공격을 받아 낼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콰드득!

“……?”

창은 그대로 디아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끔찍한 격통에 디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디아는 어깨를 파고 든 창대를 단단히 붙잡은 채 버텼다.

“…….”

놈이 서둘러 창대를 뽑아 보려 했으나 디아는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틈에 프리아나가 녀석의 허벅다릴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저 움직임을 멈추기 위한 협공.

이에 질세라 나도 녀석을 향해 마탄을 퍼부었다.

콰콰콰콰……!

순식간에 쏟아진 마탄은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살갗이 드러나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녀석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하. 거참 질기네.’

보통 이만하면 포기할 법한데.

녀석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창대를 뽑아내려 애썼다.

“어엇……!”

어깨에 창이 박힌 디아의 몸뚱이가 천천히 떠올랐다.

뽑히질 않으면 꽂혀 있는 채로 휘두를 생각인 듯했다.

“…신의 이름으로!”

“…악을 멸하리라!‘

난데없이 들려오는 고함.

이는 한발짝 물러나 있던 교황청 병사들의 목소리였다.

“주여!”

다른 일반 신도들까지 가세한 이들은 하나 된 마음으로 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꽤나 많은 이들의 기도가 모여 형상화된 신앙심 그 자체.

허공에 무수히 많은 아기 천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마다 조막만한 활과 화살을 든 아기 천사들은, 옛 설화에 나오는 사랑의 아기 천사 같은 모습을 띄고 있었다.

교황이 아닌 일반 신도들의 신앙심이 모여 소환해 낸 자그마한 천사들.

교황이 소환한거에 비하면 한참은 못 미치겠다만, 그래도 명색에 천사인지라 제 몫은 해냈다.

두두두두!

수많은 아기 천사들의 손에서 자그마한 화살이 쏟아졌다.

지금 상대가 전직 기사단장이라 그렇지, 이만한 수의 천사들이 내지른 화살에 멀쩡할 놈은 없었다.

교황청 내부를 가득 메울 만큼 쏟아진 화살 세례는 그대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날아갔다.

“으읏!”

창에 꽂힌 채 녀석의 움직임을 막고 있던 디아.

놈의 허벅다리에 검을 찔러 넣었던 프리아나.

둘 모두 녀석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터라 화살의 범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하지만 이는 신이 악을 향해 내리는 처벌.

아무런 죄 없는 둘에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밝게 빛나는 화살은 그대로 둘의 몸을 통과 하곤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명중했다.

콰과과과!

무수한 화살 세례에 그대로 적중한 녀석은 한 마리의 고슴도치마냥 온몸에 밝은 빛의 화살을 맞고 말았다.

“…….”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신기했지만, 녀석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로 주윌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압도된 상황 속에서도 주인의 명을 따를 길을 찾고 있었던 거다.

그 처절한 모습에 끔찍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불쌍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옛 주인의 망령에 아직까지 고통스러워하다니.

어느새 움직임을 봉인 당한 녀석.

이제 놈에게 알려 줄 차례다.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하울 키르엔.”

“…….”

키르엔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무의미한 옛 주인의 명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그의 명령대로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는 죽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은 건 아니지만.

“그리고 카잔 황제도 죽었다.”

“…….”

“영겁의 기사단도 궤멸했고.”

“…….”

“네가 라크레시아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다 끝이다.”

“…….”

아무런 말도 없는 하울 키르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그럼 이제 난…….”

녀석은 분한 듯 고갤 떨궜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한편으론 녀석이 간절히 원하고 있을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제 넌 자유다.”

“…자유.”

연옥에 갇혀 있던 그가 수없이 원해 왔던 단어 한 마디.

자유.

“이제… 그만 놓으시죠.”

디아는 키르엔의 창에 꿰뚫린 채로 나지막히 말했다.

디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다.

죽지도 못한 채 현생에 얽매여 있는 키르엔과 디아 자신이 어딘가 비슷하다고.

“…….”

키르엔은 디아를 찌르고 있던 창에 힘을 풀었다.

놓으란게 창대를 놓으란 소린 아니었겠다만.

키르엔은 창에 꿰뚫린 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선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쩌면 옛 주인의 얼굴을 묘하게 닮은 디아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받는 걸지도.

“…….”

파아앗!

이내 녀석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곤.

…펑!

마치 몬스터가 퇴치 당할 때처럼.

한때 드래곤 슬레이어란 이명까지 가지고.

대전쟁의 판도를 바꾸기까지 했던 남자는 먼지바람이 되며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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