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텔레인은 교황, 정확히는 천사의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주에른은 눈꼬릴 파르르 떨며 텔레인의 안마를 감상했다.
매끈한 천사의 목덜밀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불순한 마음이 샘솟을 법도 했지만, 텔레인은 신앙심 하나로 똘똘 뭉친 남자다.
심지어 다른 이도 아닌 교황의 정신이 깃든 천사의 육체에 흑심을 품을 순 없었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교황의 피로를 풀어 주려 혼신의 힘을 다 해 안마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딱 좋군요.”
“어깨가 많이 뭉치신 것 같습니다. 잠시 쉬시는 게…….”
“후후. 그래 봐야 제 몸도 아닌 걸요. 쉰다고 뭐 달리지겠어요?”
“그렇군요.”
토도도도…….
텔레인은 손날을 만들어 주에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방금 찾아온 손님들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교황 폐하의 고견을 여쭤봐도 될까요?”
“어떻게 하다뇨?”
“이안 임페라 백작 말입니다. 여러모로 위험한…….”
“후훗.”
주에른은 텔레인의 걱정스런 말에 되려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는 자더군요.”
백살을 훌쩍 넘긴 그였던 터라, 손주의 재롱에 귀여워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일단은 겉모습이 아리따운 천사였던 터라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듯한 말이었다.
“하오나… 그자의 행보는 도무지 상식 밖의 일입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몰락해 가던 가문의 공자였던 자가…….”
“그래서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텔레인도 승진가도를 달릴 수 있었구요.”
“그…건 다 주신님들의 은혜라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후, 아무렴요.”
텔레인은 이안 임페라가 신경 쓰였다.
어쩌다 보니 그와의 일은 좋게 좋게 끝나긴 했지만, 한때 그를 이단 심문대에 올리려 했던 사이니까.
게다가 불과 몇 년 만에 아이소테르를 꿰찬 것도 수상했고.
“가끔은 그 남자처럼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그런 걸 뭐라 하는지 아시나요?”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뜻.”
“하늘의 뜻이라 하심은…….”
“그가 몰락할 뻔한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 낸 것도, 아이소테르의 대공 자리에 오르는 것도. 모두 하늘에 계신 주신님들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 그런…….”
“그럼 우리 같은 필멸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그게 주신님의 뜻이라면. 따라야겠지요.”
“역시 텔레인이에요. 어려서부터 영특하더니, 지금도 변함 없군요.”
“저, 절 어려서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후후. 교황청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교황이 모르는 건 없답니다. 혹시 기분 나쁜가요?”
“그럴리가요! 오히려 영광일 따름입니다. 교황 폐하.”
“후후.”
교황청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교황이 모르는 건 없다.
이건 사실이었다.
지금도 교황청 곳곳에 주에른의 정신을 담은 눈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으니까.
교황청 건물 전역이 곧 교황 그 자체인 셈.
지금도 제1형 천사를 소환해 띵가띵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교황 전역을 빠질 틈 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심지어 교황청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연옥까지도.
“…….”
주에른은 텔레인의 안마를 받으며 연옥에 갇힌 드래곤 슬레이어를 바라봤다.
오베론이 버리고 간 최초의 실험체.
마음 같아선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무리 죽여도 되살아나는 놈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옛적에 죽은 카잔 황제를 떠올리는 탓에 정신도 잘 붕괴되지 않았다.
때문에 언젠가 녀석이 스러지길 바라면서 교황청 가장 깊은 곳에 녀석을 처박아 뒀다.
‘어쩌다 저런 괴물이 나온 걸까.’
녀석은 주신이 아닌, 오베론이 만든 생명체.
주신을 섬기는 교황의 입장상, 드래곤 슬레이어는 혐오스러운 생명 그 자체였다.
하루라도 빨리 녀석이 죽길 바랐지만, 이것도 나름 고행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며 녀석을 가두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내려가…….”
어깨 결림이 거의 다 나은 터라, 주에른은 텔레인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어두컴컴했던 연옥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뭣?”
“…교황 폐하? 무슨 불편하신 거라도…….”
설마 침입자가?
하지만 침입자가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다.
대체 언제……?
쿠르르…….
교황이 머무는 참회의 방까지 옅은 소음이 일었다.
갑작스런 소음에 텔레인이 고갤 갸웃했지만, 교황은 연옥에 심어 둔 천사의 눈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음의 원인을 보고 있었다.
“지진……?”
쿠르르……!
작았던 소음은 이내 옅은 진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럴수록 주에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연옥의 불이 켜지고 고작 수 분.
그 짧은 시간만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지고, 굳게 봉인되어 있던 연옥이 무너졌다.
쿠르르!
“교, 교황 폐하! 이게 대체 무슨……?”
텔레인은 교황을 향해 물어보다 흠칫했다.
붉게 충혈된 두 눈.
그 주위로 힘줄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주에른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텔레인이었지만, 분노한 천사의 모습에 오금이 저려 왔다.
“허억…….”
하지만 주에른은 아직 분노한 건 아니었다.
다른 천사들을 소환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얼굴에 힘이 조금 들어간 것뿐.
교황청 1층에 천사들의 소환을 마친 주에른은 깨어난 드래곤 슬레이어의 힘에 살짝 놀랐다.
첫해에 벌어진 탈출 시도를 이후론 별다른 저항도 없이 조용히 연옥에서 지내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굳이 녀석을 교황청 지하에 놓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여기라면 아무리 강한 놈이라 해도 주에른의 힘만으로 찍어 누를 수 있어서다.
[두려워 말라.]
“아…….”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주에른의 목소리.
텔레인은 그런 교황의 성스럽고 자애로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교황청을 위해 힘써 주시는 교황 폐하를 향해 두려움이란 감정을 품었다니.
“주여!”
텔레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교황의 압도적인 무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음 하는 마음.
실로 광신도다운 모습이었지만, 주에른에겐 갸륵한 신도의 모습일 뿐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봉인이 풀린지 겨우 수 분.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곤 하나, 그 많던 이단 심문관들 대부분이 단 한 녀석의 손에 신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교황은 슬퍼하지 않았다.
모두 주신님의 곁에서 더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영원히 누릴 테니까.
[…놈!]
연옥을 뚫고 나온 드래곤 슬레이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도 교황청 안에선 한낱 하찮은 존재일 뿐.
제4형 거천사까지 나서자 결국 녀석도 제압되고 말았다.
금강석조차 반으로 쪼개 버린다는 거천사의 악력.
그 괴력을 온몸에 받아 버린 드래곤 슬레이어는 그렇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녀석에게 적절한 심판을 내리는 것뿐.
주에른은 꽉 잡은 거천사의 두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녀석을 고기 경단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주에른 4세.
그는 교황이다.
히테라교의 교주이자, 히테라 주신들과 이어진 단 하나 뿐인 신의 대리인.
그의 영역은 곧 주신들의 영역.
이를 어지럽히려 한 자는 신의 심판이 내려질지니.
“지랄하고 있네.”
“…뭣?”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주에른이 고갤 들었다.
하지만 제1형 천사의 주위에도, 치천사, 거천사의 주위에도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신의 심판? 크큭!”
“서, 설마……?”
참회의 방에서 천사들을 조종하고 있던 주에른.
그의 진짜 육체는 참회의 방 너머 숨겨진 밀실에 숨겨져 있다.
그 어떤 이들도 들를 수 없게 강력한 결계를 수겹이나 쌓아 놨다.
누구도 이 영역엔 발을 들일 수 없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잔뜩 노쇠한 주에른의 본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오랜 세월, 거의 십수 년은 떠 보지도 못했던 눈꺼풀이 움직이자 강렬한 격통이 동공을 타고 전해졌다.
희뿌연 실루엣 너머 진짜 주에른이 마주한 건.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네, 네놈은……?”
대체 뭘까.
교황청에서 아무런 낌새도 없이 자신의 밀실로 침입할 수 있는 존재라니.
“뭐긴.”
남자는 씨익 웃으며 누워 있던 주에른의 몸뚱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런 그의 손엔 자그마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주에른의 주위로 온갖 천사들이 소환됐다.
얼른 침입자를 배제하고, 위험해 보이는 저 단검을 치워 버려야 했다.
제아무리 교황청의 주인이라곤 해도, 육신만큼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 침입자가 더 빨랐다.
“신의 심판이지.”
…툭!
자그마한 단검이 침입자의 손을 떠났다.
예리한 날을 시퍼렇게 번뜩이는 단검은, 그대로 주에른의 심장을 향해 떨어졌다.
* * *
파아앗…….
치천사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거천사의 손아귀에서 꿈쩍도 못하던 키르엔.
하지만 치천사의 정신 제압 스킬이 사그라들자 상황은 급변했다.
…콰드득!
거천사의 손에 균열이 일었다.
한시라도 빨리 치천사의 정신 제압 스킬이 쏟아져야 했지만.
우우웅.
치천사들은 꺼진 로봇마냥 고갤 추욱 늘어뜨렸다.
정신 제압에서 자유로워진 드래곤 슬레이어.
그 뒤로 녀석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콰앙!
단단한 거천사의 손이 산산조각 났다.
사방으로 잘게 튄 거천사의 파편.
그 바람에 주변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던 신도들이 휩쓸려 나갔다.
“끄아악!”
절망적인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교황이 정신 차리고 제5형 대천사를 소환해 준다면…….
…스륵!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치천사들이 허공에 나타난 균열을 통해 빨려 들어갔다.
“이런…….”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프리아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이해조차 가지 않은 듯했다.
지하에서 튀어나온 저 괴물은 뭐며, 천사들은 왜 잘 싸워 주다가 사라지는 건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의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교황청의 천사들은 곧 교황 그 자체.
이는 교황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 놈은 라크레시아 말곤 없다.
하지만 소설에서도 라크레시아는 교황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야 녀석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교황의 밀실에 새겨진 결계들은 라크레시아라 해도 함부로 풀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천사들마저 사라지자, 뒤늦게 부랴부랴 교황청의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에 구리 가면을 쓴 채 창을 꼬나쥐곤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녀석들의 손은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더 끔찍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스르륵…….
교황청 병사들의 몸 주위로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꺼져 가는 반딧불이마냥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는 신성 랭크가 감소하고 있을떄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교황청 지하에서 나타난 정체 불명의 괴한.
녀석은 시작부터 이단 심문관의 머리통을 집어 던지며 등장했다.
게다가 교황청을 굳게 지키던 천사들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금.
아무리 광신도라 해도 신앙심이 사라지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도, 도망쳐!”
“꺄아악!”
병사들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드래곤 슬레이어와 맞설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도들은 달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거천사의 파편에 수많은 신도들이 갈려 나가 죽어 버렸다.
나름 고르고 고른 히테라교의 신도들이었지만,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자 헐레벌떡 도망가기 바빴다.
병사들이 힘겹게 녀석을 마주하고 있긴 했지만, 이들도 신앙심을 잃거나, 죽어 버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설마 교황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뒤늦게 상황 파악이 끝난 프리아나가 경악하며 말했다.
아마 그럴 거다.
교황청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버텨 주던 주에른 4세.
그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교황청의 수호신이 사라진 지금.
신의 빈자릴 채워야 하는건 결국 사람이다.
“…검부터 뽑아라. 프리아나.”
자세한 사정은 놈을 제압하고 난 다음에 들어도 늦지 않다.
더 이상 신도들이 신앙심을 잃기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