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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59화 (159/222)

159화

“…….”

이곳에 갇힌 지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이 지난 걸지도 모른다.

사방에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풍경에 시간 세는 걸 잊은 지가 벌써 한참 전이니까.

“…….”

내가 여기 왜 갇혀 있는 거였지?

어느새 그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라리 죽으면 편할까?

“…….”

아니다. 아직 난 죽을 수 없다.

하지만 왜?

왜 죽으면 안 되지?

“…….”

그래. 이건 속죄다.

속죄이자 처벌이다.

주군의 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자라, 결국 주인을 파멸시킨 죄인을 향한 처벌.

“…….”

그럼 이 처벌은 언제 끝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끝이란 게 있는 걸까?

“…거기 누구 있소?”

다시금 목소릴 내뱉어 본 게 얼마만일까.

쇠를 긁는 듯한 끔찍한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대답은 없었다.

[잘 지냈나.]

“……?”

내가 헛소릴 듣는 건가?

충분히 그럴 만했다.

최근 들어 환청이 잘 안 들리긴 했으니까.

[이건 환청 같은 게 아니다.]

“…….”

어찌 보면 환청답다고 해야 하나.

자기가 환청이 아니라니.

[아무리 만들어진 블랭크라 해도 정신이 붕괴하는 건 못 막는 건가?]

“뭐라……?”

[아니지. 오히려 그럴수록 정신이 붕괴하긴 쉽다고 해야 하나.]

파앗!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던 주변이 별안간 밝아졌다.

“크윽…….”

두 눈이 타 들어갈 것만 같은 통증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 망할 몸뚱이는 다시금 제 기능을 회복시켰다.

탁… 탁… 탁…….

수십 년간 죽어 있던 두 눈이 점차 빛을 되찾았다.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 주위로 흐릿하게 초점이 맞아 갔다.

회색 빛깔 벽돌로 이루어진 돌바닥.

잊혀진 기억 저편에 감옥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껏 이런 공간에 갇혀 있었구나.

“정신이 드나?”

“넌……?”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짝!

“윽!”

환각이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촉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건 환청도, 환각도 아니다.”

“넌…….”

내 뺨을 후려친 남자.

그건 환각 같은 게 아니었다.

녀석은 하얗게 센 머리를 한 채로 소름끼치는 미소를 내보이고 있었다.

“네놈의 주인이지.”

“주…인……?”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가 갸웃했다.

하지만 왠지 그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주인.

차마 지키지 못했던, 온갖 모멸과 핍박 속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분.

“황제… 폐하……?”

나지막이 내뱉은 그분의 존함에 녀석은 흰 이를 드러낼 정도로 크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놈의 황제가 명령한다.”

“부디… 명령을…….”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곤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이명을 읊조렸다.

“…드래곤 슬레이어.”

* * *

“히야! 이거 진짜 신기한데요?”

프리아나는 허릴 빙글빙글 돌리며 신나 했다.

“…….”

디아는 그런 프리아나를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자긴 세례를 못 받은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다.”

“…넵.”

애써 괜찮은 척해 봤지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진 못했다.

이거 괜히 말렸나?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냥 일반 신관도 아니고 교황이 내려 주는 세례다.

그럼 일순간이나마 주신과 만나 버리고 말 텐데, 만들어진 블랭크가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네들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라며 지워 버릴지도 모른다.

오베론이 신에 필적할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주신들도 결국엔 신이니까.

“쯧.”

그러게 왜 사람 같은 걸 막 만들어서.

당장 이 교황청 지하 깊은 곳에 갇힌 녀석도 그렇다.

‘왜 멀쩡히 죽은 사람을 살려 가지고.’

이왕 살릴 거면 끝까지 책임이라도 지든가.

그렇게 대책 없이 버리고 가 버리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다.

“…….”

교황청 가장 깊은 곳에 버려진 한 존재.

지금껏 디아가 생고생하면서 살아오긴 했지만, 그 녀석에 비하면 양반이다.

녀석은 대전쟁 이후 20년 넘게 어두컴컴한 연옥에 홀로 수감되어 있었으니까.

심지어 이단 심문관이 아니라면 그의 존재를 아는 이도 없었다.

대부분의 교황청 사람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교황청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연옥.

이단 심문관들도 교황의 명령에 따라 그를 수감하고 있기만 한 거지,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선 몰랐다.

오로지 주에른 4세만이 알고 있는 그의 진짜 정체.

사실 연옥에 수감되기 전까지만 해도 꽤나 유명했던 놈이다.

진짜 이름보단 수많은 이명으로 유명한 녀석.

배신의 기사단장.

드래곤 슬레이어.

그리고.

‘…오베론이 만든 최초의 실험체.’

여러모로 사연이 많은 녀석이다.

이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시작이기도 하고.

후에 라크레시아가 녀석의 봉인을 풀어 주긴 한다.

하지만 여긴 교황청.

제아무리 라크레시아라 해도 신의 힘을 가장 충만하게 머금은 이 땅을 마음대로 농락할 순 없었다.

라크레시아는 고대인의 유물을 통해 강해진 거지, 따지고 보면 오베론처럼 랭크 9에 도달한 건 아니니까.

녀석을 풀어 주곤 나 몰라라 도망쳐 버린 덕에 결국 얼마 못 가 교황에게 제압당하고 만다.

그렇게 교황청의 시선을 돌린 틈에 신성 왕국을 향한 습격을 성공시킨다.

성동격서라 해야 하나.

끝까지 이용만 당하는 불쌍한 녀석이다.

처음엔 카잔 황제에게 이용당하고, 오베론에게 이용당하다가, 최후엔 라크레시아에게 이용당하는.

“백작님.”

“…아. 그래.”

잠시 딴생각을 하다 이슬린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몰락의 성채에는 언제 가실 예정이십니까.”

“뭐… 내일 바로 가야지. 세례도 받고 했으니.”

“그럼…….”

이슬린은 허릴 빙빙 돌리고 있는 프리아나와 살짝 풀이 죽은 디아를 흘긋 쳐다봤다.

“아.”

둘에겐 아직 이 여정의 목적이 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프리아나는 아직 외골수 기질이 있는 터라 말해 주기 좀 그랬고, 디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베론이 만든 생명체였기에 함부로 말해 주기 꺼려졌다.

차라리 둘은 교황청에 있으라 하고 몰락의 성채엔 나랑 이슬린만 가는 게 나을지도.

“…디아.”

“네. 백작님!”

풀이 죽어 있던 녀석은 이름을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시키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음… 그건 아니고.”

난 녀석에게 충성심의 대가로 디아가 가진 비밀을 알려 주기로 했다.

슬슬 비밀 보따리 하나를 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자 그게 뭘 의미하는지 깨닫곤 녀석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아나?”

“드래곤… 슬레이어?”

디아는 난데없는 이야기에 고갤 갸웃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먼 과거 영웅전에 간간히 나오던 이명이다.

랭크 8의 괴물들에게 드래곤은 인간을 초월하기 위한 최후의 관문 같은 느낌이다.

때문에 지금껏 수많은 랭크 8들이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해 도전했고.

대부분이 실패했지만 성공한 녀석도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랭크 9가 된 건 아니었지만.’

드래곤의 수가 상당히 드문 데엔 이런 이유가 한몫했다.

당장 탈리스도 블루 드래곤 프레이야와 싸워 보려다 만난 거니까.

하지만 요 근래엔 잘 나오지 않는 이명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먼 과거완 달리, 북부인들을 다스리는 프레이야 덕에 이미지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드래곤 슬레이어란 이명의 의미도 달라졌다.

영웅을 향한 칭송의 단어가 아닌, 비열한 배신자를 향한 멸칭의 단어로.

“어떤 드래곤 슬레이어를 말씀하시는 거죠? 영웅전에 나오는 이들 말씀이신지, 아니면…….”

“대전쟁의 원흉인 녀석을 말하는 거다.”

“아…….”

디아는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제니스 기사 학교도 나름 학교다.

자잘한 역사 교육도 겸하고 있긴 했던 터라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다.

‘물론 연합의 입맛대로 정리된 역사지만.’

“그자라면… 저도 알죠. 신성 왕국의 기사단장으로 있었던…….”

옆에서 듣고 있던 프리아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그의 표정엔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랬지.”

신성 왕국의 전 기사단장, 하울 키르엔.

이게 뭔 소린가 싶을 거다.

신성 왕국의 기사단장이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그럼 정말 신성 왕국에서 프레이야를 암살한 건가?

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대전쟁의 시작.

프란츠와 신성 왕국의 전쟁.

프란츠가 싸움밖에 모르는 야만인이라 카잔 황제의 농간에 놀아난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신성 왕국이 범인 같았을 뿐이다.

프레이야가 수면기에 들어가려던 그날.

탈리스는 화합의 섬에서 열릴 회담 탓에 자릴 비우고 있었다.

인간들과 섞여 살며 수면기도 무시한 채 살아온 프레이야.

덕분에 프레이야의 힘은 전성기에 비해 한참이나 약해져 있을 때였다.

무투왕도 자릴 비우고, 프레이야 본인마저 쇠약해진 상황.

탈리스도 걱정하며 수많은 호위 기사들을 붙이긴 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기사단 무리가 프레이야의 용탑에 침입하는 데 성공하고 만다.

정체 모를 힘까지 쓰는 놈들은 용탑을 지키는 이들까지 모두 죽이고 프레이야와 맞선다.

그래도 명색에 드래곤이었기, 습격 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있던 건 프레이야였다.

수십에 달했던 괴한들은 모두 프레이야의 발톱에 자잘한 고깃덩이가 되어 죽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프레이야는 알이 돼 버렸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당연히 대륙은 발칵 뒤집혔다.

그때 녀석을 도운 게 바로…….

‘흑마법사들의 왕.’

지금 카잔 제국의 옛 땅에서 왕 놀음 하고 있는 그 녀석이다.

당시엔 흑마법이 불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모로 쓸모 있다며 여러 왕국에서 초빙해 갈 정도였으니까.

이미 괴한들은 다 죽어 버렸고, 사건의 피해자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프레이야도 알이 돼 버렸다.

때문에 탈리스는 당시 대륙에서 가장 강한 흑마법사를 초청했다.

죽은 괴한들을 되살려 내 원흉이 누군지 밝혀 달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황제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었던 거다.

이미 카잔에 충성을 맹세한 흑마법사들의 왕.

그런 녀석이 언데드로 만든 게 바로 하울 키르엔이다.

먼 옛날부터 카잔 황제가 신성 왕국에 심어 놓은 세작.

그런 그가 배후로 누굴 지목했을지는 당연했다.

신성 왕국의 기사단장이기까지 했으니, 탈리스의 두 눈이 뒤집히는 게 당연했다.

분노한 탈리스는 그 자리에서 되살아난 하울 키르엔을 다시 죽여 버린다.

그게 바로 대전쟁의 시작이다.

‘대단한 놈이라니까.’

대륙 모든 이들을 제 손처럼 다루던 카잔 황제.

아마 오베론이 나타나 하울 키르엔을 되살려 진실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결국 이기는 건 카잔이었을 거다.

그 이후로 연합은 흑마법을 대역죄로 규정한다.

정작 그렇게 만든 원흉은 카잔 제국의 옛 땅에서 멀쩡히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여기까지가 대륙의 호사가들이 아는 이야기.

하지만 약간만 더 생각을 해 보면, 뭔가 빠진 게 있을 거다.

하울 키르엔.

그는 마법 랭크 9에 도달한 오베론에게 강제로 되살아난다.

이른바 오베론이 만든 최초의 실험체.

그렇다면.

디아 마냥 죽지도 않는 괴물이란 거다.

신성 왕국의 기사단장 자리까지 오른 걸 감안하면, 그 전에도 이미 충분한 강자였단 소리다.

그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쓰임새가 다하자 오베론이 다시 소멸시켜 버렸단 얘기도 있었지만, 오베론은 대전쟁 이후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라진다.

그럼 키르엔의 행방은?

“…….”

난 물끄러미 교황청 밑바닥을 내려다봤다.

교황청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연옥.

대전쟁 이후 줄곧 녀석은 거기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자가 오베론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알고 있나?”

“…그렇죠.”

죽은 이를 되살려 낸다는 건, 신의 영역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대전쟁을 뒤집은 가장 큰 계기였기에 쉬쉬하긴 했지만 아는 사람끼린 다 아는 내용이었다.

“그럼 그자가 어디 갔는진 아나.”

“그야… 다시 처형시키지 않았을까요? 녀석이 카잔 황제의 명에 따라 블루 드래곤을 습격한 것만으로도 중죄니까요.”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오베론이 되살려 낸 인간은, 지난번 네가 봤던 그 완벽한 돌멩이마냥 쉽게 죽지도 않으니까.”

“그런…….”

프리아나는 오베론이 만든 실험체의 위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베고 쪼개도 다시금 원상태를 복구하는 괴물 같은 회복력.

그게 사람에게 옮겨져 갔다는 거니, 프리아나는 무서운 상상이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벽한 돌멩이……?”

하지만 그런 돌멩이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는 디아는 고갤 갸웃했다.

그러다 프리아나의 눈빛이 디아에게로 향했다.

“…설마?”

“…그래. 이 녀석도…….”

그간 숨겨 올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

이미 크로드에게 받은 치명상이 회복된 적 있던터라 더 이상 숨기는 건 어려웠다.

차라리 녀석이 알아채기 전에 알려 주는 게…….

‘그래. 슬슬 알 때가 됐지.’

“오…….”

오베론의 손길이 닿은 몸이다.

라고 하려던 그 순간.

…꽈앙!

교황청의 지축을 흔드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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