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히테라교.
창세신 크리오스를 필두로 한 주신들을 통칭하는 단어 히테라.
이따금 창세신 크리오스의 이름을 따 크리오스교라 부르기도 하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히테라교다.
지구로 따지면 같은 신을 두고 이런저런 종교로 나눠지는 것처럼.
다만 이쪽의 종교는 서로 이름 하나 가지고 서로 죽어라 싸우진 않았다.
확실히 다신교 신앙이라 그런지 포용력이 넓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히테라교는 신성 왕국을 비롯한 대륙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였다.
물론 신성 왕국을 제외하곤 국교로 따질 정도는 아니지만, 다들 가슴 한켠에 히테라를 향한 신앙심을 품고 있었다.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 빈트하겐 칼로스.
녀석도 결투의 여신 이름을 걸고 결투를 하자 했을 정도였으니까.
이 소설 속 사람들에게 히테라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게 바로 달의 악신 셀렌.
히테라가 사람들을 위한 신이라면, 셀렌은 정반대다.
사람이 아닌 몬스터들을 위한 악신.
덕분에 밤엔 달의 악신 셀렌의 영향을 받아 몬스터들이 한층 더 강해진다.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악신, 셀렌에 대항해 사람들을 지켜 주는 자애로운 주신 히테라.
그게 히테라교의 근본을 이루는 내용이다.
그걸 맞다고 해야 하나 틀리다 해야 하나 좀 애매하지만.
히테라라는 게 사람들을 지키려 하는 건 맞으니 맞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 속 신이란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라도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쿠르르…….
신성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는 어느새 아이소테르를 떠나 신성 왕국의 중심지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성 왕국 사람들은 매번 식사 시간마다 기도를 올린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창 밖 풍경을 구경하던 디아가 물었다.
녀석은 어려서부터 기사 학교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종교관이란 게 없었다.
마법이 판치는 세상이라 해도 히테라교를 알아도, 종교가 없는 사람은 많았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게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들 몸에 쌓인 마나를 소모해 사용하는 게 마법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인간들에겐 딱히 직접적인 영향도 안 주는 터라 디아처럼 종교관 자체가 없는 이도 많았다.
“아무렴. 밥 먹을 때 말고도 자기 전에도 하고, 중요한 일이 있기 전에도 올리지. 에를 들면 시합 전날이라든가.”
“오… 그럼… 뭔가 내려지나요? 마법 같은 게?”
“후후. 당연하지. 신성 랭크가 괜히 있겠나?”
신성 랭크.
주로 신관들이 갖는 랭크로 다른 랭크들과는 작용 방식이 좀 다르다.
체내에 쌓인 마나를 바탕으로 발현하는 일반적인 랭크들과는 달리, 신성 랭크 보유자는 신기하게도 체내에 마나가 상당히 적게 나타난다.
그 대신 신앙심을 쌓아 히테라의 힘을 빌리는 방식으로 신성술을 발현시킨다.
‘뭐 그래 봤자 왼손 잘리면 블랭크 되는 건 똑같지만.’
블랭크가 괜히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높은 고위 신관이라 해도, 심지어 교황이라 해도 왼손이 잘리면 블랭크가 돼 버린다.
그 즉시 신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빈민촌에 굴러다니는 블랭크와 똑같은 처지나 다름없어진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뭐 별거 있겠나. 두 손 모으고 눈 꼭 감은 다음에 신한테 비는 거지.”
신성 랭크는 다른 랭크들에 비해 비교적 얻는 게 쉬운 편이었다.
단순히 거짓된 마음 없이 히테라를 향해 감사의 기도나 뭐 그런 걸 올리면 되는 거니까.
그 이상 상위 랭크로 가는 게 더럽게 어려울 뿐.
‘난 안 되지만.’
나도 몇 번 해 보려곤 했지만, 도무지 신성 랭크는 얻어지지 않았다.
그저 눈만 감고 시늉을 내 보긴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야 난 히테라의 정체를 소설로 다 봐 버렸으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신을 진심으로 속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얻는다 해도 문제다.
따지고 보면 남의 힘을 빌려 쓰는 거다 보니 신앙심을 잃으면 랭크도 낮아져 버린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신성 랭크만큼은 맘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가능한 랭크다.
다른 루트로 신성 랭크를 얻어 봤자 금세 잃어버릴 텐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다.
“으음… 저도 될까요?”
“그야…….”
별 생각 없이 디아의 물음에 대답해 주다 훅 들어온 질문에 혀가 굳었다.
디아에겐 랭크 시스템이 없다.
그럼 신성 랭크는 못 얻는 건가?
소설에선 끝까지 신앙심이란 게 없던 녀석이라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되겠지? 히테라 주신은 자애로운 녀석이니까.”
“오…….”
신이란 단어 뒤에 녀석이란 말이 붙은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디아는 속는 셈치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곤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깜깜하네요.”
“그렇지. 눈을 감았으니까.”
“…그래도 뭔가 힘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디아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은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요 근래 힘들긴 했을 거다.
자기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
눈 감은 채 기도를 올리는 녀석을 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프리아나나 이슬린 같은 경우엔 히테라 주신의 영역 안에서 태어난 존재가 맞다.
하지만 디아는?
‘오베론이 만들었지.’
그럼 오베론을 신으로 따지는 건가?
기도를 해도 오베론한테 힘을 받는 거고?
“흠.”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지구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신의 가호 같은 거 없이 그저 마음의 위안만 얻는 걸 수도 있다.
소설이 발할라 시스템에 연재 될 당시 이런 댓글도 있었다.
분명히 신이라는 게 존재하고 시스템적으로도 발현되는데, 어떻게 종교관이 없는 이들이 있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작가 녀석이 대댓글을 달아 주진 않았지만, 당시 독자들끼리 댓글창에서 콜로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콜로세움이 으레 그렇듯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어서 신앙심이라 할 수 있는 거라고.
분명히 존재하는 채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건 신이 아니고 그런 놈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신앙심이 아니다.
그냥 좀 센 놈한테 구걸하는 데 불과하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인지할 수 없는 무언가여야말로 신이라고.
그걸 믿는 게 신앙심이고.
이 대륙 사람들이 히테라를 대하는 거랑 오베론을 대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냥 더럽게 센 놈을 향한 두려움 섞인 감정이나 다름없지.
“네 마음이 편해지면 그걸로 된 거지.”
“흐흠. 그런가요?”
녀석과 잡담을 하던 사이 어느새 마차는 신성 왕국의 최중심부에 위치한, 교황청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뾰족한 첨탑.
그 위엔 히테라 주신을 상징하는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
빛 자체를 형상화 한 듯한 점 하날 주위로 퍼져 나가는 선.
신성 왕국에서 사용하는 문양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문양이었다.
한 가지 다른 건 교황청의 문양은 중앙에 법봉 하나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왕이 아닌 주신을 섬기는 왕국답게 신성 왕국은 조금 특이한 통치 체계를 갖고 있었다.
프란츠와 국경선을 마주 대고 있는 신성 왕국.
그 중심에 수도 역할을 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분리된 교황청이 존재했다.
때문에 지금 신성 왕국의 수장과 교황청의 교황은 다른 인물이었다.
‘수상이랑 왕 느낌이라 해야 되나.’
덕분에 신성 왕국의 수장은 연합의 일원이면서도 교황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차라리 교황이 연합의 일원으로 들어오면 편하겠지만, 신의 대리인이 인간들과 같은 선상에 있을 순 없다나 뭐라나.
높다란 교황청은 주위에 물을 가득 채운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따로 허락이 떨어질 때만 통과가 가능한 듯 바깥과 연결된 도개교들은 모두 들어 올려진 상태였다.
“다 왔군요.”
쿠르르…….
이슬린은 능숙한 솜씨로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도개교 앞에서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다가왔다.
구릿빛 갑주를 입은 채 얼굴엔 주홍빛 가면을 쓴 특이한 차림새.
가까이서 보니 특이한 걸 넘어 괴기한 복장에 가까웠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어…….”
기괴한 녀석의 모습을 마주하자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구리로 만든 가면 너머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면 주위로 뻗어 나간 다섯 개의 가시는 아마 수문관끼리 지위를 표현하는 용도 같았다.
가시 하나 없는 가면의 병사는 허리를 빳빳이 편 채 도개교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우리한테 온 녀석이 가진 가시는 총 다섯 개.
제법 높은 녀석 같았다.
“…아이소테르에서 온 이안 임페라 백작이다.”
[…….]
내 말에 녀석은 긴 창을 한 손으로 들고 품속에 반대쪽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두터운 가면을 쓴 채로 뭔가가 적힌 종일 읽어 내려갔다.
사전에 얘기가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르겠다.
무뚝뚝한 걸 넘어 기괴한 기운까지 풍기는 가면 탓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으니.
[…알겠습니다.]
“…….”
다행히 얘기가 된 건가 싶다.
녀석은 도개교 앞에선 병사들에게 손을 까딱였다.
잠시 고갤 돌린 녀석의 가면 틈새로 붉게 짓이겨진 살갗이 언뜻 보였다.
수많은 마물들을 상대해 온 나였지만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건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것 따위가 아니다.
너무 오랜 세월 가면을 쓴 채 살다 결국 가면과 일체화 되어 버린 거다.
어쩌면 본인의 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가면을 얼굴에 붙인 걸 수도 있다.
붉게 달궈진 구리 가면을 억지로 쓰는 미친 짓을 고행의 일부라 여기면서.
신성 랭크는 신앙심을 잃으면 낮아지는 특이한 랭크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급이 있는 신성 왕국 사람들은 웬만해선 신앙심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관을 비틀어 버릴 사고가 벌어진다 해도 신앙심을 잃지 않는, 그야말로 광신도 그 자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교황청 건물의 모습에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기 교황청은 온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광신도들만 모이는 곳이란 걸.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임페라 백작령으로 온 이단 심문관도 여기서 왔다 했지.’
이름이 텔레인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런 죄 없는 이도 신의 이름 아래 블랭크로 만들어 버리는 악독한 놈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짓을 한다 해도 놈들은 신앙심을 잃지 않는다.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거다.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는 게 신이 바라는 일이라고.
콰르르……!
이내 도개교가 육중한 소릴 내뱉으며 교황청과 이어진 다릴 내어 줬다.
“…가도 되나?”
[예.]
짧고 간결한 대답.
녀석은 그걸 끝으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마치 구리로 만든 조각상이라도 된 듯 허릴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 저러고 서 있는 것만으로 상당히 고통스러울 거다.
하지만 그런 고통조차 히테라 주신을 향한 고행의 일종.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터져 나간다 하더라도 신성 랭크를 통해 다시 회복된다.
어찌 보면 신앙심을 쌓기 위해 최적인 자리라 해야 하나.
“…흥.”
깊이 생각해 봤자 기분만 더 나빠질 것 같았다.
어차피 신성 왕국은 몰락의 성채까지 가기 위한 중간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교황청 광신도들 쯤이야 내 알바는 아니다.
콰르르……!
도개교는 마차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올라갔다.
상당히 폐쇄적인 공간이지 싶다.
보통 이런 데서 사고 같은 거 터지면 아주 난리가 나던데.
폐쇄된 건물 안에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가는데도 바깥사람들은 알 도리가 없으니.
‘뭐 교황청인데 그럴 일은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름 신들을 모시는 장손데 그 정도 방비는 해 놨을 거다.
게다가 신성 랭크만 놓고 보면 온 대륙에서 가장 강한 놈들만 모인 곳인데.
라크레시아라 해도 여길 대놓고 쳐들어오는 건 힘들 거다.
“그럼. 그럼.”
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교황청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