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자, 됐다.”
대륙 전역이 간략하게 그려진 지도에 붉은 선으로 앞으로의 여정 루트가 그려졌다.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아이소테르의 수도, 소테라.
일단은 셀리버트에 아이소테르의 사신 자격으로 갔다 왔으니, 그 후로 한 번쯤 이글렌의 얼굴을 보러 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이슬린이 대신 서신을 적어서 보내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여왕과 귀족 사이 관곈데 직접 보고 정도는 해 줘야지.
‘얼굴 안 본 지도 좀 됐고.’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였더라.
직접 얼굴을 본 건 화합의 섬에서가 가장 최근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도 일 때문에 잠깐 만난거지 제대로 편히 마주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뭐 통신용 마법구로 만나긴 했지만.’
프란츠에서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고, 이글렌와 통신용 마법구로 간단히 대화를 나누긴 했었다.
녀석도 바빴던 터라 국외 순방이 한창이라 어쩔 수 없긴 했다.
“흠.”
탈리스를 설득하러 프란츠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하프 드래곤 유르와 투린.
둘에게 용으로써의 힘을 각성시켜 준 데다 화합의 섬에서 있었던 일도 있어서 그런지, 탈리스는 꽤나 재밌는 말을 했었다.
‘탈리스는 이안 임페라와 함께하겠다.’
연합의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게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리고…….
마치 자기랑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고 싶다는 듯한 탈리스의 발언.
물론 적당히 에둘러 거절하긴 했다만.
“…….”
갑자기 드래곤 폼이 풀리는 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유르가 떠올랐다.
고갤 홰홰 저으며 지난날의 과오를 떨쳐 내려 애썼다.
“백작님.”
“…어? 어! 그래.”
“…일정은 다 짜셨는지요.”
“으응. 그렇지.”
이슬린에게 루트를 그린 지도를 보여 줬다.
제일 먼저 소테라에 들리고, 그다음 신성 왕국으로 향한다.
자잘한 우호 다지기용 만남이 있을 거고, 여정의 마지막에 ‘그게’ 있었다.
트라이어스의 요새.
불과 20여 년간 이어진 저주에 지금은 몰락의 성채란 이름까지 갖게 된 땅.
거기에 녀석이 있다.
이 소설의 시작이자 끝.
‘오베론 스테이라.’
“크흠.”
녀석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거렸다.
따지고 보면 라크레시아보다 센 녀석일 테니까.
제약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직접 못 나서는 것뿐이고.
‘센 건 맞지만… 나한테 득이 될 놈은…….’
사실 잘 모르겠다.
난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여긴 ‘랭킹 빨로 세계 정복!’이란 이름의 양산형 판타지 소설 속 세상.
그럼 난 왜 여기 있는 걸까.
누가 날 이 세상에 불러들인 걸까.
그게 가능한 인물은 내가 봤을 땐 오베론 말곤 없다.
‘미안하네. 이세계에서 온 자여…….’
오베론이 내게 내뱉었던 말.
그렇다는건 녀석이 날 이 소설 속 세상에 불러들였단 건가?
애초에 이 세상은 소설 속 세상이 맞는 걸까?
그리고 소설 속 세상이 뭐지?
그저 연합과 제국 간의 알력이 벌어진 이 세상의 이야기를 누군가 글로 옮겨 놓은 건 아닐까?
그럼 뭐가 먼저지? 소설? 아니면 나?
짝!
“허윽!”
상념에 빠져 있다 별안간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고갤 들어 보니 이슬린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아, 아냐. 내가 미안하지.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그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 뭘?”
“…아닙니다.”
이슬린은 뭔 말을 하려 했던 건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별다른 말없이 고갤 한 번 숙이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진 모르겠다만.
나중엔 알게 되겠지.
* * *
소테라의 왕성 테라리움.
작년에 벌어졌던 끔찍했던 악몽도 대부분 치유된 상태였다.
마차에 폭약을 가득 싣고 꼬라박았던 테라리움의 성벽.
밑 빠진 독마냥 훤히 드러나 있던 구멍도 채워지고.
소테라의 사람들 얼굴에서도 다시금 희망찬 미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게 다 이글렌 여왕의 치세 덕분이리라.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 녀석한테 나도 잘 있다 안부도 좀 전해 주고.”
“넵.”
프리아나는 칩거한 빈트하겐을 만나러 떠났다.
매번 임페라 백작령까지 찾아와 줬으니, 이번엔 프리아나가 직접 찾아가 줘야 예의겠지.
“저기…….”
옆에서 눈치 보던 디아도 슬그머니 한 마디 했다.
소테라에 들른 건 처음일 테니 구경 다니고 싶은 거겠지.
“어, 그래. 너도 갈려면 가라.”
“아,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백작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아잇, 이 자식 이거 또 이러네.”
내가 비꼰 줄 아는지 디아가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외쳤다.
“야. 빨리. 소테라 구경하고 싶으면 얼른 가라. 삼 초 준다. 삼…….”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짜식이. 진작 그럴 것이지.”
디아는 쭈뼛거리며 프리아나를 따라 자릴 비웠다.
남은 건 이슬린 하나.
“넌 어디 안 가냐?”
“네.”
“그래, 그럼.”
난 그렇게 이슬린과 함께 테라리움의 알현실로 향했다.
명색에 여왕의 혼약자라 그런지 검문이니 뭐니 죄다 프리패스로 넘어 갈 수 있었다.
테라리움의 높다란 곳에 위치한 왕의 알현실.
여기도 수많은 일이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
처음 이글렌이 알현실에 있을 때만 해도 왠지 모를 어색함이 묻어 나왔었는데.
지금은 제법 여왕으로서 태가 났다.
“이안 백작!”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이글렌은 왕의 알현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내게 싱긋 미소 지었다.
내 옆에 선 이슬린에게도 가볍게 손을 흔들자 이슬린도 이에 화답하듯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다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예, 전하.”
“후후, 전하는 무슨.”
이글렌은 알현실 양옆에 줄지어 서 있는 시종들과 기사들에게 손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녀석들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곤 조용히 뒷걸음질치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알현실에 남은 건 나와 이슬린, 그리고 이글렌까지 이렇게 셋이었다.
더 이상 볼 사람도 없자, 이글렌은 옥좌에서 내려와 우리 둘 근처로 다가왔다.
“…셀리버트는 어떻게 됐나요?”
“아무래도 엘프들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전에 그런 불미스런 일도 있었고 하니.”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아이소테르에서 한 것 도 아닌데 쩨쩨하네요.”
“흐흠, 아무리 그래도 여왕님 입에서 쩨쩨하다니ㅊ….”
“에잇, 그야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하는 말이죠.”
이글렌은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날 쿡쿡 찔렀다.
요새 외롭긴 했나 보다. 가족도 뭣도 없이 혼자 테라리움을 돌보고 있었으니.
하긴 내가 이글렌 자리에 있었으면 못 버티지 않았을까 싶다.
갈렌이 싸 놓은 똥만 해도 한 무더긴데.
자기 아버지와 오라비가 죽은 알현실에서 업무를 보다니.
참 강인한 녀석이지 싶다.
“그리고…….”
뭔가 들떠 보이던 이글렌이 별안간 말끝을 흐렸다.
난 그런 그녈 보며 무슨 일인지 의아해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흐흠. 이런 건 보통 남자 쪽이 먼저 말하지 않나요?”
“…네?”
영문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갤 갸웃했다.
이슬린이라면 알지 않을까. 예전에 같은 마탑에서 친하게 지냈다고 하니.
“…….”
뭔가 도움을 달라는 눈빛으로 이슬린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슬린은 되려 경악을 넘어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대, 대체 뭐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정말 몰라서 그래요?”
“그… 하하…….”
“…이안 당신……!”
점점 이글렌의 표정도 험악해지려던 그때.
이슬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이글렌의 귀에다 대고 뭐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
그러자 험악해지던 이글렌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헤헤, 그런 거였군요.”
이글렌은 두 볼이 붉게 상기된 채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웠다.
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이슬린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고맙다. 이슬린.’
“…에휴.”
고맙단 눈빛에도 뭔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 이슬린.
“흐흠. 그럼. 신성 왕국엔 잘 다녀오세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그야 연합간 우호를 다지기 위해…….”
“흐흐! 이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잘 다녀오세요!”
이글렌은 자릴 훌훌 털고 일어나 휙 돌아섰다.
이글렌에게까지 오베론에 대한 얘긴 하지 않았다.
일단은 연합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한 번 오라길래 가는 거라 하긴 했는데.
“…네. 전하.”
“가서 다치지 말구요. 후훗.”
이글렌은 배시시 웃으며 다시금 옥좌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짓곤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그극!
육중한 알현실의 문이 닫히고,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늘따라 이글렌이 이상하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백작님.”
내가 뭔갈 물어보려던 찰나, 이슬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이슬린. 갑자기 이글렌이 왜 저러는 거지?”
“…하아.”
또 한숨을 내뱉는 이슬린.
아무 이유도 없이 자꾸 이러니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급한 건 나였기에 잠자코 이슬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성 왕국에 왜 가는지 여왕님껜 말씀 안 드렸죠?”
“그렇지. 대뜸 ‘오베론 만나러 갑니다!’ 하면 놀랄 테니까.”
“그렇죠. 그럼 여왕님은 뭐라 생각하고 계실까요.”
“그야… 연합간 우호를 다지기 위해…….”
“여왕님께서 직접 신성 왕국으로 순방 가신게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거. 아시죠?”
“으음…….”
그럼 다른 속셈이 있는 거라 생각했을 텐데.
왜 이글렌이 별 말 없이 허락을 해 준 걸까…….
“연합법상 왕족의 결혼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연합법……?”
이슬린의 말에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오르긴 했다.
설정에 미친 작가답게 ‘왕가혼약의례준칙’이랍시고 결혼에 필요한 의례를 정리해 놨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필수는 아니지만, 허례허식을 중요시하는 왕족들은 많이들 따르는 편이었다.
거기에 따르면…….
“왕족과의 혼인은 1년 안에 신성 왕국에서 세례를 받은 자만 가능하다.”
“그래. 그런 게 있었ㅈ… 헉!”
난 휘둥그레진 눈으로 굳게 닫힌 알현실 너머로 고갤 돌렸다.
그러면서 이글렌이 뭔가 들떠 있던 것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가 이제 정식 혼례를 치루고 싶어 하는 줄 아는 듯했다.
내가 몰래 신성 왕국에서 세례를 받곤, 짠! 하고 나타나 정식 프로포즈라도 할 예정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다시 이슬린을 바라봤다.
“그, 그럼……?”
“…네. 잔뜩 기대하고 계시더군요. 드디어 백작님이 마음을 잡으신 건가 해서요.”
이글렌과 난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해 놓은 상태였다.
슬슬 1년 정도 지난 참이니 정식 혼례를 치룰 참이긴 한데…….
일단은 나중 일로 미루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뭐 물론 이글렌 정도면 결혼상대로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아직은 좀 어색하달까…….
“아직도 미룰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게… 결혼은 좀 더 깊이 생각을 하고 해야….”
“얼마나 깊이 하신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미 충분히 깊어진 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 기준에선 내가 이상한 놈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놈이랑 결혼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니까.
당장 이슬린도 소설에선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인 위셀란의 왕자랑 결혼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전에 내쳐지긴 하지만.
“으음…….”
“이제 마음을 정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 이글렌은 하고 싶어 할까?”
“보면 모르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글렌도 나한테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았다.
사춘기 소녀마냥 결혼할 생각에 쑥스러워하던 것도 그렇고.
“정말이지 백작님은…….”
“…근데 왜 너가 자꾸 화를 내냐.”
“…몰라요. 아무튼 전 여왕님께 ‘백작님이 비밀로 하고 싶으신 것 같으니 오늘은 모른 척 넘어가 주십시오’라 말했으니까. 앞으론 알아서 하세요.”
“허윽…….”
이슬린이 귀엣말로 뭐라 하자 화가 풀린 것도 이해가 됐다.
당사자는 뒷전에 놓고 왜 맘대로 그런 말을 하나 싶기도 했지만, 안 그랬으면 이글렌이 화가 단단히 났을 테니 잘한 거라 해야 하나.
“끄응…….”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