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몰락의 땅.
정확한 명칭은 몰락의 성채다.
저주의 여파가 성채 바깥까지 퍼지는 바람에 땅이라 불린 거지만.
꽤나 먼 과거 신성 왕국을 수호하던 한 요새가 있었다.
트라이어스 요새.
결투의 여신 트라이어스에서 따온 거창한 이름이지만 시작은 자그마한 전초기지 정도였다.
대전쟁 이전, 지금은 연합에 속해 있긴 하지만 연합 창설 이전이었기에 왕국들끼리 마냥 사이가 좋진 않았다.
서로 다툼도 있었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위해 지어진 이 작은 요새는, 이따금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인들을 막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다.
그러다 탈리스를 필두로 프란츠가 건국되고.
야만인이 아닌 한 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다 보니 이후로 증축에 증축을 거듭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신성 왕국 최강의 요새.
처음엔 그저 야만인들을 규합한 것이 지나지 않는 프란츠다 보니, 너무 무리한 증축이 아니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분노한 프란츠의 침공으로 대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저들의 여왕이자 여신인 블루 드래곤을 잃은 분노.
이는 오롯이 신성 왕국에게로 향했다.
비록 요새가 지어지긴 했었다지만, 카잔 황제의 계략에 시작된 전쟁이었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무투 랭크 8의 탈리스를 필두로 한 전쟁의 시작은 거대한 요새를 거의 함락시킬 지경까지 만들었다.
덕분에 대전쟁 당시 가장 쓸모없고 헛되게 죽은 이들을 고르자면, 이 트라이어스 요새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연합은, 카잔 황제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티끌만큼이라도 연관되어 있을 경우 사형을 면치 못했던 터라, 카잔 황제의 사형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를 어디서 처형시키느냐는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수도가 함락 당한 위셀란?
수 적으론 가장 많은 제국군을 죽인 아이소테르나 프란츠?
아니면 제일 멀쩡한 피스트?
그러다 나온 게 신성 왕국이었다.
어찌 보면 제일 큰 피해자다.
제국군뿐만 아니라 프란츠에게도 많은 사상자를 본 왕국이니까.
때문에 연합 수장들은 카잔 황제의 처형 장소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마지막으로 점찍은 곳이 바로 거기.
가장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낸 땅.
트라이어스 요새였다.
그렇게 사로잡힌 카잔 황제는 트라이어스 요새까지 끌려가 처형당한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카잔 황제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선 그닥 악명이 자자한 편은 아니다.
그를 압송하는 행렬이 대중들에게 공개된 탓이 컸다.
멍한 눈빛으로 침까지 질질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던 카잔 황제.
빈껍데기만 남은 광인마냥 압송당하는 그의 모습.
황제란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처참했던 그의 모습은 일반 대중들이 봐도 멍청해 보였다.
오죽하면 멍청한 황제 카잔이란 이명까지 있을까.
온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 몰락한 멍청이 황제라고.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된 카잔 황제.
일반인들에겐 멍청이 황제 카잔이란 말이 있었지만, 그의 죽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이미 프란츠와의 전쟁으로 반파되어 버린 트라이어스의 요새에서 카잔 황제는 사형 당한다.
그 뒤로 이변이 일어났다.
무슨 고대인의 유물이라도 쓴 건지.
하늘에선 먹구름이 일고 독기를 머금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일순간 생긴 이변이었던 터라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지만, 그 뒤로가 문제였다.
카잔 황제의 분노를 머금기라도 했던 건지.
독기를 머금은 빗물은 트라이어스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거기에 트라이어스 요새 복구공사가 계속 뒤집어질 정도로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결국 신성왕국은 트라이어스 요새의 복구를 포기했다.
그저 카잔 황제를 죽인 기념비적인 장소로만 놔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럴수록 트라이어스 요새는 무너져 내려갔고, 지금은 부서진 성벽과 거무튀튀한 저주 받은 땅만 남았다.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 몰락의 성채.
요 근래엔 몰락의 땅이란 이명까지 붙어 가는 지경이다.
황제의 저주인지는 몰라도 주변 땅까지 계속하서 퍼져 나가고 있으니까.
나름 신성 왕국의 고위 사제들이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야 고대인의 힘으로 그 지경이 된 건데. 사제라고 별수 있나.’
뭐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런 기념비적인 땅에서 오베론을 만난다라.
“언제…라는 말은 없었습니까?”
“없었지.”
수리 발톱 대장로는 묘한 미소를 띤 채 고갤 끄덕였다.
자길 찾아오라 했으면서 정확한 시간도 안 알려 줬다라.
평범한 이라면 이게 뭔 개소린가 하겠지만, 상대는 오베론이다.
위드라 빈민촌 밥숟가락 개수도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괴물 중에 괴물.
아마 내가 언제든 신성 왕국으로 향하기만 한다면, 이를 알아차리곤 몰락의 성채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오베론은 그게 가능한 녀석이니까.
딱히 뭐 하고 있는 것도 없을 테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다시 회의에 참석해야겠지.”
“…네.”
수리 발톱 대장로는 꼬았던 다릴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가 가볍게 고갤 흔들었다.
“너희들은 따라올 필요 없다.”
“예?”
“뭐 어디까지나 대장로들에겐 세계수 영역이 괴한들에게 뚫린 것뿐이니, 담당자들을 질책하고 끝나겠지.”
“그럼…….”
“그리고 넌 셀리버트의 상황을 신경 쓸 게 아니라 다른 데 신경을 더 써야 하지 않나?”
“…그렇죠.”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녀석이긴 해도 나름 착한 놈이었나?
“너희 인간 일행들에 대해선 잘 말해 줄 테니 적당히 되돌아가도 된다. 보아하니 셀리버트에 죽치고 앉아 있었던 이유도 대충 마무리된 것 같고.”
애초에 셀리버트에 온 이유는 월식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일이 꼬여 이 지경까지 온 거지.
나야 고맙긴 하다만…….
괜찮으려나? 대장로들 사이에서도 제일 어린 축에 속할 텐데.
“후후. 설마 그 늙은이들 때문에 그러는 건가?”
“뭐… 아무래도 그렇죠.”
“하핫. 신경 쓸 것 없네. 뒷방 늙은이들 따위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
“으음.”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
난 어깰 한 번 으쓱하곤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봐야겠지요.”
“그래. 후후.”
멋쩍은 듯 자릴 떠나는 내 뒤를 향해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녀석 만나면 내 안부라도 한 번 전해 주라고.”
“…네.”
* * *
셀리버트 대숲림에서 있었던 일들은 대충 마무리됐다.
처음엔 우리 일행 보고 세계수 영역이 뚫린 원흉이라 하는 놈도 있었지만, 수리 발톱 대장로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얼마 있다 별다른 말없이 우릴 내보내 줬다.
세리트 녀석이 구시렁대며 짐 싣는 걸 도와줬던 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내가 왜 인간 놈들 짐을…….’
‘그럼 나도 하는데 너가 안 하냐?’
‘아, 아닙니다!’
그렇게 셀리버트의 각종 향신료들을 뿌리째 실은 마차는 임페라 백작령으로 되돌아갔다.
주인공과 조연의 만남치곤 좀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나중에 또 만나게 될 거다.
인연이란 건 서로를 끌어당기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임페라 백작령에 도착한 난 다시 영지를 돌리기 위해 바빴다.
오베론이 자길 찾아오라 하긴 했지만, 당장 녀석을 찾으러 가기엔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웠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영지에 있어야 하지 싶다.
집무실에 홀로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하던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네, 백작님.”
이내 문을 열고 이슬린이 들어섰다.
녀석의 손엔 또 새로운 서류 더미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저걸 또 처리하려면…….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화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좋아.”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업무다.
백작이니 영주니 듣기에 좋은 거지 실상 따져 보면 환상이 깨질 거다.
자잘한 성벽 보수부터, 태풍에 휩쓸린 길 정리 같은 게 업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내가 직접 흙을 퍼 와서 길을 닦고 성벽을 쌓는 건 아니다만, 다 돈이 드는 일인 이상 내 허가가 필요했다.
그 외에도 타 영지나 이글렌한테 보낼 서신까지 합하면…….
‘이건 뭐 동네 이장이지.’
하지만 이제 괜찮다.
잔뜩 쌓인 피로를 풀어줄 그게 있으니까.
수제 콜라.
일명 흑차.
아직은 셀리버트에서 가져온 재료들을 키우느라 만들어 팔 수준은 아니지만, 하룬에게 필요한 환경을 설명해 주자 금세 셀리버트와 비슷한 환경의 화실을 만들어 줬다.
적당히 따스하면서 습기까지 머금은 화실.
셀리버트에서 실어 온 향신료들을 이제 막 옮겨 심어 놓은 참이었다.
사실 셀리버트에서 안정적으로 재료를 공급 받는 게 제일이다만.
필수 재료들을 남의 손에서 받아 오는 건 상인으로서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다.
차라리 조금 모자라긴 해도 내 영지에서 만드는 게 낫지.
“그리고 말씀하셨던 대로 흑차를 만들어 왔습니다.”
“오. 좋아.”
이슬린은 차갑게 식은 유리병에 담긴 흑차를 건넸다.
마법으로 딱 얼기 직전까지 차갑게 식은 흑차.
가볍게 한 모금 입을 축이자 기분 좋은 향과 달콤함이 입 전체에 퍼져 나갔다.
“크흐!”
“입에는 맞으신지요.”
“딱 좋네. 너도 좀 마실래?”
병째로 들고 마시던 난 녀석에게 마시던 흑차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재료도 별로 없는 걸요.”
“그래?”
뭐 만들면서 몇 번 맛봤겠지.
그러다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시던 거라 싫은 건 아니지?”
“…아닙니다.”
“으음…….”
뭔가 정곡을 찔린 것처럼 묘한 정적이 섞여 있었다.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마음에 약간의 상처를 받은 채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서신이 한 장 도착했습니다.”
“…서신?”
이슬린은 품 안에서 편지봉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편지 한가운데엔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빛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점 하날 주위로 퍼져 나가는 선.
이는 나에게도 익숙한 문양이었다.
“…신성 왕국?”
수리 발톱 대장로에게 들은 게 있었던 터라 영지에 온 뒤로도 줄곧 봐 왔던 문양이다.
“녀석들이 왜…….”
일단은 연합의 일원이기도 하고. 이글렌과 약혼을 해 놓는 터라 어느 정도 연이 있긴 했다.
하지만 신성 왕국은 프란츠를 통하거나 도라스를 통하는 길이 아니라면 닿을 수조차 없는 머나먼 땅.
당장 셀리버트에서 출발하는 게 더 빨랐을 정도로 거리가 있는 곳이다.
게다가 신성 왕국의 수장이라면 화합의 섬에서 만났던 게 전부다.
‘그리 유쾌한 만남도 아니었고.’
난 미심쩍은 얼굴로 이슬린이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트득!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머나먼 땅을 지나왔는데도 편지지는 이 근방에선 맡을 수 없는 독특한 향을 풍겼다.
“흠…….”
찬찬히 편지를 읽어 본 난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이슬린도 편지 내용이 궁금한 듯 고갤 빼꼼히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이슬린한테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같은 연합의 일원으로 한 번 신성 왕국에 들리라는군.”
“네?”
그게 다냐는 듯한 이슬린의 되물음.
하지만 그게 다다.
그저 인사치레로 온 편지.
‘뭐 못 보낼 것도 없긴 한데…….’
시기가 참 묘하다.
셀리버트에서 수리 발톱 대장로에게 전해 들은 오베론의 말.
‘오베론을 만나고 싶다면 몰락의 땅으로 가라.’
이래서 약속 시간을 따로 안 정한 건가.
올 타이밍은 자기가 만들어 줄 테니 적당히 오기만 하라고.
“…….”
“그저 인사치레로 온 것 같습니다만…….”
“그렇긴 한데…….”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
오베론씩이나 되는 녀석이 오라고 자리까지 깔아 주는데.
“가야지.”
신성 왕국이라.
직접 가 본 적은 없는데.
기대 반, 걱정 반 되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