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누구겠나?”
“…….”
난 속으로 녀석이 흥미로워할 만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십여 년 전 흥미로워 했을 만한 녀석이라면…….
“…오베론?”
“후후.”
정답을 맞춘 건지 녀석은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정말 재밌는 놈이었지. 끝까지 말이야. 대륙을 홀로 재패할 힘도 있고, 심지어 재패한 거나 다름없으면서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뭔가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감상평이었다.
“후훗.”
녀석은 한 번 피식 웃곤 이야길 이어 나갔다.
“뭐 그 전부터 녀석이랑은 자주 만났었다. 마법왕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칭호를 가졌을 때부터.”
“제법 오래전 일이군요.”
“자네들한테는 그런 거겠지. 내겐 불과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지만.”
마법왕씩이나 되는 작자가 엘프들에겐 무슨 볼일이 있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엘프들과 인간들의 마법 문화 발전 방향은 조금 결이 달랐다.
전투에 치중된 인간들의 마법관 달리, 엘프들의 마법은 하나의 문화였으니까.
때문에 대전쟁 이전 회상씬에서도 오베론이 엘프들과 교류하는 장면이 나왔다.
엘프들과 마법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로.
어쩌면 그 덕에 랭크 8이란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이상은 다른 녀석의 영향이 컸지만.
‘수리 발톱 대장로와 연이 있단 건 몰랐는데.’
엘프들과 마법에 관한 담론을 나누다 마탑주끼리 모이는 회담에 늦는 일도 잦았다.
‘또 엘프들이랑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겠지!’ 하면서.
그게 수리 발톱 대장로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한 번 흥미가 생긴 그 녀석관 연을 맺는 터라, 그 이후로도 녀석과 만남은 계속됐지.”
“계속이라면…….”
“대전쟁 이후에도 말이야.”
“대전쟁 이후……?”
소설에서도 대전쟁 이후 오베론은 등장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며 사라졌다고들 하던데.
대전쟁 이후 오베론의 행보는 나도 잘 모른다.
라크레시아가 습격해 왔을 당시, 오베론이 등장했을 땐 나도 놀라 까무라칠 정도였다.
‘영문 모를 소리만 내뱉고 가 버렸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오베론과의 인연은.”
“대전쟁이 끝나고 녀석이 찾아오더군.”
“허억…….”
수리 발톱 대장로는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대전쟁 직후에 수리 발톱 대장로를 찾아왔다고?
분명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에 난 녀석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진 그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마법 랭크 9를 달성한 녀석이 내게 와서 한 얘기가 뭔지 아나?”
“음… 모르겠네요.”
“자길 ‘도와’달라더군.”
“…예? 도와달라구요? 오베론을? 대장로님이?”
오베론도 꼬부랑 노인네긴 했지만, 근본은 인간이다.
나이로만 따지면 수리 발톱 대장로가 한참은 위였다.
그런걸 감안하면 굉장히 불쾌할 수 있는 발언이긴 했다.
하지만 상대는 소설 속 최강자로 불리우는 랭크 9.
그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그가 도움을 요청했다니.
“그래. 생각해 보면 웃긴 놈이야. 그저 힘으로 찍어 눌렀다면 아무리 싫어도 도와줄 수 밖에 없었을 텐데.”
“흠…….”
아니, 애초에 왜?
방금 수리 발톱 대장로가 말했듯이 오베론이 손가락 한 번 까딱했다면 아무리 대장로여도 순순히 녀석의 명에 복종했을 거다.
마법 랭크 9란 그런 거니까.
그런 녀석이 왜 부탁을……?
“대체 무슨 부탁이었길래……?”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녀석은 대뜸 석상의 이름을 내뱉었다.
“흡.”
녀석은 역시 석상의 존재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카잔 제국 최강의 전력이었던 기사왕.
“녀석의 석상 숨기는걸 도와달라지 뭐냐. 정말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오호.”
오베론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 그를 숨기기 위해 고민했다.
카잔 제국의 옛 땅?
황제의 잔당들이 거길 안 찾아볼 리가 없다.
그렇담 연합의 땅?
그것도 아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수상쩍은 냄새 풀풀 풍기는 석상.
아무리 꽁꽁 숨긴다 해도 이는 결국엔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석상은 오베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 조화(調和)로 만들어진 녀석이다.
어쩌면 석상을 놓고 연구하다 랭크 9에 도달하는 마법사가 나올 수도 있었다.
이는 오베론 입장에서 절대로 피해야 할 일.
지금도 온 대륙이 랭크 9에 도달하기 위해 머릴 꽁꽁 싸매고 있다.
공식적으론 탈리스 홀로 무투 랭크 8의 최강자긴 했지만, 내가 알기론 지금 시점에서 랭크 8인 녀석이 몇 놈 더 있다.
힘이란 커지면 커질수록 질투와 견제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놈들은 마탑이라든지 골방에 틀어박혀 홀로 인간을 초월할 길을 찾고 있다.
덕분에 황금 은행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덩일 비싼 값에 팔아 치웠다.
지금쯤 적당한 마탑에 되팔아서 쏠쏠한 수익을 얻었을 테고.
마탑에선 돌멩이 하날 가지고 온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연구에 매진 중일 거다.
‘그러고 보니 잘 살고 있으려나.’
연합에서도 도라스의 연줄이 닿아 있던 3원로 메르헨.
그 뒤로 황금 은행에 들릴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 들려오는 소문 없는걸 보면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오베론 입장에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 기사왕의 석상을 숨겨 놔야 했다.
그러다 나온 장소가 중립의 땅 셀리버트 대숲림.
거기에서도 엘프들이 신성히 여긴다며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세계수의 영역.
때문에 지금껏 온 대륙을 뒤진 크로드도 기사단의 유물을 찾을 수 없었다. 내 덕에 찾긴 했지만.
“오베론이 생각하기에 셀리버트가 적격이었나 보군요.”
“그렇지. 일단은 중립에 가장 가까운 땅이었으니까. 그래서 허락해 준 거다. 인간이라면 치를 떨 다른 엘프들에게도 속인 채 기사왕이란 작자를 세계수의 영역에 숨길 수 있도록 도와줬지.”
“…그런 거였군요.”
“뭐 나름 비밀로 하긴 했지만, 영원한 비밀이란 건 없더군. 3년 전 제국의 끄나풀이 세계수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까. 어젠 결국 오베론 녀석의 마법도 풀려 버렸고.”
“…….”
녀석의 말에 가슴 한켠이 쿡쿡 찔리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다.
차라리 내가 오베론이었다면, 그냥 세계수의 영역에 석상을 숨겨 두고 인식 저해 마법을 걸어 놨을 텐데.
오베론이 쓴 마법일 테니 더더욱 눈치조차 못 챌 테고.
“왜 녀석이 ‘도움’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단 눈치군 ”
“음… 뭐 그렇죠. 다른 이도 아니고 역사상 가장 강한 마법사였는데.”
수리 발톱 대장로는 눈썹을 한번 으쓱했다.
“나도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영문 모를 소릴 하던 건 기억 나는군. ‘난 이제 더 이상 마법을 쓰면 안된다.’라나 뭐라나.”
“마법을 쓰면 안 된다……?”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쓴다.
무슨 결심이라도 한 건가?
“흠.”
어렴풋이나마 녀석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해는 갔다.
그가 마법을 쓰면 쓸수록 세상은 엉망이 됐다.
지금 연합 왕국의 꼬라질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원래는 멸망했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놈들이니까.
나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 생각한 건지, 녀석은 카잔이 아닌 연합의 손을 들어 줬다.
그 결과가 이거다.
개판 오 분 전이란 이름도 아까운 이름뿐인 연합.
녀석도 처음엔 그러려고 한 게 아닐 거다.
카잔 황제가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려 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같잖은 선의로 포장한, 마법을 향한 그의 욕심 탓에 모든 게 일그러졌다.
어쩌면 카잔 황제가 행했을 학살보다 더 많은 이들이 피해를 봤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 남아 라크레시아란 괴물을 만들어 냈다.
계속해서 악순환을 멈춰 보려 했겠지만.
끝이 없었을 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끝내 익사해저리는 조난자마냥.
그래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걸 거다.
소설을 읽은 내가 봤을 땐.
‘뭐 여전히 개트롤인 건 여전하지만.’
수리 발톱 대장로 덕에 꽤나 흥미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오베론이 마법을 안 쓰기로 작정했다니.
하지만 여전히 이해 안 가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이 얘길 저한테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후후.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야.”
몰랐던 사실을 알려 준 건 고맙긴 하다만, 당장 지금 쓸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 비밀 마도서라도 한 권 쥐어 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성미가 급하군. 덕분에 자넬 향한 흥미가 살짝 식었군.”
“으음…….”
거 참 흥미니 재미니 좋아하는 양반일세.
일단 급한 건 나였던 터라 잠자코 녀석의 꼬장을 받아 줬다.
“뭐 그러셨다면 사과드리죠.”
“후후.”
묘한 녀석이다.
오베론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었단 사실도 놀랍고.
“…잠깐.”
“뭐지?”
“설마 저한테 이 이야길 꺼내신 이유가…….”
“.…하핫! 그래! 잘 맞췄어!”
수리 발톱 대장로는 묵은 체증이라도 풀린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뭐 예전처럼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야.”
“대체 언제입니까! 오베론과 연락을 하셨단 시간이!”
“이거 원. 성질 참 급하군.”
“…….”
다른 놈도 아니고 오베론인데 그럴 수밖에.
난 그게 대체 언젠지 궁금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며 녀석이 말하길 기다렸다.
“그게 언제냐 하면…….”
꿀꺽!
설마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라크레시아를 막을 방법을 미리 알려 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제다.”
“예?”
“어제 녀석이 찾아왔더군. 아마 내일쯤 기사왕 카이세리우스의 봉인이 풀릴 거라고.”
“그게 뭔… 그럼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겁니까!”
“아니, 글쎄, 어제 들은 사실이라 하지 않았나? 얘기할 틈이 있어야지.”
“으윽…….”
이게 무슨 질 나쁜 장난일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깨달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군요.”
“그래.”
수리 발톱 대장로는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이더니 이내 참아 왔던 말을 꺼냈다.
“몰락의 땅. 거기로 오라고 하더군. 오베론 스테이라를 직접 만나 보고 싶다면.”
“…….”
오베론을 직접 만난다.
그것도 몰락의 땅에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지역이다.
신성 왕국에 위치한 한 도시.
지금은 저주 받아 풀 한 포기도 자랄 수 없는 연합의 가장 척박한 땅.
이는 다름 아닌.
카잔 황제가 처형 당한 땅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오베론을 만날 수 있는 자린데.
난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베론 스테이라.
그 녀석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려 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