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기사왕의 봉인이 풀린 다음 날.
셀리버트의 대장로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엔 일곱 대장로 모두가 빠짐없이 참석한 상태였다
처음 셀리버트에 왔을 때만 해도 황금관 대장로만 체면 상 참석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곱 대장로 모두가 모인 것이다.
이전과는 전혀 딴판인 분위기.
문제는 대장로들도 석상의 존재에 대해선 다들 모르고 있었다.
워낙 신성시 여기는 장소다 보니 엘프들의 출입조차 드문 땅.
게다가 기사왕이 봉인된 건 고작 20여 년 전이다.
인간인 나한테야 꽤 먼 과거의 일이지만, 수백 년을 사는 엘프들에겐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최근의 일.
직경만 백 미터에 달하는 세계수 근처에 숨겨진 석상 하나쯤은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대장로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이유.
카잔 황제의 잔당들이 세계수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3년 전 크로드 단 한 놈한테 뚫렸을 때도 난리가 났었다.
나름 대비한답시고 엔트들까지 깨워 방비를 강화시켜 놨건만 또 뚫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셀리버트의 땅에서 연합과 제국의 싸움이 벌어졌다.
대장로들 입장에선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긴 했다.
일단 석상에 대해선 비밀로 했음에도 대장로들은 다들 똥 씹은 얼굴이었다.
“…….”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대장로들의 방.
그 앞에 세계수 근처로 출입을 허가해 준 장로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방금 막 사정청취가 끝난 참이었다.
일단은 우호를 목적으로 세계수 관람을 허락해 준 걸로 하고, 때마침 카잔 황제의 잔당과 마주친 걸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이를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디아가 피칠갑까지 하면서 싸운 덕분에 우리가 놈들과 적대하고 있었단 건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 피 때문에 봉인이 풀린 거지만.’
애초에 우리가 세계수로 가지 않았더라도 기사왕의 봉인은 풀렸을 거다.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봉인이 풀리고 한참이나 지나서 이를 알아차리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게 엔트론 부족하다 하지 않았소!”
침묵을 꺤 대장로 하나가 소리쳤다.
엔트.
분명 강한 몬스터긴 했지만 그래 봤자 몬스터.
적당히 강한 사역술사 앞에선 얌전한 애완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 그렇담 엘리멘탈 레인져라도 배치하란 말이오? 더러운 피스트 놈들과 대립하기에도 부족한데! 어디 엘리멘탈 레인져가 샘솟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런 얘기가 아니잖소!”
한 대장로에게서 시작된 소란은 금세 다른 대장로들에게까지 퍼졌다.
서로 네 잘못이니 뭐니 따지며 시끌벅적했다.
이게 수백 년을 산 이들의 대화라니.
역시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았다.
“…….”
개중 유일하게 입을 굳게 다문 이가 있었다.
수리 발톱 부족의 대장로.
녀석은 시끌벅적한 다른 대장로들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점점 대장로들의 감정이 격앙될 때쯤.
“잠시 휴식을 갖는 게 어떻겠습니까.”
“…….”
대장로들을 진정 시키는 그의 말에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무의미한 논쟁인 건 저들도 잘 아는 터라 모두 착잡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럼. 다들 머릴 식히고 오시길 바랍니다.”
“크흠……!”
수리 발톱 대장로의 말에 몇몇 녀석들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게 내가 알기론 수리 발톱 대장로는 대략 이백 살 남짓한 나이다.
나에 비하면 꼬부랑 할배나 다름없었지만, 대장로들 축에선 새파랗게 어린 축에 속했다.
지금 먹을 거에 정신이 팔려서 세계수까지 안내했던 황금관 엘프 장로, 재수 없으면 덤터기 쓰게 생긴 저 녀석보다 한참이나 어렸으니까.
소설에선 딱히 비중 있게 나오진 않았다.
고리타분한 늙은이들과 달리 조금 깨어 있는 정도랄까?
비중을 따지기도 전에 셀리버트는 금방 초토화된다.
폭주한 엔트들의 첫 희생양으로서 퇴장했다.
“…….”
“…응?”
수리 발톱 대장로가 날 똑바로 쳐다본 채로 입을 뻥긋거렸다.
‘지금 바로 날 찾아와라.’
녀석의 입모양은 그랬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갤 갸웃하자, 녀석의 입꼬리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그렇다는 건 제대로 봤단 소리였겠지.
“백작님. 보셨습니까?”
옆에서 프리아나가 물었다.
눈썰미 하난 대단한 녀석답게 프리아나도 그의 입모양을 읽은 모양이다.
“그래.”
“어쩌실 생각이시죠?”
“…어쩌겠어. 만나 봐야지.”
여러모로 수상쩍은 엘프다.
대륙의 그 누구도 몰랐던 석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런 이유 탓에 더더욱 만나 보고 싶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구시렁대며 자릴 뜨는 대장로들.
그런 녀석들의 뒤를 수리 발톱 대장로도 조용히 따라 자릴 떴다.
“가 보자고.”
*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셀리온의 복도를 따라나섰다.
난 일단은 혼자 녀석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너희들은 적당히 대기하고 있어라.
“네. 백작님.”
어떤 얘기가 오갈지 모르는 상황에, 필요 이상의 인원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수리 발톱 대장로를 따라가려는데.
“…백작님.”
디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백작님께서 알려 주신다던 비밀 말입니다…….”
“아.”
디아는 씁쓸한 눈빛으로 미스릴 건틀렛을 내려다봤다.
다른 이들에게 블랭크란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도 빼먹지 않고 항상 끼고 있었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푸르스름한 건틀렛.
지금 녀석이 보고 있는 건 미스릴 건틀렛의 은은한 광택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너머로 감춰진 맨들맨들한 맨손.
이 세상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어야 할 랭크가 없는 그 손.
게다가 지난번 전투 때 느꼈을 거다.
자신은 특이한 걸 넘어 이상한 몸이라고.
파산검에 하복부를 꿰뚫린 치명상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치유됐다.
지금껏 그저 남들보다 회복력이 빠르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거다.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어제 같은 치명상을 입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제 보여 준 녀석의 회복력은 그런 수준을 벗어났다.
그 어떤 몬스터보다 더 괴물 같은 몸.
바보가 아닌 이상 제 몸에 의문을 갖기엔 충분했다.
턱.
난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세한 떨림이 어깨에 얹은 손을 타고 전해졌다.
“…곧 알게 될 거다.”
“전… 괴물인 건가요?”
“…푸흐흐!”
나지막이 내뱉은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괴물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 나도 방황했던 시절이 있지.”
“…….”
“그러다 옆 영지 주점에 들렀는데 말이야. 내 영지민들이 그 얘길 하더군. 개 같은 놈이라고.”
“그런 불경한 말을…….”
“그럼 내가 개가 되는 건가?”
“…네?”
“난 인간이다. 그건 변하지 않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고, 숱한 모욕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고 내가 달라진 건가?”
“…….”
“개 같은 놈이라 불리던 공자도 나고, 개천에서 용 난 놈이라 불리는 것도 나다.”
디아는 생각에 잠긴 듯 묘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넌 너다.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개처럼 구른 것도 너고,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치명상에서 회복된 것도 너고.”
이 소설의 주인공.
나보다 더한 역경도 이겨 내 결국엔 이 소설 최악, 최강의 빌런을 상대하는 놈.
비록 그 마지막 이야기는 끝까지 보지 못했다지만, 난 녀석의 길을 똑똑히 봐 왔다.
가끔 양아치 같긴 해도 심성만큼은 선한,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주인공이란걸.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대사였지만, 내가 말해 놓고도 제법 괜찮은 말 같았다.
‘소설에서 주인공 녀석이 한 얘기긴 하지만.’
자신이 오베론이 만든 생명체에 불과하단 걸 깨닫는 주인공.
그때 녀석이 혼자 독백할 때 나온 대사다.
“…네. 백작님.”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개운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아직 모든 비밀을 알려 주기엔 이르지만, 언젠간 그날이 올 거다.
아마 오늘 일은 그날의 녀석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후후.”
난 녀석에게 한 번 싱긋 웃었다.
프리아나도 그런 녀석의 옆에서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녀오십쇼. 백작님.”
“그래.”
벌써 수리 발톱 대장로는 어디론가 가 버린 뒤였다.
아마 자기 집무실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서둘러 녀석이 향한 곳으로 따라가자 큼지막한 문을 가진 방이 나왔다.
방엔 문 크기에 걸맞게 큼직한 명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엘프들이 쓰는 언어로 되어 있어 읽을 순 없었지만 수리 발톱 대장로의 집무실인 건 분명했다.
명패 옆에 수리 발톱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으니까.
“들어와라.”
“…….”
문 건너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리 발톱 대장로의 목소리였다.
공허하게 울리는 소리를 보아 아마 방에 혼자 있는 듯했다.
“실례하겠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집무실에 수리 발톱 대장로가 다릴 꼰 채 홀로 앉아 있었다.
“…….”
탁.
들어온 문을 닫고 녀석의 반대편에 앉을 때까지, 그는 묘한 미소만 띄고 있을 뿐이었다.
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확실히 비교적 젊은 대장로라 그런지 피부에 주름 한 점 없었다.
언뜻 봐선 내 삼촌뻘 되는 외모라고 해야 하나.
‘실제론 증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는 되는 나이지만.’
짱짱하게 묶은 긴 금발과 주름 한 점 없이 탱탱한 피부.
굵은 턱선만 없으면 여자라 해도 믿을 외모다.
하지만 묘한 시선을 담은 녀석의 두 눈.
이백 년이란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듯,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나.”
“아니 뭐 그냥…….”
“후훗. 재밌군.”
“…재밌다고?”
수리 발톱 대장로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엘프들이 금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죠.”
“그 이유에 대해서도 대강은 알 테고.”
“…수명이 길어서 아닙니까?”
그는 내 말에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어깰 으쓱하며 입을 이죽였다.
“하지만 난 그게 맘에 안 들더군.”
“음.”
“뭐 대부분의 엘프들은 만족하며 살고 있지. 그거에 대해서 뭐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가슴 한켠에 뭔가 부족하단 감정은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더군.”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 귀 큰 녀석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가장 중요한 거라.
아무래도 의식주가 아닐까?
그중에서도 식(食). 아무리 강한 자라도 먹을 게 없으면 굶어 죽으니까.
오히려 강할수록 더 고통스럽게 죽는다.
녀석의 물음에 ‘먹을 게 제일 중요하죠.’라고 하려다 참았다.
나한테야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지만, 평범한 놈들이 들었을 땐 상당히 모양 빠질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후후. 괜찮은 대답이군.”
다행히 녀석은 뭉뚱그린 대답에 만족한 듯했다.
“내 경우에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재미다.”
“…재미?”
틀린 말은 아니다.
뭐든 사는 게 재미있어야 삶의 원동력이 되고 하는 거니까.
“하지만… 여긴 딱히 재미있는 게 없지 않습니까.”
주변에 온통 풀떼기밖에 없는 셀리버트에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먹을 것도 딱히 없고.
“그거야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 않겠나.”
“…그렇죠.”
“내 경우엔 재미를 찾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지. 궁술 랭크에도 재미를 찾아보고, 마법 랭크에도 재미를 찾아봤다.”
“…….”
“뭐 덕분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장로까지 오를 순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속 공허함을 채울 순 없더군.”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온 난 쏘아붙이듯 녀석에게 말했다.
하지만 수리 발톱 대장로는 계속해서 자기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그러다 흥미로운 녀석을 찾았지. 이십여 년 전에.”
“이십여 년 전이라면…….”
온 대륙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였던 시기다.
“그런 놈이 딱 둘 있었지. 하난 피스트 왕국의 왕자란 녀석이었다.”
“호오.”
그러고 보니 셀리버트의 참전 당시 수리 발톱 대장로가 강하게 참전 의사를 밝혔었다.
그 이유가 단지 재밌어서라.
“뭐 그 결과는 그닥 좋지 않았지만. 덕분에 재미는 있었어.”
“그럼… 다른 하나는 누굽니까?”
난 녀석에게 물어보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한 남자가 떠올랐다.
수백 년을 사는 엘프가 흥미로워할 만한 미친 마법사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