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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51화 (151/222)

151화

“야, 야! 잠깐!”

크로드는 천천히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여기 있는 이들 중 나와 크로드 말곤 아무도 몰랐다.

“백작님? 갑자기 왜…….”

“이런, X팔! 당장 막아!”

“…네!”

“어딜!”

뒤늦게 움직여 봤지만 솔루스가 더 빨랐다.

녀석들과 우리 사이에 반투명한 막 같은 게 생겨났다.

프리아나가 서둘러 오러를 뽑아내 녀석의 방어막을 향해 내려쳤다.

콰직!

프리아나의 검격에 반투명한 막 위로 균열이 일었다.

“크윽……!”

솔루스는 침음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방어막을 향해 마나를 퍼부었다.

나도 용린검에 오러를 뽑아낸 채 가세했다.

녀석도 둘의 공격을 막을 순 없던 터라 균열은 계속해서 커져 갔다.

하지만 크로드의 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솔루스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곤 온 힘을 다해 우릴 막았다.

“비켜!”

“흐흐! 뭔가 있긴 하구만!”

“이익……!”

점차 석상과 가까워지는 크로드의 손.

녀석의 손을 흥건히 적셨던 디아의 붉은 피.

…파캉!

마침내 솔루스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디아의 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은 그대로 석상의 가슴팍에 닿은 뒤였다.

붉은 손바닥이 그대로 가슴팍에 찍힌 기사왕의 석상.

또아리를 튼 우로보로스의 문양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검을 잡은 손을 늘어뜨렸다.

“…젠장.”

“배, 백작님! 저게 대체 뭐길래…….”

“…알기 싫어도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쩌저적!

기사왕의 봉인을 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재료.

라크레시아의 피.

이를 한껏 머금은 석상은 그간 자신을 속박한 껍질을 깨고 부화하기 시작했다.

검술 랭크 8의 괴물.

저게 깨어나는 순간, 힘의 균형은 카잔 제국 측으로 크게 기울어진다.

“흐하하!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자 환호성을 내지르는 솔루스.

“…….”

크로드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얼굴로 조용히 석상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캉!

석상을 감싸고 있던 회색빛깔 겉껍질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눈처럼 흩날리는 파편 너머로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가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곳게 편 상체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자.

볼이 움푹 파여 들어간 채 굳게 닫은 입술은 조금 강인한 인상을 가진 평범한 중년 남성의 외모였다.

하얗게 센 짧은 백발의 남자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껏 움직일 수 없는 석상에 불과했던 기사왕.

녀석의 옅게 떨리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크로드와 솔루스.

기사왕이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자신을 깨우겠단 일념 하나로 수십 년간 달려온 두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하아.”

폐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묵직한 한 숨을 내뱉는 리온.

그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산자의 감촉을 만끽하려는 듯했다.

실컷 숨을 들이마시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군. 기사단이여.”

차가우면서도 중후한 음색.

가능하면 적으론 절대 삼고 싶지 않은 냄새가 풀풀 풍겼다.

“존안을 직접 뵐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솔루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녀석에게 첫 인사를 올렸다.

그에 반해 크로드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온은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스한 말 한 마딜 건넸다.

“고생했다, 크로드.”

“…감사합니다, 전하.”

소설에서 크로드는 기사왕이 직접 키운 몇 안 되는 수제자들 중 하나다.

오랜 세월 만에 극적인 재회를 한 터라 크로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원 내가 악역이 된 기분이네.’

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리고.”

리온은 부하들의 공을 치하하는 건 잠시 뒤로 미뤘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일행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녀석을 노려봤다.

“저, 저건 대체 뭐죠? 석상이 갑자기 어떻게…….”

“골렘……?”

프리아나와 디아는 뚱딴지 같은 소릴 했다.

녀석들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이다.

사람이 돌이 될 거란 건 생각 못할 테고, 그 돌이 다시 사람이 됐다는 건 더더욱 생각 못할 일이니까.

게다가 그 돌이라는게 과거 대륙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제국 제일의 검.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란 사실은 꿈에도 못 꿀 거다.

“…기사왕이라고 아나.”

“…네?”

“그야 알죠. 카잔 제국의 기사단장이었던 자 아닙니까.”

“카잔 제국의 기사단장……?”

잘 알고 있는 프리아나와 달리 디아는 처음 듣는 눈치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프리아나와 이십대 초반의 디아.

그닥 큰 나이 차이는 아니지만,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대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와 그러지 못한 세대.

이게 다 연합의 손길이 닿은 결과다.

제국의 두려움과 연합의 치부를 들키기 싫었던 연합.

놈들은 대전쟁 이후 의도적으로 제국의 흔적을 지웠다.

뭐 그런다고 고작 20년 사이에 모든 흔적을 지울 순 없다지만, 카잔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기사단장쯤은 희미하게 만들 수 있었다.

거의 평생을 제니스 기사학교에 살았던 터라 더욱 모를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자였지. 한때 탈리스, 오배론과 함께 무관의 왕이라 불리던 자였으니.”

“무관의 왕…….”

“그게 ‘저거’다.”

“…네?”

백발의 남자를 칭하는 칭호에 둘은 경악했다.

“그렇다는 건…….”

“그래. 검술 랭크 8의 괴물이란 거지.”

그것도 오베론의 마법으로 세월의 디버프 따윈 말끔히 씹어 먹는 상태.

“아마 전성기 탈리스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을 거다.”

“으윽…….”

프리아나는 절망적인 상황에 침음을 흘렸다.

화합의 섬에서 열렸던 연합 회담.

당시 분노한 탈리스의 힘을 직접 본 그다.

이미 잔뜩 노쇠한 몸을 이끌고도 연합의 기사단장을 쩔쩔 매게 만들었던 존재.

“…….”

스릉!

난 아무 말 없이 용린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지금 우리가 녀석에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모두 무의미한 저항일 뿐.

그렇다면 차라리…….

‘죽이기엔 아까운 몸이란 걸 알려 줘야지.’

황금 은행 습격 당시 바르카가 말했다.

‘쓸 만한 녀석이면 살려 둬라.’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희소식이라 해야 하나.

놈에게 내가 아는 정보로 협상을 해야…….

“이안 임페라.”

카이세리우스가 내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 방금까지 돌덩이였던 사람치곤 잘 알아보는군.”

“이 자식이……!”

왕에게 하는 말치곤 다소 예의 없는 발언에 솔루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후후.”

하지만 카이세리우스는 녀석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그렇지.”

놈은 사념만으로 날 봐 왔는지 오랜 친구라도 대하는 것마냥 인사했다.

평범한 담소나 다름없는 대화였지만, 왠지 모르게 오금이 저려왔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를 향한 원초적인 공포.

사자를 앞에 둔 토끼가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이제 어쩔 생각이지?”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에 녀석은 눈썹을 으쓱했다.

“그건 차차 생각해 봐야지.”

역시나 쉽게 알려 줄 수 없는 듯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회피했다.

“그럼…….”

“걱정 마라. 네 녀석한테 딱히 원한은 없으니.”

“…….”

“오히려 감사해야지. 네가 알려 준 정보 덕에 이 육신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이래 봬도 아는 게 많아서 말이야.”

그러니 오늘은 얌전히 물러가라.

어쩌면 서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녀석 입장에선 아직 라크레시아와 서열 정리도 안 끝났으니.

나중에 도움 될 만한 정보를 줄 수도…….

“후훗.”

녀석은 별안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

이유는 모르겠다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사과하지. 오랜만에 웃긴 얘길 듣다 보니 그만.”

“…뭐가 웃기단거지?”

“…하아.”

카이세리우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는 게 많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모르지만.”

“…뭣?”

녀석의 눈빛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그리움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라크레시아의 몸을 본떠 만든 육체.

그러다보니 젊은 시절 카잔 황제와 똑 닮았다는 묘사가 있었다.

지키지 못한 옛 주인을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럼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모른다.’는 게 무슨 소리지?

“임페라 백작님!”

녀석과 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엘프의 목소리였다.

방금 소동에 솔루스가 쳐 놨던 결계가 결국 파괴된 듯했다.

“찾았… 응?”

길잡이 엘프 녀석이 한 손에 신기하게 생긴 약초를 꼬나 쥐곤 나타났다.

내가 말한 천사초라는 약초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세상에 저게 진짜 있을 줄이야.

보통 같았다면 칭찬이라도 해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은 우릴 쳐다보며 영문 모르겠다는 듯 고갤 갸웃했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셋에 불과했던 인간이 배로 불어났으니.

“이게 어떻게 된……?”

“그럼. 이만 실례하지.”

카이세리우스는 솔루스를 향해 고갤 까딱였다.

탁!

가볍게 고갤 끄덕인 솔루스는 그대로 바닥에 지팡일 꽂았다.

바아앙!

이내 거대한 룬 문양이 펼쳐졌다.

대공간 전이 마법진.

순식간에 고난이도의 마법을 펼친 솔루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진 위로 카이세리우스가 올라서고, 뒤이어 크로드도 따라 나섰다.

“우린 또 보게 될 거야, 이안 임페라.”

“…가능하면 안 그랬음 싶은데.”

“후후.”

녀석은 하얗게 샌 백발을 흩날리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파앗!

이내 밝은 빛을 발한 룬 문양은 그대로 마법진 위에 올라선 이들을 데리고 감쪽 같이 사라졌다.

저 멀리 엔트들의 영역에서도 자그마한 빛줄기가 솟아 올랐다.

아마 바르카이지 싶다.

“…백작님.”

사그라드는 빛기둥을 보며 프리아나가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젠장.”

카잔 제국 최강의 전력이 눈을 떴다.

당장 라크레시아만 해도 버거운 상황이건만, 기사왕까지 등장하다니.

“임페라 백작! 지금 저 녀석들이 뭔지 당장 해명해야 할 거요!”

길잡이 엘프 녀석과 한창 천사초를 찾던 세리트가 소리쳤다.

느닷없이 등장한 3명의 괴한.

셀리버트의 엘프들 입장에선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먹을 거에 정신이 팔려 있던 길잡이 엘프도 사태가 심각한 걸 느꼈는지 표정이 굳었다.

난 그런 녀석들에게 한 가질 물었다.

“…세계수에 위치해 있던 석상. 뭔지 아십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머리 돌리지 마십쇼!‘

“…어엇?”

으름장을 놓는 세리트완 달리 고참 엘프 녀석은 뭔가 아는 눈치다.

녀석은 석상이 놓여 있던 자릴 살피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뭔가 아나요?”

“실은 저도 뭔진 모릅니다만… 일전에 수리 발톱 대장로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세계수에 있는 석상이 대체 뭐냐고.”

“…그런 게 있었습니까?”

세리트의 물음에 녀석은 고갤 끄덕였다.

“대전쟁 이후로 생긴 거다. 정체를 아는 것도 나 같은 길잡이들이나 아는 거지.”

“그런…….”

“대장로님께 여쭤보니 딱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시더군.”

“그게… 뭐죠?”

“대재앙.”

길잡이 엘프는 대장로의 말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그분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건…….”

“문제는 지금 그게 사라졌다는 거지.”

“으음…….”

녀석은 걱정스러운 듯 침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수리 발톱 대장로가 석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말하던데.

그렇다는 건…….

“이봐. 엘프 친구들.”

“네?”

“그쪽이 우리 인간들을 싫어하는 건 알겠다만… 상황이 좀 바뀌었지?”

“…….”

난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그 수리 발톱 대장로라는 사람. 다시 만났으면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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