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50화 (150/222)

150화

“신기한 부하를 뒀군. 이안 임페라.”

좀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크로드도 디아를 보곤 눈썹을 으쓱했다.

녀석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솔루스는 달랐다.

“…설마?”

마법에 능통한 녀석이라 그런지 디아의 정체에 뭔갈 떠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다.

지금 녀석들의 목적은 기사왕의 봉인을 푸는 거고, 난 그걸 막는다.

그게 전부다.

바뀐 건 없다.

“…프리아나. 디아. 이슬린. 싸울 준비부터 해라.”

“하, 하오나 백작 각하! 이 어린 친구는…….”

프리아나는 디아를 걱정되는 듯 망설였다.

꽤나 많은 양의 피를 쏟은 터라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디아의 상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멀쩡했다.

“저, 전 괜찮습니다.”

이만한 부상은 녀석도 처음인 듯했다.

말끔히 아물어 가는 치명상에 놀란 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한 건 이 싸움이 끝나면 얘기해 주지.”

“…마치 끝내려면 끝낼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크로드는 파산검을 고쳐 들곤 자셀 잡았다.

지금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이상함을 느낀 엘프들이 눈치를 채고 지원군을 부를 때까지 버티는 것.

슬슬 세리트가 수상함을 느끼고 우릴 찾으러 다니고 있을 거다.

솔루스의 결계 탓에 갑자기 세계수 앞에서 사라진 걸로 보일 테니까.

우리 일행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는 줄 알고 레인져들을 잔뜩 이끌고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때까지 우리들이 버틸 수 있을지는 둘째 치고, 일이 틀어졌다간 세리트가 죽을수도 있다.

소설 줄거리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연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그렇담 남은 선택지는 하나.

크로드의 품속에 있는 라크레시아의 피.

그것만 빼앗는다면 녀석들도 하는 수 없이 도망칠 거다.

“이슬린. 미안하지만 솔루스를 잠시 맡아 줘라.”

“…최대한 해 보겠습니다.”

“프리아나, 디아. 너희 둘은 나랑 저 검은 머리 녀석을 맡는다.”

“가능…할까요?”

프리아나는 지난날 녀석과 맞붙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물론 불가능하겠지.”

난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언젠 가능한 일만 했나?”

“후후, 그렇죠!”

프리아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주인공 녀석도 잠시 동요하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에고소드 황혼을 집어 든 녀석은 특유의 투명한 오러를 뽑아냈다.

“호오.”

흔히 볼 수 없는 빛깔의 오러에 크로드는 흥미로운 듯 고갤 까딱였다.

“하압!”

힘찬 기합과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프리아나.

묵직한 첫 발자국에 세계수의 뿌리가 움푹 파여 들어갔다.

이내 쏜살같이 내달린 녀석의 검에 일격이 들어갔다.

속검의 프리아나.

과거 그가 자신하던 속검은 크로드에게 무참히 짓밟혔었다.

녀석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듯 첫 검격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프리아나의 검선이 먼저 앞섰고, 허공을 찢는 파공음이 뒤따랐다.

콰아앙!

뒤이어 터져 나오는 굉음.

둘은 오러 소드를 맞댄 채 서로를 노려봤다.

“이젠 슬슬 기사 태가 나는구만그래.”

“…크윽!”

프리아나는 두 오러의 격돌에 침음을 토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랭크는 크로드 쪽이 우위였나 보다.

녀석은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껏 빈트하겐과 수 없이도 많은 검을 섞어 봤다.

현 아이소테르 최강의 검에 비하면 크로드의 검은 버틸 만했다.

“디아!”

“네!”

프리아나가 힘겹게 일합을 받아 낸 사이, 뒤이어 주인공 녀석도 가세했다.

분명 일대일 결투면 프리아나가 크로드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

자잘한 랭크를 더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검술 랭크 외길만 걸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정당당한 결투가 아니다.

녀석의 품 안에 있는 그것만 빼내면 끝나는 진흙탕 싸움.

카앙!

곧이어 디아의 검까지 크로드를 향해 내리쳤다.

“으읏…….”

다구리에 화가 잔뜩 난 크로드.

미안하지만 아직 하나 더 남았다.

파앗!

용린검을 뚫고 튀어나온 강렬한 오러.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검이 녀석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 자식들이……!”

녀석은 파산검으로 둘의 검을 올려쳐 버렸다.

그저 완력만으로 공격을 받아 낸 녀석은 그대로 내 검을 강하게 후려 쳤다.

카앙!

그간 수련을 게을리 한 탓일까.

그대로 전신에 힘이 쭉 빠지며 용린검이 하늘로 솟았다.

덕분에 훤히 드러난 몸통 쪽으로 크로드가 손을 내질렀다.

콰악!

“커헉!”

녀석은 한쪽 손으로 내 목덜미를 움켜쥔 채로 파산검을 휘둘렀다.

저토록 거대한 대검이 한손으로 쉽게 휘둘러진다니.

뒤늦게 프리아나와 디아가 달려들어 봤지만 모두 파산검의 일격에 튕겨져 나갔다.

“백작님!”

“그 손 당장 놔라!”

“흥. 힘 없는 놈의 으름장이라니. 그만큼 한심한 것도 없지.”

콰드득!

“으윽……!”

목덜밀 움켜쥔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압력이 전해졌다.

“이제 끝이다. 이안 임페라.”

“크흐흐! 이대로 죽이려고? 아직 죽이긴 좀 아깝지 않나?”

“…….”

녀석은 내 말에 잠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아쉽긴 할 거다.

소설의 줄거리가 많이 틀어지긴 했어도 그걸 아는 건 나 혼자뿐.

이유는 모르겠다만 뭔갈 잔뜩 아는 지식 보따리 같은 놈을 그냥 죽여 버리긴 아깝겠지.

“…….”

프리아나가 슬쩍 움직이려 하자 크로드가 다시 움직였다.

놈의 한쪽 발로 모여들기 시작한 마나. 그대로 마나를 한껏 머금은 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일단 주변을 정리할 생각인 듯했다.

익숙한 공격이다.

주변 이들에게 마나를 강제로 주입하는 스킬.

나도 몇 번 따라 해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원본을 따라가긴 힘들달까.

하지만 몇 번 따라 해 보면서 느낀 게 있다.

저 기술에도 약점이 있단 걸.

…콰직!

녀석의 발치가 땅에 닿으려는 순간.

난 있는 힘껏 놈의 정강일 걷어찼다.

“으윽!”

아무리 단련한 놈이어도 정강이를 걷어차이면 아픈 법이다.

별안간 느껴지는 통증에 녀석의 집중이 흐트러졌다.

물론 나도 엄지 발가락이 부러진 듯했지만 괜찮다.

빈틈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파앗!

녀석의 기술이 무위로 돌아가며 생긴 작은 틈.

프리아나와 디아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둘의 검이 크로드를 향해 휘둘렸다.

…서걱!

살갗이 베여 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허공에 피가 솟구쳤다.

“크윽!”

피의 주인은 다름 아닌 디아였다.

짧은 틈을 노린 줄로만 알았는데.

크로드는 되려 프리아나의 검을 받아치곤 그대로 파산검을 디아의 어깨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다만. 거기까지다.”

“…프리아나 님! 지금입니다!”

“뭣……?”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갈 치명상이었지만 디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깨를 깊숙이 파고든 파산검.

디아는 피를 쏟아 내는 와중에도 크로드의 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 이 자식이!”

크로드가 뒤늦게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디아는 이 악물고 파산검을 붙잡았다.

붉은 피가 디아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것 없는 출혈량.

디아는 악으로 이를 견뎌 냈다.

“하압!”

디아가 치명상을 감수해 가며 만든 짧은 시간.

꼼짝 달싹 못하는 크로드를 향해 프리아나의 검이 내려쳤다.

서걱!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다.

파산검을 내팽개치고 뒷걸음질 친 크로드.

덕분에 녀석에게 붙잡혀 있던 나도 풀려날 수 있었다.

녀석의 한쪽 뺨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법이군.”

녀석은 의외로 처연한 말투로 나지막히 말했다.

소설에 나오던 녀석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주인공을 수시로 궁지에 내몰았지만 주인공이 성장할수록 묘한 성취감을 느끼던 녀석이었으니까.

비록 다굴이긴 해도 프리아나에게 일격을 허용했단 사실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꽤나 감동적인 장면이긴 했다.

하지만 이내 녀석의 표정이 뒤틀렸다.

품속에 고이 넣어 둔 뭔가가 사라진 걸 깨달았으니까.

“…어엇?”

“흐흐.”

난 녀석에게 자그마한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검붉은 빛깔의 액체.

난 체내에 남은 모든 마나를 쥐어 짜내 유리병을 움켜쥔 손으로 모았다.

“파이어 볼.”

이내 터져 나오는 강렬한 화염.

바위조차 산산조각 낼 강력한 불꽃은 그대로 유리병을 불태웠다.

화르륵!

금세 한 줌의 재로 녹아내린 라크레시아의 혈액.

이를 크로드가 얼빠진 얼굴로 바라봤다.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의 봉인을 깰 가장 중요한 재료.

그게 방금 사라졌다.

뭐 나중에 다시 구해 올 수도 있지만 일단 급한 불은…….

“이 X끼가……!”

“앗.”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던 크로드.

대전제에서 녀석의 정체를 까발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눈앞의 모든 걸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강렬한 살의.

녀석의 온전한 살의는 모두 날 향해 있었다.

오러가 깃들었는지 붉게 충혈되기까지 매서운 눈빛의 두 눈.

오랜만에 오금이 저릿해지는 살의가 느껴졌다.

푸각!

“크윽!”

녀석이 파산검을 향해 손짓하자 디아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이 뽑혀 나왔다.

허공을 맴돌던 파산검은 그대로 크로드의 손아귀로 향했다.

“자, 잠깐 진정…….”

방금까지완 다른 수준의 오러가 파산검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껏 솔루스의 결계 탓에 무작정 힘을 쓸 순 없었던걸까.

하지만 이제 볼 장 다 본 녀석은 결계째 우리 모두를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크로드! 멈춰라!”

이슬린과 싸우던 솔루스도 황급히 크로드를 제지하고 나섰다.

“허억……! 허억……!”

다행히 이슬린은 무사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긴 했지만.

“이 쓰레기들을 살려 두란 말인가?”

“아니!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란 거지! 여기서 더 난동을 부렸다간 엘프 놈들이 눈치챌 거다. 그럼 지금껏 한 게 모두 헛수고가 된다고!”

“이익……!”

크로드는 붉게 달아오른 두 눈으로 우릴 노려봤다.

정확히는 나 하나였지만 프리아나와 디아가 녀석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래. 오늘만이 날은 아니라구. 나중에 다시 재료 챙겨 오면 되잖아?”

“네놈은 닥쳐라!”

“흐흐.”

목을 졸린 게 억울해서라도 괜히 한 번 놀려 줬다.

그러다 문득 봉인을 풀 재료가 떠올랐다.

조화를 풀기 위해 필요한 재료.

랭크 9에 버금가는 마나와 이를 담을 그릇.

그리고 카잔 라크레시아의 피.

이는 곧 주인공 디아의 피이기도 했다.

디아의 본체는 다름 아닌 카잔 라크레시아니까.

오베론이 기사단의 유물을 활성화시키는 재료로 라크레시아의 피를 선택한 이유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영겁의 기사단들 말로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기사단이 부활한 거라 하지만.

주인공의 비밀을 아는 내가 생각했을 땐 아니다.

오직 오베론만이 봉인을 풀 수 있게 하기 위한 제약.

오베론 입장에서도 온 대륙을 집어삼킬 수 있는 무력을 그저 없애 버리긴 아쉬웠다.

만에 하나 랭크 9를 달성한 누군가가 또 나타났을 때, 오베론을 도울 하수인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쓰기 위한 녀석 나름의 보험.

멸망한 제국의 마지막 남은 핏줄 하나.

그마저도 오베론이 만든 인조 생명체다 보니 그 사실을 들킬 확률은 거의 없었다.

‘디아는 오베론이 제물로 쓸 재료였다.’

그게 소설을 본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라크레시아의 존재는 오베론도 몰랐다.

제국의 몰락을 앞둔 카잔 황제가 자신이 가진 모든 고대인의 유물을 동원해 자신의 아들을 봉인한 거니까.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온거다.

여러모로 트롤링이 심한 녀석이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일단 녀석들이 가져온 유리병은 불태워 버리긴 했지만, 크로드의 파산검에 잔뜩 묻은 디아의 피라면…….

‘봉인 해제도 가능하지.’

실제로 디아의 피로 조화를 푸는 장면도 나온다.

상대가 영겁의 기사단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녀석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디아의 피로도 봉인 해제가 가능하단 걸.

난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 미소 지었다.

두근.

“…왜지?”

“뭐?”

별안간 뜬금 없는 말을 내뱉는 크로드.

뭐가 왜냐는 거지?

“…네 녀석. 목소리가 떨리는군.”

“…응?”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분노로 격앙되어 있던 크로드의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그럴수록 내 심장을 빠르게 뛰었다.

설마…….

“뭔가 있군.”

“그럴 리가.”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검술 랭크 7의 예리한 감각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만으로 녀석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봤다.

“왜일까. 봉인을 풀 가장 중요한 재료가 사라졌는데도 뭔갈 걱정하고 있다니.”

“…….”

두근.

진정시키려 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두근. 두근.

그럴수록 크로드는 자신이 가진 사실들을 하나씩 이어 갔다.

처음엔 전혀 연관 없는 것처럼 보이던 정보.

이는 점차 퍼즐 속 조각처럼 하나 둘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은 자신의 손을 흥건히 적신 피를 내려다봤다.

“…….”

마침내 모든 걸 깨달은 녀석은 흰 이가 드러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