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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49화 (149/222)

149화

“…크로드.”

검은 흑발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한 남자.

꽤나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좀처럼 잊기 어려운 얼굴이다.

그리고 그 옆에 반질반질한 머리를 한 녀석의 동료도 서 있었다.

크로드와 솔루스.

둘은 어느새 디아와 이슬린을 인질로 잡은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크윽…….”

디아는 땅바닥에 처박힌 채로 크로드의 발치에서 침음을 흘렸다.

거대한 파산검은 디아의 등 뒤를 겨눈 채로 언제라도 내려찍을 기세였다.

사실 디아야 크게 걱정은 안 된다.

저 파산검에 갈기갈기 찢겨도 다시 되살아날 테니까. 그걸로 디아 녀석이 꽤나 충격을 받긴 하겠지만.

그거야 고대인의 피가 어떻게 하다 보니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가진 거라 둘러대면 되는 거고.

문제는 이슬린이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솔루스의 지팡이가 푸른빛을 일렁이는 채 이슬린의 목덜밀 겨누고 있었다.

허튼 수작이라도 부렸다간 언제라도 마탄을 날려 버릴 거다.

“다, 당신은……!”

프리아나는 크로드를 보곤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때 녀석과 검을 섞어 보겠단 일념 하나로 왕가 호위 기사란 자릴 버린 프리아나.

크로드가 영겁의 기사단 출신이란 얘길 들었을 때도 마냥 적의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합의 치부를 낱낱이 봐 온 그였기에, 쫓기는 처지임에도 그만한 경지에 오른 걸 대단히 여겼을 거다.

“…여기 온 건 너희 둘이 전분가?”

“…글쎄”

크로드는 애매한 대답만 짧게 할 뿐이었다.

영겁의 기사단.

소설에서 녀석들은 주로 셋이 한 팀으로 움직였다.

크로드, 솔루스, 그리고 바르카.

황금 은행에서 만난 뒤로 본 적 없는 녀석이다.

괜히 서큐버스로 내게 정보를 꺼내려다 역관광시킨 건 기억 나는데.

“그 여잔 잘 있나? 죽은 건 아니지? 그럼 좀 미안해서.”

“…후후.”

작게 웃음을 흘리는 크로드.

슬쩍 도발이나 해 볼까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보아하니 멀쩡히 살아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엔트 영역을 어떻게 뚫었데.’

아마 바르카가 여기서 활약해 준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세계수를 지키는 엔트라 해도 결국은 몬스터.

바르카의 사역술 앞에선 별다른 힘을 못 썼을 거다.

바르카의 권속으로 만드는 것까진 힘들어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녀석들이 무사히 세계수까지 도달하게 만든 거겠지.

“인질을 잡다니! 기사란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푸흐흐… 기사? 저런 놈을 섬기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는군.”

“뭣이……!”

프리아나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으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어허. 움직이지 마라. 동료들이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그러자 솔루스의 지팡이에서 빛이 커져 갔다.

“으윽…….”

하는 수 없이 프리아나는 검집에서 손을 뗀 채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프리아나.”

“하오나 백작님……!”

난 억울해하는 프리아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용하다.

소란을 듣고 천사초를 찾던 엘프 녀석들이 슬쩍 들를 때도 됐는데.

하지만 녀석들은 마치 딴 세상에 가기라도 한 듯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귀가 먹먹한 게…….

“흐흐. 미안하지만 네 녀석이 기대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미 결계까지 다 쳐 놨거든.”

“…쳇.”

슬쩍 주윌 살펴보니 녀석들과 우리 주위로 옅은 막 같은 게 펼쳐진 뒤였다.

이럼 엘프들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울 텐데.

“…….”

“…….”

한참을 서로 말 없이 대치하던 녀석들과 우리 일행.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거라.”

머릿수야 우리가 많긴 해도 저쪽은 벌써 인질을 둘이나 잡은 뒤였다.

게다가 크로드와 솔루스가 어디까지 성장했는진 모르겠다만.

크로드에게서 풍기는 심상찮은 기운은 예전 검술 랭크 6의 크로드가 아닌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마치…….

빈트하겐 칼로스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불가능할 건 없었다.

크로드도 소설에서 랭크 7까지 달성한 괴물 중에 괴물이긴 했으니까.

그러다 결국 주인공한테 죽긴 했지만.

녀석들 입장에서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 여기서 우릴 죽여 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지만.

그랬다간 기껏 힘들게 잠입해 온 보람이 사라진다.

엘리멘탈 레인져들의 집중 포화라면 아무리 녀석들이라도 무사하긴 어려울 테니까.

그건 둘째치고 녀석들이 이 위험천만한 땅까지 잠입해 온 가장 큰 이유.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녀석의 부활도 물 건너간다.

‘잠깐…….’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재료는 다 모은 건가?

다른 재료는 다 있겠지만, ‘조화’를 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재료.

카잔 라크레시아의 피.

하지만 녀석들 중 라크레시아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직접 오지 않고 녀석들만 여기 왔다는 건…….

“…그렇군.”

상황 파악을 끝마친 난 녀석들을 향해 씨익 미소 지었다.

내 미소를 보자 크로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또 무슨 개짓거릴 하려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옆에 솔루스는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난 안다.

지금 왜 여기 라크레시아가 없는지.

“아직 서열 정리가 안 끝났나 보구만.”

“…….”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 못 하는 크로드.

태연함을 유지하던 솔루스의 두 눈동자도 옅게 흔들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너네들이 섬기는 ‘그분’이랑 ‘그 녀석’ 얘기지.”

“으읏…….”

솔루스는 내 말에 침음을 흘렸다.

지난번 바르카가 말했던 ‘그분’.

그건 카잔 라크레시아가 아니다.

녀석은 지금까지 고대인의 유물에 의해 봉인됐다가 깨어났다.

고작해야 스무 살이 조금 넘는 어린 나이.

녀석이 분에 넘치는 힘을 갖고 있긴 해도 그만한 지혜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

지금껏 영겁의 기사단을 지휘하던 건 라크레시아가 아니다.

리온 카이세리우스.

정확히는 한때 기사왕이었던 자의 사념.

육신도 없이 그저 사념 덩어리인 채였지만, 녀석은 사념만으로 남아 영겁의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뭐 나중 가서 봉인을 풀고 제 육신을 찾긴 하지만.

문제는 여기 있다.

지금껏 카잔 황제의 잔당은 라크레시아가 아닌 리온의 명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등장한 카잔 황제의 아들.

녀석이 어마 무시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카잔 황제의 잔당을 규합하진 못했다.

이미 리온 카이세리우스란 충분히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라크레시아는 영겁의 기사단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기사단이니 뭐니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제 주인 하나 지키지 못한 머저리들이라 생각했다.

나중 가선 라크레시아 혼자 모든 걸 할 순 없으니 영겁의 기사단을 휘하에 두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래서 라크레시아가 아니라 얘네들이 온 거였구만.’

소설에선 라크레시아가 직접 기사왕의 봉인을 푼다.

거기에 겸사겸사 세계수도 오염 시키고, 피스트 왕국까지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크로드와 솔루스뿐.

그렇다면 조화를 푸는 데 들어갈 재료는…….

“카잔 황가의 피는 있나?”

“…….”

여전히 대답 없는 녀석들이었지만, 솔루스가 순간 크로드의 품 속을 흘긋 바라봤다.

저기에 뭔가 있다.

카잔 라크레시아의 피가.

그렇다는 건.

‘저것만 없애면 된다.’

짧은 순간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내 몸은 곧바로 움직였다.

…콰앙!

바닥을 향해 크게 발을 굴렀다.

크로드가 자주 사용하던 기술.

적의 체내에 마나를 주입시켜 이질감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물론 목표는 크로드가 아닌 솔루스.

크로드 녀석한테는 씨알도 안 먹힐 테고, 솔루스라면 모른다.

파아앗!

쏜살같이 뻗어 나간 한줄기 마나는 그대로 솔루스의 단전을 파고들었다.

크로드는 고대인의 영약을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소설 설정에 의하면 솔루스는 다르다.

내 단전에서 뻗어 나온 마나의 줄기는 그대로 솔루스의 단전을 헤짚었다.

“커…헉……?”

급작스런 기습에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릴 내는 솔루스.

동시에 녀석이 겨누고 있던 지팡이가 빛을 잃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녀석의 빈틈을 만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변을 눈치챈 크로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간…!”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난 곧장 프리아나를 향해 소리치며 용린검을 뽑아 들었다.

“프리아나!”

“네!”

오랜 기간 합을 맞춰 온 덕분이었을까.

프리아나는 자잘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곧장 크로드에게 달려들었다.

디아는 녀석에게 맡기고, 난 이슬린을 붙잡은 솔루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딜 노려야 할까.

목?

아니다.

빗나가는 건 둘째 치고 괜히 녀석에게 마법을 사용할 시간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목표는 거기.

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지키고 싶어 하는 크나 큰 약점.

이슬린의 목덜밀 붙잡은 솔루스의 왼쪽 손.

녀석의 손을 향해 용린검을 휘둘렀다.

“으읏!”

녀석은 반사적으로 이슬린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사각!

덕분에 용린검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솔루스의 손목 대신 녀석의 소매 끄트머리만 살짝 베었을 뿐이었다.

“…죽어라!”

이슬린을 놓친 녀석은 곧바로 붉은 화염구를 소환했다.

녀석도 랭크만 놓고 본다면 부마탑주 자리까지 가능한 실력자다.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구가 이슬린과 날 향해 터져 나왔다.

“어딜!”

“하압!”

이에 질세라 이슬린도 얼음 벽을 겹겹이 소환했다.

순식간에 펼쳐진 차가운 냉기에 숨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이슬린도 그간 마법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단은 날 보필하면서도 틈틈이 마법을 배우고 랭크를 착실히 늘려 나갔다.

베로니아 가문 출신답게 약간의 지원만으로도 눈부실 만한 성장이 가능했다.

어느덧 이슬린의 마법 랭크도 5.

나와 같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원래 나보다 높은 녀석이긴 했지만.’

나도 녀석을 따라 방어막을 전개하고 단단한 나무 뿌리가 솟아나 화염구를 막아 냈다.

콰아앙!

이내 녀석의 화염구가 격돌하자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연기는 금세 사라졌지만, 소리가 꽤나 크게 났다.

“으읏…….”

황급히 주윌 두리번거리는 솔루스.

녀석에겐 다행스럽게도 반투명한 결계는 무사한 듯했다.

결계까지 쳐 논 상태에서 쏜 화염구라 다행히 이슬린과 나 둘만의 마법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저쪽인데.

“크악!”

녀석들 쪽에서 짧고 굵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디아.

크로드는 매정한 녀석답게 프리아나가 달려들자마자 지체 없이 검을 내질렀다.

뒤늦게나마 프리아나가 나서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르긴 했지만, 크로드는 이미 주인공 녀석에게 칼침 한 방 놓곤 잽싸게 내뺀 뒤였다.

“크윽…….”

“이,이런……! 백작님!”

등 뒤에서 들어간 깊은 검격.

이는 그대로 디아의 뱃가죽을 뚫고 지나간 뒤였다.

꽤나 많은 양의 피가 터져 나오자 프리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자식이! 이런 비열한 짓을……!”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움직이지 말라고.”

“으윽…….”

디아는 피를 철철 흘리며 괴로워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앞섰다.

물론 디아는 멀쩡할 거다. 만들어진 블랭크는 목이 잘려도 살아나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저만한 치명상을 입고 살아남았다는 걸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을까.

심지어 디아 자신도 이상하게 여길 거다.

프스스……!

“…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치명상.

이는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서로 대립하고 있던 이들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프리아나, 이슬린뿐만 아니라 크로드와 솔루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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