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어떻게 된 거냐! 엘프들이 여기에 오다니!”
“…….”
근처 나무에 몸을 숨긴 크로드는 세계수 근처까지 당도한 일행을 내려다봤다.
솔루스의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터라 들키지는 않은 듯했다.
“가만……. 저 녀석은 설마……?”
별안간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유심히 살펴 보던 솔루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열의 맨 앞과 뒤에 녀석은 그냥 엘픈 것 같고.
녀석들 사이에 한 놈은 솔루스도 아는 얼굴이었다.
특히나 크로드한테는 더더욱 잊을 수 없는 녀석이다.
이안 임페라.
3년전, 별 것도 아닌 거지 백작령의 공자였던 놈은 간댕이가 부었는지 크로드를 보기 좋게 골탕 먹였다.
녀석 덕분에 머나먼 셀리버트까지 똥개 훈련을 한 것뿐만 아니라, 대전제 우승 상품으로 걸려 있던 레서 드래곤의 마핵까지 빼앗길 뻔했다.
한때 제거해 버릴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분’의 명령에 하는 수 없이 내버려둔 상태였다.
듣기론 어찌어찌 아이소테르의 여왕까지 꼬셔서 출세했다던데.
“…어쩔 생각이지?”
솔루스는 이안을 매섭게 노려보는 크로드에게 물었다.
“방해되는 자는 제거한다.”
“…그랬지.”
나름 둘 사이에 연이 깊은 줄 알았는데.
어찌 보면 크로드답달까.
솔루스는 잠깐이나마 불안해했던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일단 지켜보자고. 섣불리 나섰다간 엔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래.”
셀리버트로 온 영겁의 기사단은 총 셋.
솔루스, 크로드 그리고 사역술사 바르카였다.
바르카도 이안과 만난 그날 이후로 몇 달간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이 구역 최강의 미친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미친년이긴 해도 사역 랭크만큼은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바르카가 엔트들을 진정 시킨 덕분에 솔루스와 크로드가 별 탈 없이 석상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었으니까.
‘…….’
크로드는 이안을 노려보는 한 편, 품 속에 고이 간직해 둔 자그마한 유리병을 매만졌다.
오베론의 마법을 깨부수기 위해 필요한 재료.
카잔 황제 아들이 가진 피.
어디까지나 이안이 말해 준 정보가 전부였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봤을 때 거짓일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안 임페라 저놈은 죽이지 마라.”
“뭐라고?”
“만에 하나 오베론의 봉인을 푸는 방법이 틀린 걸지도 모르니. 여차하면 팔다리만 잘라 둬라. 정보를 부는 데 사지가 필요한 건 아니니.”
“으음. 그래. 그래야지.”
솔루스도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둘은 여차하면 곧바로 전투에 돌입할 채비를 갖춘 채, 이안 일행을 지켜봤다.
* * *
대전쟁 전, 대륙엔 조금은 특이한 이명을 가진 셋이 있었다.
무관의 왕.
랭크 8을 달성했던 세 명의 괴물들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다스리는 영토 없이 왕이란 이명을 갖는다는 건 굉장히 불경한 일이었지만, 이견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인간의 한계라 알려진 랭크 8.
그런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간덩이 부은 녀석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으리으리한 이명을 가진 셋은, 시간이 지나자 역사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무투왕 탈리스야 북부인들을 규합해 프란츠를 건국했고.
마법왕 오베론은 스테이라 마탑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무관의 왕.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때 버렸던 카잔 왕국의 기사단장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뒤로는 다들 잘 아는 이야기다.
카잔은 제국이 되었고.
황제의 계략에 빠진 무투왕은 애먼 신성 왕국에 전쟁을 벌인다.
모두가 진이 빠져 있던 그때, 카잔 제국이 국경선을 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해양을 넘어 위셀란의 수도를 함락시킨 게 그 시작.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프란츠는 카잔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급급했다.
프란츠엔 무투왕이 있긴 했지만, 카잔엔 기사왕이 있었으니까.
아이소테르?
당시 왕인 에런골드 1세도 테라리움에 틀어박혀 제국에게 반격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점차 대륙의 형세는 카잔 쪽으로 기울었고, 카잔이 대륙을 지배하는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스테이라 마탑에 틀어박혀 있던 오베론이 랭크 9에 도달한다.
곧바로 이어진 일방적인 학살.
대륙 전역을 피로 물들이던 영겁의 기사단.
그 강했던 녀석들이 오베론의 등장만으로 순식간에 전멸한다.
이후 나이단 대평야에서 벌어진 대회전.
제국과 연합의 병력 교환비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카잔 제국의 병사들이 몰살당하다시피 한 반면, 패전을 거듭하던 연합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으니까.
제아무리 강한 군세다 한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운석 앞에 자잘한 고깃덩이로 전락할 뿐이었다.
그렇게 대전쟁은 끝난다.
대전쟁이란 이름치곤 허무한 결말이다.
밸런스 붕괴 캐릭터 단 하나한테 끝나 버리는 전쟁이라니.
“…여기군.”
직경만 백미터 가까이 되는 거목이다 보니, 주위 둘레만 그 세 배는 된다.
세계수 주윌 따라 한참을 걷자, 회색빛깔의 바윗덩이가 눈에 띄었다.
세계수의 뿌리에 뒤덮힌 채 허공을 응시하는 석상 하나.
두터운 갑주를 두른 기사는 가슴팍에 연합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아리를 튼 채, 자신의 꼬릴 집어삼키고 있는 용 한 마리.
우로보로스의 문양.
한때 기사왕이라 불렸던 남자는 그의 애검에 손을 얹은 채 그대로 돌이 돼 버렸다.
석상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잔 뿌리가 오랜 세월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단 걸 알려 줬다.
‘이런 게 왕의 최후라니.’
적국도, 아군도 아닌 중립의 땅에 버려진 신세.
심지어 엘프들까지 신성시 여기는 땅이라 녀석들마저 석상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대장로들도 여기 기사왕의 석상이 있단 사실은 모른다.
“이, 이건……?”
느닷없이 등장한 석상에 일행 녀석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들이 섬기는 석상인가요?”
이슬린이 꽤나 그럴싸한 추릴 했다.
일다은 세계수 앞에 놓인 석상이니까.
“후후. 그럴 리가. 귀를 한 번 봐 봐라.”
“…뭉툭하네요.”
자존심 강한 엘프 녀석들이 인간을 숭배할 리는 없으니까.
심지어 창조신을 본딴 석상을 만든다 해도 엘프들은 귀를 뾰족하게 만든다.
완벽한 신이 하찮은 인간들의 모습을 할 리가 없다나 뭐라나.
석상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 줄까 잠깐 생각했지만, 녀석들에겐 아직 이른 이야기다.
“그냥 누가 잠깐 잃어버리고 갔나 보지.”
“예? 그게 무슨…….”
“그렇다면 그런건 줄 알아.”
“…네. 백작님.”
“우린 월식초를 찾으러 온 거다.”
“그렇습니다.”
“그럼 그걸 찾아야지.”
프리아나는 온갖 잡다한 풀로 가득한 주윌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녀석이 멈칫했다.
“그런데 백작님… 그거 어떻게 생긴 거죠?”
“후후.”
난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들어가 있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셀리버트를 내리쬐던 마지막 햇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어느덧 붉은 하늘이 사라지고 회색빛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러자 소설에서 봐 왔던 이벤트가 시작됐다.
스스슥!
기사왕의 석상 앞에 가득했던 풀밭.
이름 모를 잡초들과 한데 섞여 있던 월식초가 땅속 깊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오…….”
하얀 꽃봉오리 사이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꽃술.
방금까지 푸른 잡초밭이 어느새 하얀 꽃밭으로 변했다.
수줍게 고갤 든 하얀 꽃.
이게 바로 월식초다.
“이거군.”
톡.
꽃잎을 가볍게 건들자, 월식초의 꽃봉오리가 맑은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떼어낸 꽃봉오리는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예쁜 꽃이군요.”
“후후. 그런가?”
저마다 신기한 듯 바라보며 감상평을 내놓는 이들.
나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귀부인들한테 한 아름 따다 주면 좋아라 할 것 같은 비주얼이긴 했다.
‘그래 봐야 하루에 몇 분밖에 안 피는 녀석이니 팔 순 없겠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얼른 깨끗한 돌멩이와 넓적한 돌덩이를 주웠다.
그대로 뜯어 낸 월식초 몇갤 올려 놓곤 으깨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이내 잘게 다져진 월식초를 디아에게 건넸다.
“지금 상태는 어떻지?”
“으음… 셀리버트에 왔을 때보단 안 좋아지긴 했습니다만… 아직 그런 대로 버틸 만합니다.”
“다행이군. 일단 이것부터 먹어 보고 경과를 알려 주도록.”
“넵. 백작님.”
디아는 잘게 다져진 월식초를 그러 모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녀석은 월식초를 꼭꼭 씹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으읍… 쓰군요.”
“이미 다진 거니 씹을 필요는 없을 텐데.”
“앗.”
디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월식초를 삼켰다.
“별다른 느낌은 없…….”
우우웅……!
디아가 고갤 갸웃하려던 찰나.
녀석의 몸이 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엇……?”
녀석에게서 일어난 괴현상에 다들 움찔했지만 다행히도 떨림은 금세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약하게 찡그리고 있었던 디아의 낯이 환해졌다.
“히야! 아프던 배가 말끔히 사라졌어요!”
“휴.”
그런 대로 나름 잘 먹힌 듯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약초로도 쓰일 만한가 보네요.”
프리아나는 개운해하는 디아를 보곤 신기한 듯 월식초를 만졌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넌 먹으면 큰일나니 조심하도록.”
“…당연하죠. 저 그렇게 아무거나 집어 먹는 사람 아닙니다.”
“그래? 그렇담 다행이고.”
입을 삐죽 내미는 프리아나를 보며 킬킬댔다.
일단 말은 별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사실 이건 디아 같은 만들어진 블랭크가 아닌 일반인이 먹으면 큰일 난다.
어쩌면 블랭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종의 독초.
애초에 월식초가 이 석상 앞에 자라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오베론이 개발한 그만이 쓸 수 있는 마법, 조화(調和).
말 그대로 자연과 조화되어 한낱 돌덩이로 돌아가 버리는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심지어 대상이 기사왕이라 불리우던 랭크 8의 괴물이라 할지라도, 오베론의 마법 앞엔 모두 똑같이 돌덩이로 전락해 버린다.
체내의 모든 마나를 강제로 추출하고 몸의 구성 성분을 돌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마법.
덕분에 조화로 만들어진 석상 앞엔, 그와 비슷한 성질인 월식초가 자라난다.
먹는 것만으로 체내의 마나를 흩어 버리는 끔찍한 독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성질 덕분에 광폭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약초로 쓰인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난 겁니까?”
“그렇지.”
지금쯤 신이 나서 천사초를 찾고 있을 엘프들에겐 미안하지만, 셀리버트에서 볼일은 끝났다.
여기 눈앞에 석상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
난 물끄러미 기사왕의 석상을 바라봤다.
라크레시아가 깨어난 이상, 이 녀석도 조만간 봉인에서 풀리겠지.
하지만 이 석상을 부술 방법은 지금 내겐 없다.
조화로 만들어진 석상은 무투왕 탈리스가 온 힘을 다 해 때린다 해도 흠집조차 안 갈 테니까.
‘차라리 다른 데다 숨길까?’
크로드한테는 좀 미안하다만.
“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놈들의 힘이라면 괜히 석상 들고 돌아다녀 봤자 금세 들킬 게 뻔했다.
차라리 녀석이 깨어나도 이길 만큼 강해지는 게 나을 거다.
“…….”
난 이번엔 주인공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녀석도 결국엔 깨어난 리온을 이기긴 하지만, 그건 지금 시점에서 십 년은 지나야 가능한 일.
“…아니다.”
어쩌겠나.
지금은 안 되는걸.
착잡한 마음으로 자릴 훌훌 털고 일어섰다.
석상에 명복이라도 빌어주면 어떨까.
그럼 나중에 봉인에서 깨어난 녀석이 좀 봐주지 않을까?
칼로 찔러도 좀 살살 찌른다거나.
“후후.”
나도 모르게 든 우스운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명복은 빌어줘도 되지 싶다.
어쨌거나 카잔 황제의 원대한 꿈이 좌절되면서 이십 년 넘게 돌멩이로 살아가고 있는 양반인데.
난 녀석의 앞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아 짧게 묵념했다.
“…응?”
가까이서 석상을 자세히 보자 이상한게 눈에 띄었다.
세계수의 잔뿌리에 뒤덮힌 리온 카이세리우스의 석상.
오랜 세월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녀석의 왼쪽 가슴팍에 자그마한 흠집 같은 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최근에 손을 댄 듯한…….
“이런 ㅆ…….”
이변을 알아차린 그 순간.
“움직이지 마라…….”
애석하게도 먼저 셀리버트에 당도했던 손님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안 임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