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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47화 (147/222)

147화

자연 그 자체를 담은 듯 한 숲.

온갖 형형색색의 꽃과 풀로 가득한 숲을 거닐며 프리아나가 말헀다.

“이걸 진짜 해 주네요.”

“흐흐. 그러게나 말이다.”

우린 일행의 맨 앞에서 길잡이 역할로 나온 엘프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세계수로 향하는 길.

존재 자체만으로 거대한 마핵 덩어리나 다름없는 세계수 탓인지는 몰라도.

주변 꽃이나 풀들이 다른 숲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우람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꽃은 뭐 당연한 거고.

생긴 건 임페라 백작령의 잡초처럼 생긴 놈이 줄기 굵기가 내 허리만 했다.

“이야… 이놈 이거 열매 한 번 실하네. 먹어 봐도 되나?”

수박만 한 열매가 포도처럼 매달린 과일 나무.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열매는 반투명한 겉껍질 너머로 주먹만 한 씨앗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하나 먹어 볼까 해 손을 뻗으려는데.

맨 뒤에서 따라오던 엘프 녀석이 짜증 가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계수 인근의 열매들은 모두 정령들의 것입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셀리버트의 현자 세리트.

수리 발톱 부족의 엘프였지만, 레인저 중 하나였던 그도 차출돼 우리 일행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말이 호위지 사실상 감시역이었지만.

맨 앞에 앞장선 엘프는 감시병 출신으로 지난 닷새간 꽤나 친해진 녀석 중 하나였다.

그에 반해 세리트는 여전히 우릴 향한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이 자식이 감히 백작님께…….”

디아는 녀석의 예의 없는 발언에 잔뜩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소설에서도 초기엔 둘이 꽤나 투닥거리더만.

줄거린 완전 달라졌어도 성향은 그대로라는 건가?

“뭐 안 먹으면 그만이지.”

지금 투닥거려 봐야 좋을 건 없으니 어깰 한 번 으쓱하곤 둘을 달랬다.

“이런 것보다 맛있는 거야 아이소테르에 훨씬 많을 테니. 그치?”

“그렇습니다, 백작님.”

“후후.”

“…….”

그러면서도 은근히 세리트의 심기를 건드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왠지 더 놀려 주고 싶다고 해야 하나.

세계수는 셀리버트 대숲림에서 엘프들이 사는 셀리온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엔 세계수 근처 나무 옹이구멍에 살았었다곤 하던데.

엘프들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더 이상 감당이 안 돼 셀리온을 만든 거라 알려져 있다.

덕분에 세계수 근처에 엘프들은 더 이상 살지 않고, 정령들만이 남게 됐다.

세계수에 점차 가까워지자 자그마한 반딧불이 같은 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드문드문 보이던 작은 빛은 어느새 빛이 틀어막힌 숲을 환하게 비출 정도로 늘어났다.

[우우웅…….]

작은 진동음처럼 들려오는 정령들의 울음소리.

귀를 기울이면 뭐라 말하는지 들릴 것도 같았다.

옛 엘프들의 언어라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만.

“하핫.”

자그마한 정령 몇 마리가 디아의 주윌 맴돌았다.

빛을 반짝이는 게 같이 놀아 달라 칭얼대는 어린아이 같았다.

디아는 그런 정령들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사실 그거랑은 전혀 다른 의미겠지만.

“…기분 나쁜 놈.”

세리트는 그런 디아를 보며 작게 웅얼거렸다.

“응? 뭐라고?”

“아니다.”

“싱겁긴.”

그리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갤 돌렸다.

디아는 별일 아니라 생각하곤 정령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정령들이 빛을 반짝이는 건 경고의 의미였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디아의 몸.

이에 불운한 기운을 느낀 정령들이 경고 신호를 내보내는 거였다.

[우우웅…….]

지금 들리는 이 진동음도 사실은 ‘당장 여기서 나가!’라는 의미일 테고.

“조금만 봐줘라. 나쁜 녀석은 아니니.”

나쁜 녀석은 아니다.

애초에 저런 몸이고 싶어서 그런 거겠나.

이게 다 망할 먼치킨 마법사 녀석 때문인 거지.

[우우웅…….]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정령들은 빛을 깜빡거리던 걸 멈췄다.

그렇게 정령들의 영역을 지나자 빽빽하게 자라난 거대한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처럼 곧고 크게 뻗은 나무 위로 프리아나가 살짝 손을 얹었다.

“이게 세계수인가요?”

쿠구구……!

“어엇!”

프리아나가 손을 얹자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나무.

그 주위로 다른 거목들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흙을 한 움큼 움켜쥔 뿌릴 다리 삼아 걷기 시작한 거목.

두툼한 놈들의 허리 부근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큼지막한 눈알 하나가 드러났다.

“이, 이건…….”

거대한 크기만으로 위압감이 풀풀 풍겼지만, 어딘가 순박하게 생긴 녀석들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사르르 녹았다.

“세계수를 지키는 엔트들입니다. 순박한 놈들이긴 하지만 자극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자, 자극이라면…….”

“저희 뒤에 꼭 달라붙어서 오기만 하면 됩니다.”

“으음…….”

쿠구구…….

길잡이 엘프 녀석의 말대로 조용히 엘프들과 동행하자 엔트들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가 눈을 감았다.

“…….”

소설 속 엔트들이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무서운 놈들이지.’

그저 움직이기만 하는 나무들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람을 순식간에 호떡 마냥 납작하게 만드는 건 둘째 치고, 녀석들의 경도도 웬만한 오러 소드론 흠집 내는 게 고작일 정도니까.

아마 셀리버트의 엘프들이 셀리온이 아니라 세계수 근처에 계속 살았더라면, 피스트의 원정군에게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세계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엔트들인 만큼 어중띤 병사들론 쪽도 못 썼으니까.

세계수의 마나를 가장 오래, 직접적으로 빨아들인 나무.

녀석들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세계수의 마나를 빨아들인 탓에 심성이 착한 몬스터다.

그런데 만약, 세계수가 오염된다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게 가능한 놈들이 이 소설에선 두 명이나 나온다.

카잔 라크레시아와 오베론 스테이라.

오베론은 소설의 주 시점에선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라크레시아는 지겹도록 나온다.

이 대륙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뭐든 하는 미친놈으로.

“흠…….”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습니까.”

끔찍한 소설 줄거리가 떠올라 안색이 나빠 보였는지, 이슬린이 슬쩍 물었다.

“아. 별거 아냐.”

“…네. 백작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라크레시아에 의해 오염된 세계수.

이는 곧 엔트들과 정령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폭주하기 시작한 엔트들과 정령들은, 그대로 셀리버트의 엘프들을 몰살시킨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염된 엘프까지 가세한 놈들은 가장 가까운 영지로 칼날을 돌린다.

과거 동맹임에도 셀리버트를 배신한 정신 나간 인간들의 왕국.

피스트.

옛 업보를 청산하기라도 하듯, 피스트 왕국은 오염된 세계수의 군세에 그대로 멸망한다.

‘끔찍하지.’

내가 괜히 소설의 왕족과 엮기기 싫은 게 아니다.

소설 속 왕족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니까.

지금은 소설과 많이 달라졌지만, 소설 속 아이소테르의 왕이었던 갈렌도 비슷한 최후를 맞이한다.

당장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에런골드 2세도 아들 손에 비참하게 죽었고.

갈렌의 폭주를 막으려 이글렌과 약혼을 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꺼려진달까.

“백작님.”

“응?”

“또 뭔가 나쁜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내, 내가?”

“네.”

“흐흠. 그럴 리가.”

“…알겠습니다.”

감이 예리한 녀석이라 그런가?

이슬린은 대답은 알았다면서도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살짝 째려봤다.

그나저나 얘는 왜 자꾸 날 이글렌이랑 결혼시키려고 난리래.

이글렌이랑 친하다고 그러는 건가?

“도착했습니다.”

“히야…….”

빽빽하게 들어선 엔트들이 영역을 지나치자, 거대한 단어만으론 표현이 부족한 뭔가가 나타났다.

직경만 백 미터에 달하는 어마 무시한 크기.

사실은 아닌 걸 안다만, 이만한 나무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엘프들의 전설이 이해는 갔다.

세상의 기원과 함께한 나무.

‘이 세상’의 시작과 함께한 건 맞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전설이라고 해야 하나.

방금 엔트를 보고 세계수라 착각한 게 부끄러워질 만한 거대한 나무였다.

거대한 줄기를 시작으로 뻗어난 가지들은, 저마다 형형색색의 잎을 띄고 있었다.

어떤 건 뾰족한 잎사귀를 띄고 있었고, 그 반대편엔 넓찍한 잎사귀를 가지고도 있었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을 조금씩 섞은 듯하다고 해야 하나.

인간 입장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에 우린 잠시 넋 놓고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그럼…….”

길안내를 맡았던 엘프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내 눈칠 살폈다.

‘…아. 그랬지.’

우린 일단은 세계수 근처에만 자란다는 천사의 포옹마냥 달콤한 약초를 찾으러 온 거다.

물론 일부 황금관 엘프들에게만 알려진 사실이고.

뒤에 따라오던 세리트는 그저 우호만을 위해 관람차 온 걸로 알고 있었다.

무슨 관람을 세계수까지 시켜 주는 건가 싶었겠지만.

뭐 어쩌겠나.

황금관 엘프의 장로 씩이나 되는 녀석이 내린 명령인데.

“자…. 그럼 천사초…가 어디 있는지 한 번 볼까……?”

천사초.

물론 그딴 건 없다.

아까 대충 둘러대면서 천사의 포옹이니 뭐니 해서 천사초라 하는 거다.

“천…사초……! 이름 한 번 멋진 약초군요!”

황금관 엘프는 벌써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했다.

세리트는 그런 그의 말에 고갤 갸웃했다.

“천사초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잇! 그런 게 있다! 너도 빨리 찾아라!”

“예, 예엣!”

소설 설정에 따르면 엘프들의 군생활은 기본적으로 최소 백 년이다.

고작해야 대전쟁 당시 태어난 세리트는 길잡이 엘프에 비하면 찌끄레기나 다름없는 연번.

우리 인간들한테야 세게 나오는 거지 수십 년을 앞선 선임 앞에선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천사초란 게 어떻게 생긴 겁니까?”

“예?”

“백작님께서야 문헌으로 보셨다지만 전 처음 듣는지라… 게다가 세계수 근처엔 저도 몇 번 안 와 봐서요.”

“음…….”

엘프라고 세계수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고.

신성한 장소라 여기는지라 엘프들도 함부로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 길잡이 엘프 녀석도 이 근처에 뭐가 있는진 잘 몰랐다.

“옛 문헌에 따르면…….”

일단은 녀석과 세리트를 떼어 내야 한다.

내가 찾는 건 천사초 같은 가상의 풀이 아닌 월식초.

슬슬 달이 뜰 무렵이니 얼른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천사의 얼굴처럼 하얀 꽃봉오리에 잎사귀는 날개처럼 부드럽게 펼쳐진 약초입니다.”

“오오…….”

“그러면서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존재마냥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또 뭐냐……. 무지개 빛깔로 반짝이는 꽃받침을 가지고 있답니다. 아! 잎사귀를 만지면 타오를 듯이 뜨겁다가도 꽃잎은 얼음처럼 차갑다더군요.”

가능한 절대 못 찾도록 되는 대로 막 갖다 붙였다.

세상에 이따위로 말한 풀이 어딨겠어?

“역시… 천사초란 이름답게 아름다운 외관이군요!”

“하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찾아볼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쇼.”

“네!”

길잡이 엘프는 굳은 결심을 다짐하며 천사초를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멀뚱히 서 있는 세리트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세리트! 너도 따라와라.”

“네?”

“네에? 이 자식이…….”

“아앗… 따, 따라가겠습니다!”

세리트는 분한 얼굴로 우릴 한 번 노려보곤 길잡이 엘프를 따라갔다.

이래서 늦바람이 무서운 거다.

호위 겸 감시 역으로 있던 엘프 녀석이 저렇게 눈이 뒤집혀서야.

미안하지만 월식초만 찾으면 여기서 볼 일은 없다.

적당히 장로가 먹었던 수제 콜라 한 잔이면 만족하겠지?

“…후.”

“이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진짜 약초를 찾으러 가야지.”

월식초.

디아의 광폭화를 막을 수 있는 약초.

지금 내가 걱정인 건 월식초가 아니다.

월식초가 자라 있다는 걸로 알려진 군락지.

그 앞에 위치해 있을, 이 소설에서도 최강의 존재라 손꼽히는 자의 석상.

영겁의 기사단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기사단의 유물.

기사왕 리온.

꿀꺽!

쫄지 말자.

어차피 지금 녀석은 오베론에게 당해 석상이 돼 버린 상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한테 쫄아서 뭐해?

그렇게 난 녀석을 마주할 생각에 떨려 오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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