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오늘 있었던 일은 부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무렴요.”
사르보의 부탁에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이안의 미소에 살짝 안심하는 그였지만, 이내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그의 낯빛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
‘어제 그 일이 알려졌다간…….’
배가 터져라 즐겼던 한순간의 쾌락.
난생 처음 느껴보는 쾌락에 사르보는 더럭 겁이 났다.
육체적인 쾌락을 금기시하는 엘프의 특성상.
그에게 이날 있었던 일들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다.
배가 터질 만큼 실컷 즐기고 나왔건만, 어째서 가슴 한켠이 이토록 공허한 것일까.
“에휴.”
“에휴.”
“응?”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옆에 다른 엘프 녀석도 죽상이 돼 가지곤 앉아 있었다.
다시 보니 녀석처럼 이안 임페라 백작의 감시를 맡았던 엘프였다.
정확히는 그의 후번초 후임 근무자였다.
사르보는 잘생긴 얼굴에 주름을 팍 잡곤 후임 녀석을 털었다.
수백 년을 사는 엘프들이라지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법이다.
“이 자식이 빠져 가지고. 고작해야 70년밖에 안 된 놈이 한숨을 쉬어? 너가 그럴 연번이냐?”
“아앗…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후임 녀석은 울상이 돼 가지곤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 년을 살아온 엘프였지만 백 해가 넘은 사르보 앞에선 한낱 찌끄레기일 뿐이었으니까.
녀석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선임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놈 봐라?’
사르보는 백 살 넘게 산 엘프답게 후임의 속마음을 금세 눈치챘다.
엘프들에게 식사란 10분 이상을 넘기지 않는 그저 하나의 영양 공급 수단.
그에 반해 인간들은 몇 시간이고 즐기는 하나의 문화였다
사르보가 후임 녀석과 교대할 때까지도 백작네 일행들은 계속 먹고 마시기 바빴으니.
아마 후임 녀석도 사르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 싶다.
‘그 맘 잘 알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너 설마… 그 인간 놈들이랑 뭐 주고받은 거라도 있냐?”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그, 그럴 리가요… 하하…….”
사르보는 심증은 확실하게 있었지만 더 추궁할 순 없었다.
괜히 그랬다간 자기 잘못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으음… 그래. 정신 좀 바짝 차리고. 요새 너네들 군기 빠졌다고 말 나오는 거 알아?”
“죄, 죄송합니다!”
“그래. 나 나쁜 엘프로 만들지 말고. 처신 잘하라구.”
“옛!”
사르보는 이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임 엘프는 멀어져 가는 선임을 보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X팔… 그래 봤자 고작해아 나랑 30년밖에 차이 안 나는 놈이…….”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나.
계급사회란 그런 건데.
“하아…….”
선임의 꼬장에 기분이 팍 상해 버린 그였지만, 이는 얼마 못 가 지난밤 즐겼던 쾌락에 금세 묻혀 버렸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맛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짝!
녀석은 자신의 두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무슨 불경한 생각을…….’
철저한 금욕이란 엘프들의 덕목을 어긴 것도 모자라 영혼을 파니 마니 하는 생각까지 하다니.
두 뺨이 붉게 물들은 그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일에 대한 속죄로 오늘 하루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을 혹독하게 수련하리라.
“…….”
다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켠에선 또 달랐다.
얼른 임페라 백작네 일행을 감시하는 순번이 왔으면 했다.
그럼 또 그 천상의 맛을 볼 수도 있으니까.
“하…….”
***
“후후.”
셀리버트에 묵은 지 고작 닷새째다.
마차 한가득 실어 온 식재료들은 고작 닷새 만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햄이야 내일 하루 우리끼리만 먹어도 끝이고, 탄산수는 벌써 동나 버린 지 오래다.
“이 많은 걸 결국 다 먹는군요.”
프리아나는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한 듯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슬린은 그 많던 식재료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흐흐! 백작령에서 짐 실을 때만 해도 너무 많은 거 아니냐던 놈들이 말이야.”
“흠흠. 엘프들이 이렇게 식탐이 심할 줄은 몰랐네요.”
“솔직히 나도 좀 놀랍긴 해.”
처음 셀리버트에 왔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 일행을 발톱에 낀 가시처럼 여기던 셀리버트의 엘프 놈들.
얼마 전부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우릴 감시하던 엘프들이 두 배로 늘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빨리 자기네들 순번이 오길 바란 결과일 듯싶다.
덕분에 첫째 날만 해도 화장실 가는 것조차 죽일 듯이 노려보던 놈들이, 지금은 밖에 나다녀도 뭐라 안 할 정도였다.
그저 파르페나 에이드만 좀 타 줘도 거기에 정신이 팔려 우리를 나 몰라라 했다.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먹을 걸로 그 고상한 척은 다 하는 엘프들을 꼬드기시다니.”
“후후.”
“하지만 이제 어쩌죠? 식재료도 다 떨어져 가는데. 아직 대장로들의 마음까지 아이소테르의 편으로 하기엔…….”
“뭐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나?”
“…예?”
내 말에 일행 녀석들은 고갤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들한테 이 머나먼 셀리버트까지 온 이유를 말 안 해 줬었다.
다들 디아의 몸 상태가 심상찮은 건 아는 눈치고.
아마 엘프들의 고귀한 마법을 통해 디아의 병도 고치고, 더불어 라크레시아를 대항할 우군까지 만들려는 줄 아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여기 이 귀쟁이들한테는 딱히 미련 없다.
굳이 따지자면 주인공의 동료였던 세리트라면 모를까.
주인공한테도 꽤나 도움 되던 녀석이니 아군으로 삼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거다.
하지만 세리트는 감시를 맡은 황금관 엘프가 아닌 수리 발톱 부족의 엘프다.
아직 여기 귀빈실에서 먹을 걸로 잔치가 벌어진다는 얘긴 못 들었을 거다.
‘뭐 그거야 나중에 하면 되고.’
세리트와 주인공 디아 제니스의 첫 만남.
도적들의 습격에 큰 부상을 입은 세리트.
주인공 특성상 또 불쌍한 녀석을 두고 지나갈 리가 없었다.
적당히 수통에 들어 있던 물과 달달한 과즙을 섞어 쓰러진 세리트에게 먹인다.
그것만으로 세리트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맛이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녀석도 임페라 백작령의 디저트라면 여기 황금관 엘프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거다.
금세 눈이 돌아가선 어떻게든 임페라 백작령에 오고 싶어 하겠지.
‘난 그런 녀석을 줍기만 하면 되는 거고.’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엘프들한테는 볼 일 없다.
셀리버트의 대숲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약초.
월식초.
희귀한 약초답게 나타나는 조건도 까다롭다.
일단 밝은 대낮은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고 보름달이 뜰 정도로 깊은 밤도 안 된다.
달빛조차 가려진 아주 옅은 빛만이 대지를 감싸 안는 그 순간,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희귀한 약초다.
밤의 악신 셀렌의 영향이 미약하게 돌아야 볼 수 있다는 거다.
그 조건을 딱 만족하는 땅이.
‘세계수 코앞에 거기지.’
소설에서 세리트는 광폭화한 주인공을 이끌고 셀리버트로 되돌아온다.
당연히 인간인 그들은 그닥 환영 받진 못했다.
결국 세리트의 눈물겨운 희생 끝에 월식초를 손에 넣는다.
당시 월식초가 있던 장소는 세계수에 위치한 한 석상.
세리트도 세계수를 코앞에서 보는 건 처음인 터라 그저 석상을 보고 고갤 갸웃하기만 했다.
하지만 난 안다.
그 석상이 대체 뭔지.
크로드 녀석이 온 대륙을 샅샅이 뒤져가면서도 찾지 못했던.
봉인을 푸는 것만으로 영겁의 기사단에 어마 무시한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존재.
영겁의 기사단이 가진 최강의 유물.
꿀꺽!
아마 언젠간 녀석도 봉인이 풀릴 거다.
그게 언젠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강해져야 하는 건 분명했다.
여기 있는 프리아나나 심지어 주인공 녀석도 소설 최종장까지 녀석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 순간이 온다면, 어쩌면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소설에 따르면 월식초는 녀석의 석상 바로 앞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참에 한 번 봐두긴 해야겠네.’
난 두 눈 크게 뜨고 내 얘길 기다리는 녀석들에게 적당히 설명했다.
우선 디아는 고대인의 피가 좀 섞인 것 같고.
그 결과 광폭화라는 병이 시작된 것 같다는 얘기까지 저번에 했었다.
광폭화의 진행을 막기 위해선 세계수의 근처에 자라는 약초가 필요하다 했다.
뒤이어 옛 고서에서 읽은 거라 둘러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오… 그런 이유가……!”
이야기를 다 들은 프리아나는 고갤 끄덕이며 감탄했다.
“절 위해 이렇게까지…….”
거기다 디아는 자기를 위해 이렇게까지 개고생 해 준 점에 대해 가슴 깊이 감사하는 듯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소설 주인공이란 녀석이 이런 반응까지 보이다니.
이만하면 주인공 버프에 적당히 얻어 타는 것 정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세계수 근처는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 않나요? 엘프들에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텐데.”
“그렇지.”
“게다가 이걸로 될까요? 이제 남은 식재료도 얼마 없습니다만.”
프리아나와 디아가 감탄하는 사이, 이슬린이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제 남은 식재료도 얼마 없다.
우릴 감시하는 엘프를 꼬드겨 세계수로 안내해 달라 부탁한다.
겉보기엔 괜찮은 이론이다.
하지만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았다.
고작 닷새 먹을 걸로 꼬드겼다고 저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세계수까지 안내해 달라는 건 무리가 있었다.
괜히 절제력 좋은 엘프 녀석한테 부탁했다간 곧바로 셀리버트에서 내쫓길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가장 확실하면서도 그럴 만한 권력이 있는 놈을 꼬드겨야겠지.
쾅쾅쾅!
“왔군.”
슬슬 때가 되긴 했다.
어중띤 감시병 엘프가 아닌, 제대로 된 엘프가 올 때 말이다.
“뭡니까?”
신경질적으로 문 두드리는 소리에 프리아나가 짜증 섞인 반응을 내보였다.
녀석도 신경질적으로 문을 벌컥 열자, 조금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엘프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서 있었다.
“이안 임페라 백작! 그게 사실입니까! 저희 아이들에게 금지된 물품들을 줬다는 게?”
머리에 제대로 된 황금관을 쓴 엘프.
지난번 황금관을 쓴 대장로보단 크기가 좀 작았다.
아마 대장로는 아니고 그 밑에 장로들이 아닐까 싶다.
감시병들을 관리하는 장로 정도.
“금지된 물품이요?”
난 녀석의 물음에 시치미 떼며 고갤 갸웃했다.
그런 녀석의 뒤론, 불과 닷새 만에 볼 살이 포동포동 찐 엘프들이 서 있었다.
‘후후.’
“으으…….”
녀석들은 시퍼렇게 질려 가지곤 벌벌 떨고 있었지만, 난 그런 녀석들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식재료가 먼저 떨어지나 녀석들이 먼저 걸리나 시간문제였는데.
“다 듣고 왔습니다! 인간들이 먹는 음식을 엘프들에게 주다니요!”
“뭐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고생들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나눠 드린 건데.”
“그런 변명이……!”
“애초에 맨날 억누르려고만 하니까 이 지경까지 온 거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막는 것보단 가끔씩 푸는 게 더 좋다. 그런 격언 못 들어 봤어요?”
“저희 엘프들에게 그런 망언은 없습니다!”
“아잇. 왜 자꾸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덕분에 저까지 목말라졌잖아요?”
“그게 뭔…….”
난 엘프 장로와 말싸움하다 말고 이슬린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이슬린은 검고 탄산이 자글자글 흐르는 뭔가를 내게 건넸다.
이번에 엘프들의 준 향신료와 채소들로 새로 만들어 본 음료수다.
내가 상상하는 원본의 맛에 비하면 한참을 모자라지만, 비슷하게 구색은 맞추긴 했다.
검고 달달하면서 탄산이 자글자글하고, 마시면 살짝 끈적하면서 기분 좋은 잔향이 남고, 거기다 불길한 기운을 스멀스멀 풍기는 짙고 검은 빛깔의 음료수라.
꿀꺽!
노발대발 하는 엘프 장로의 뒤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한참을 혼나고 왔을 텐데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린 건지.
녀석들은 내가 마시는 이 검은 액체를 보며 한 가지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게 뭔진 모르겠지만 분명 맛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