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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44화 (144/222)

144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지금 이 상황을 놓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가 앞으로 머무시게 될 숙소입니다.”

“오.”

우린 황금관 엘프들을 따라 숙소로 안내됐다.

나름 염치는 있는 건지 퀴퀴한 곰팡내 가득한 창고가 아닌, 제대로 된 귀빈실이었다.

외지인을 극도로 꺼리는 특성상 사용한지 꽤나 오래 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신기한 게 많군요.”

마핵이 아닌 마법만을 사용해 불을 밝히는 마법등이라든가.

바닥에서 자라난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가구가 인상적이었다.

가구 옮기려면 꽤나 고생 좀 하지 않을까 싶다.

꼬르륵!

귀빈실에 짐을 푸는 사이, 어디선가 뱃가죽 긁는 소리가 났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슬슬 밥 때가 된 참이라 출출해진 프리아나가 물었다.

“뭐 사신 자격으로 오면 성대한 만찬이 준비되기 마련이다만…….”

아마 그런 건 기대하기 어려울 거다.

드르륵!

밥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묵직한 바퀴소릴 내며 무언가 오고 있었다.

먹을 걸 한가득 실은 수레가 엘프들의 손에 이끌려 올라왔다.

“오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오자 일행들의 침샘이 자극됐다.

특히나 프리아나는 입맛까지 다시며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엘프들은 뭘 먹을까.

쇄국을 유지해 온 터라 엘프들의 식문화는 인간들의 왕국에선 별달리 알려진 게 없었다.

아마 자기네들만 꽁꽁 숨겨 놓고 맛있는 걸 먹진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후후.”

프리아나에겐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사르륵!

수레를 덮고 있던 천을 벗겨 내자 엘프들의 음식이 드러났다.

잔뜩 기대에 부푼 프리아나.

녀석의 표정은 베일에 감춰져 있던 엘프들의 음식을 보자 미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음?”

“타지에서 오신 분들이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최대한 성심껏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셔 주시길.”

엘프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곤 음식들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나머진 제가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슬린의 말에 엘프는 고갤 꾸벅 숙이곤 귀빈실을 빠져나왔다.

이슬린은 수레에서 음식을 하나 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제일 먼저 빵.

뭘로 만든 건진 몰라도 색이 푸르딩딩한 게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그 이후로도 나온 건 비슷했다.

넓은 잎사귀의 풀, 뾰족한 잎사귀의 풀, 짧은 가시처럼 생긴 풀.

마지막으로 꿀 비스무리한 찐득한 뭔가가 나왔다.

“이건…….”

프리아나가 슬쩍 한 방울 덜어 내 먹어 봤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단맛도 거의 없고 밍밍한 맛이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프리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치사하게 먹을 걸로 이런 짓을 하다니!”

엘프들이 일부러 우리들에게 이런 볼품없는 음식들만 내어 온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아니다.

진짜 엘프들은 이런 것만 먹고산다.

저기 저 찐득한 뭔가.

장로급 엘프 식단에만 나온다는 달빛 이슬.

달빛을 머금고 산다는 희귀한 꽃들의 이슬만 모아 담은, 나름 귀한 녀석이다.

건강에야 엄청 좋다곤 하지만.

‘밍밍하지.’

이게 셀리버트에 사는 엘프들의 식문화다.

소설에서 처음 엘프들의 식문화를 접한 주인공 일행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딴 것만 먹고사니 그렇게 오래 사는 거라고.

“이, 이건 어떻게 먹는 거죠?”

프리아나뿐만 아니라 이슬린도 당황한 듯했다.

난 녀석들이 보라는 듯 먼저 시범에 나섰다.

“자. 먼저 이 초록 빵을 반으로 가르고…….”

벌려진 틈새에 각종 채소를 집어넣었다.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게 생긴 샌드위치를 집어 든 난.

“여기 찍어 먹는 거지.”

조금 덜어낸 달빛 이슬에 살짝 찍어 입으로 직행했다.

와삭!

“음……!”

뇌에서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혈관에선 엄지를 추켜들 것만 같은 맛이다.

예상했던 대로 공허하기 그지없는 맛.

나름 어떻게든 먹으려 한 건지 엘프들이 마련한 채소들에선 온갖 특이한 향이 올라왔다.

고기 한 점 없는 햄버거를 먹는 맛이랄까.

나름 먹을 만했지만, 더 먹고 싶진 않았다.

“…으윽!”

날 따라 건강 샌드위치를 만들어 한입 베어 문 프리아나.

임페라 백작령의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져 있던 그에겐 끔찍함 그 자체였다.

“이, 이런 걸 먹는다니…….”

“나름 먹을 만하네요.”

“그러게요.”

이슬린과 디아는 애매하긴 해도 먹을 만하다는 반응이었다.

자신의 서러움에 공감해 주지 않자 프리아나의 입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앞으로… 여기 있는 동안 이런 거만 먹어야 하는 겁니까?”

프리아나는 그럴 바엔 한시라도 빨리 셀리버트를 도망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럴까 봐 다 준비해 왔지.”

“오오!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가뭄에 한줄기 내린 빗물마냥 프리아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디 보자…….”

난 챙겨 온 짐 가운데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자그마한 마핵이 달린 상자는 옅은 냉기를 상자 속으로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달칵!

상자를 열자 일레느에게 부탁해 온 식재료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얇게 저민 햄부터 우유, 심지어 팝콘을 만들 메르도 준비해 놨다.

“이게 이런 용도였군요!”

프리아나는 낑낑거리며 들고 온 보람을 느꼈다.

“자, 이걸…….”

건강 샌드위치에 햄을 듬뿍 올리곤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셀리버트의 향신료와 어우러져 보통 샌드위치보다 훨씬 풍부한 육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음!”

소설 속에서도 ‘고기랑 같이 먹으면 정말 좋을 맛’이란 채소들답게 햄과 함께 먹는 맛이 일품이다.

“저, 저도…….”

프리아나가 따라서 햄을 올려 먹으려던 그때.

“잠깐.”

“네?”

“햄은 구워 먹어야지. 디아, 아까 준 벨트. 가지고 있나?”

“어… 네, 백작님.”

디아는 마차와 연결했던 벨트를 다시 착용했다.

그러자 반대편 벨브 부분이 다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달칵!

벨브 부분을 살짝 돌리자 출렁임을 멈추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마차의 원동력이 되었을 테지만.

치이익!

샌드위치에 햄을 올린 채로 벨브의 열기를 슥슥 훑었다.

그러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햄이 지글지글 익기 시작했다.

초록색 빵이 살짝 구워져 바삭해진 건 덤.

주인공을 휴대용 가스버너마냥 쓰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오…….”

녀석은 오히려 익어 가는 햄 냄새에 정신이 팔린 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햄 샌드위치가 바삭하게 익자, 난 그걸 프리아나에게 건넸다.

“먼저 먹어라.”

“감사합니다! 백작님!”

바삭!

처음 먹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삭하게 구워진 빵과 향신료로 가득한 채소.

이게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크흑……! 이겁니다! 뭔가 빠진 것 같았던 이 맛!”

“후후.”

디아와 이슬린도 뒤따라 햄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몸에서 삐져나온 밸브로 햄을 구워 먹는 주인공의 모습은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오오!”

“음… 맛있네요.”

좀처럼 먹는 거에 관심 없어 보이던 이슬린도 놀란 듯 눈썹을 으쓱했다.

“자, 맛있게들 드시고…….”

난 녀석들이 맛있게 먹는 동안 후식을 준비했다.

어느덧 임페라 백작령의 명물이 된 파르페.

휘핑크림을 만드는 게 좀 귀찮긴 했지만 재료는 다 있었다.

중간중간에 마법으로 바람까지 솔솔 넣어 주며 휘젓자 어느새 파르페에 넣을 크림이 완성됐다.

여기에 쿠키를 넣고 맨 마지막으로…….

스르륵!

블루 핀 시럽까지 얹자 달콤한 향이 귀빈실 안에 진동했다.

냄새만으로 살이 꾸득꾸득 올라올 것만 같은 조합이었다.

“자, 이것도 먹어라.”

“감사합니다!”

“네.”

“오… 이게 그 파르페군요!”

저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셋.

디아는 파르페는 처음 먹어 보는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 숟갈 먹어 보곤 역시나 황홀한 표정을 짓는 디아.

난 녀석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귀빈실의 문 쪽을 흘긋거렸다.

‘이제 슬슬 반응이 올 텐데.’

똑똑.

역시나 양반은 못 될 놈들이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 녀석이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시죠?”

한참 먹던 이슬린이 문을 빼꼼이 열고 물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하얀 파르페 거품이 살짝 묻어 있었다.

“그, 그게… 별일 없으신가 해서…….”

아마 냄새를 맡고 궁금해진 거겠지.

난 얼른 나가 녀석을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별일 있을 리가요. 준비해 주신 식사를 맛있게 먹던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하하…….”

애써 태연한척 하는 엘프 녀석.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녀석의 귀는 부산스레 쫑긋거리고 있었다.

난 그런 녀석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그렇지.’

엘프는 수명이 길다.

문헌에 따르면 오래 산 녀석은 수백 살 가까이 산다 했으니까.

그게 문제다.

인간은 백 년도 안 되는 수명 동안 성장한다.

엘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세월 동안 인간은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다.

개중엔 오베론과 같은 인간을 초월한 녀석도 가끔씩 나타난다.

물론 인간 특유의 힘을 향한 갈망 덕분에 가능한 일이긴 해도.

인간보다 몇 배는 더 사는 엘프들의 특성상 한계를 뛰어넘는 이도 많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난 수천 년간 엘프 중 랭크 9를 달성한 녀석은 없었다.

엘프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

금욕.

욕망을 멀리하는 특성 탓에 엘프들은 랭크 성장이 더뎠다.

힘을 향한 욕망을 철저히 억제하는 것.

이는 자연스레 엘프 문화 전반에 녹아들었고, 이러한 풀떼기만 먹는 식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

‘불쌍한 놈들이지.’

이러한 문화가 그저 늙은 엘프 꼰대들의 꼬장만으로 생긴 건 아니다.

간혹 이러한 금기를 깨고 욕망에 충실한 녀석들이 있긴 했다.

모두 끔찍한 결과를 맞이했지만, 나름대로 이유 있는 절제라 해야 하나.

“혹시… 밥은 먹고 일하시는 겁니까?”

“예? 그, 그게…….”

엘프는 내 손에 올려진 햄 샌드위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겉보기엔 혈기 왕성한 이십대 남자로 보였지만, 실제론 백 살 가까이 먹은 녀석일 거다.

그런 녀석이 먹을 것 앞에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배고프시면 와서 같이 먹죠.”

“…아닙니다! 대장로님께서 절대 허튼짓 하지 말고 꼭 붙어 감시하라고…….”

“감시?”

“허억……!”

먹을 것에 정신 팔린 녀석은 저도 모르게 비밀을 말하고 말았다.

순간 아차 싶었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역시 혹시나 우릴 노린 불한당이 있을까 걱정하고 계셨군요!”

“…그래요! 그겁니다!”

우릴 감시하러 온 게 괘씸하긴 했지만, 이런 말단 엘프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위에서 까라니 깐 거겠지.

애초에 이 녀석은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손님이다.

셀리버트의 귀빈실이 어마 무시한 맛집이라 소문내 줄 손님.

“괜찮아요. 괜찮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렇게 일만 해서야 쓰겠습니까?”

“먹고… 살자고 하는 일……?”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인 듯 엘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꽤나 마음에 드는 말인 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런가요?”

“그럼요! 그리고. 한입 하신다고 무슨 일 있겠어요? 안 들키면 안 한 건데!”

“안 들키면 안 한 거…….”

녀석은 인간들에겐 으레 나오는 말들을 처음 듣는 것마냥 되뇌었다.

금욕 그 자체의 삶을 살던 그들에겐 충격적인 말들뿐이었다.

“자자. 일단 힘드실 텐데. 이것부터 쭈욱 들이켜십쇼.”

“으븝……!”

녀석한테 반쯤 억지로 레드핀 에이드를 먹였다.

블루 핀 에이드는 초심자에겐 너무 다니까.

적당한 단맛과 함께 자글자글한 탄산이 느껴지는 한 잔의 음료수.

이는 백 년 가까이 금욕적인 생활을 해 온 엘프에겐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이, 이 무슨……!”

녀석은 황홀함에 겨워 눈망울이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마차 한가득 실어 온 짐 대부분이 먹을 거니까.

“자. 이것도 먹어 보고.”

“허으윽…….”

그날.

셀리버트에 틀어박혀 금욕적인 생활만 고수해 오던 엘프는 생각했을 거다.

지금껏 인생 절반 손해 보고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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