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43화 (143/222)

143화

“여기군요.”

로셰크를 따라 걷길 수 분.

마침내 우리 일행은 셀리버트의 중심지, 셀리온에 도착했다.

이 소설 속 엘프들은 나름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했다.

나무옹이 구멍에 들어가 산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독특한 건축물들이 셀리온에 가득했다.

하얀 지점토를 빚어 만든 듯 특이하게 생긴 건물들은 우리 일행들에게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보통 건물이라면 뼈대가 있고 그 위로 건물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때문에 네모반듯한 게 대부분이고 조금 신경을 쓴다 해도 큰 틀을 벗어나진 못했다.

“히야…….”

디아와 프리아나가 셀리온의 풍경에 탄식을 내뱉었다.

나무로 뒤덮힌 자그마한 언덕처럼 생긴 하얀 성.

그 위론 분수대 하나가 공중에 붕 떠 있었다.

분수대에선 투명한 샘이 솟아 사방으로 퍼지며 주변 식물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마법에 특화된 종족만이 가능한 건축 양식이었다.

분수대에 새겨진 룬 문양.

덕분에 분수대에선 별다른 수원 없이도 물을 내뿜는 게 가능했다.

저만한 크기의 부유물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종족은 엘프가 유일할 거다.

“따라오시지요.”

로셰크는 셀리온을 향해 앞장섰다.

같이 크로드 욕을 하며 걸었던 터라 말투엔 왠지 모를 친근함이 조금 묻어났다.

“…….”

곳곳에 뚫린 자그마한 아치에선 귀가 뾰족한 엘프들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셀리온에 가득한 엘프들.

다들 하나같이 잘생기고 이쁜 얼굴들이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게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진달까.

그들 사이로 로셰크를 따라 우리 일행이 걷자, 엘프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세리트마냥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진 않았지만 다들 시선이 그리 곱진 못했다.

“흥!”

개중엔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는 녀석도 있었다.

특히나 검을 든 우리 셋에게 적의가 강했다.

“…….”

검 한 자루 없이 걷는 이슬린한텐 조금 덜한 편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짠한 기분이 들었다.

엘프들이 인간들을 싫어하는 건 일종의 열등감도 섞여 있었으니까.

마법 대신 검을 쓰는 기사들한테 셀리버트 전역이 유린당한 치욕적인 역사.

비록 피스트 원정군의 배신이었다곤 하나, 열등한 종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한 건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어쩌겠나. 지금 급한 건 난데.

우린 엘프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셀리온으로 들어섰다.

하얀 벽 가운데 박힌 거대한 아치.

주위로 염료로 덧칠한 장식이 우아하게 새겨져 있었다.

엘프들의 왕 격인 존재들.

엘프 대장로들의 방이었다.

“이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인즉 우리 일행이 오는 건 알고 있었단 소리였다.

알면서도 대뜸 화살부터 날리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일단 겉으론 미소를 유지했다.

“오! 벌써 우릴 기다리고 있다니. 준비가 참 빠르시군요.”

“…크흠! 그렇긴 하죠.”

로셰크는 멋쩍은 듯 헛기침했다.

녀석이 했던 것처럼 은근히 긁는 듯한 말투에 로셰크는 별다른 반박도 없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럼. 고생하셨습니다.”

로셰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갤 까딱였다.

스스슥……!

대장로들의 방에 손을 대자 거대한 문이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경첩 긁는 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열었다 닫았다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문을 열자 마주한 건 일곱 대장로들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대장로들의 옥좌였다.

‘흠…….’

자세히 보니 절반 이상이 공석이었다.

겨우 두 자리의 대장로들만이 날 맞이하러 나온 상황.

역시나 아이소테르의 사신 자격으로 왔음에도 그닥 환대 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서 오시오. 연합에서 온 이여.”

머리에 누런 투구 비스무리한 걸 쓴 대장로가 운을 띄웠다.

황금으로 만든 듯한 투구를 보니, 아마 황금관 부족의 대장로 같았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난 가볍게 예의를 갖추면서 대장로들을 슥 훑어봤다.

소설에 따르면 셀리버트는 총 일곱 개의 부족이 모인 연합체다.

부족이라지만 꼭 같은 혈족끼리 나뉜 건 아니다.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다섯 개의 종족.

저마다 불, 바람 등 주 속성에 따라 나뉘어 있다.

성년식 때 적성을 평가하곤 각기 다른 부족으로 배속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셀리버트를 지키는 레인저들로 이루어진 수리 발톱 부족.

마법 랭크보단 궁술 랭크에 특화된 자들이다.

물론 엘프답게 마법도 쓸 줄 아는 터라 만만히 볼 녀석들은 아니다.

각종 속성을 머금은 화살은 꽤나 파괴적인 위력을 자랑하니까.

마지막으로 셀리버트의 내정을 담당하는 황금관 부족.

내게 인사한 대장로가 여기에 해당하는 자였다.

자리한 대장로들은 수리 발톱 부족과 황금관 부족 말곤 없었다.

황금관 부족의 대장로야 내정 담당이니 어쩔 수 없이 온 거고.

수리 발톱 부족의 대장로는 왜 온 걸까.

“…….”

아무 말 없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수리 발톱의 대장로.

보아하니 환대보단 어떤 낯짝 두꺼운 놈이 엘프들의 땅에 온 건지 확인하러 온 듯했다.

콰드득!

대장로들의 안색을 살피던 그때.

발치에서 나무뿌리가 솟아나 뭉치기 시작했다.

이내 형태를 갖춘 건 나무뿌리로 엮인 의자였다.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나무뿌리로 만든 의자답게 딱딱하기 그지없는 의자다.

풀떼기로 쿠션감이라도 좀 넣어 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아이소테르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당도하신 이유가 무엇이요?”

“그야 우호를 다지기 위함이지요.”

“흠…….”

황금관 대장로는 내 말에도 영 시큰둥했다.

라크레시아가 다시 나타난 지금.

우호를 다지자는 건 다름 아닌 녀석에게 대항해 동맹을 맺자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성함이 뭐였지요?”

“이안 임페라 백작입니다.”

“그래요. 임페라 백작. 사신 자격으로 오셨으니 현 대륙 상황이 어떤진 잘 알고 있겠지요.”

“그렇죠.”

라크레시아 카잔의 등장.

이는 셀리버트의 엘프들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가 이처럼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럼 얼마 전 인간들의 연합에 가담했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알 테구요.”

“….”

얼마 전이라.

수백 년은 거뜬히 사는 엘프들의 특성 상, 얼마 전은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을 뜻했다.

피스트 원정군의 배신.

셀리버트는 카잔 제국의 침범 초기에도 중립을 표방했다.

그러다 당시 피스트 왕국의 셋째 왕자의 설득 끝에 겨우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먼저 셀리버트의 병력이 카잔 제국의 공격을 막는 동안, 피스트의 본 병력이 치고 나가는 계획이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셀리버트의 엘프 병사들은 꽤나 큰 출혈을 감수했다.

그렇게 병사들을 잃어 가며 견뎌 낸 혈투 끝엔, 어처구니없는 전언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잔 제국의 멸망.

이는 곧 출정 나간 원정군들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되돌아와야 함을 뜻했다.

적지를 약탈할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던 피스트의 원정군은, 어이없게도 셀리버트를 약탈한다.

이는 전적으로 당시 원정군의 지휘관 탓이 컸다.

당연히 셀리버트의 대장로들은 노발대발했지만, 이미 전력 절반을 카잔 제국 막다 날려 버린데다가, 당시 원정군의 지휘관은 다름 아닌 피스트의 현 국왕이었다.

이미 카잔 제국이란 거악도 막아 냈고 녀석이 피스트의 국왕이자 연합의 일원으로 들어온 이상… 셀리버트의 편을 들어줄 이는 없었다.

단물이 다 빨려 버린 셀리버트는 그렇게 버려진다.

“하지만… 카잔 제국의 목표가 뭔진 대장로님도 아실 텐데요.”

“후훗.”

황금관 대장로는 코웃음쳤다.

사신을 향한 예의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사과했다.

“아, 미안하게 됐소. 지난번 들었던 말과 너무나도 똑같았던지라.”

“…….”

당시 피스트 왕국의 셋째 왕자이자, 현 국왕의 동생인 남자.

그는 홀로 셀리버트를 설득해 참전하게 만들었다.

그저 사탕 발린 말로 유혹한 게 아니었다.

대륙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진심.

소설 속 회상씬에서 첫 만남 당시엔 대부분 회의적이었던 대장로들이었지만, 그의 진심 어린 설득만으로 대장로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제지.’

셀리버트를 약탈한 녀석과 그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엘프들에겐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그토록 진심 어린 언변으로 설득을 시켜 놓곤, 뒤에서 자기네들 영토를 짓밟고 약탈한 놈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솔직히 내가 엘프였어도 인간이 미울 거다.

눈물까지 흘려 가며 열변을 토하던 녀석들이 뒤통수를 치다니.

원래 믿음이 클수록 배신감도 커지는 법이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지만. 우리 엘프들은 인간들의 알력 다툼엔 더 이상 끼고 싶지 않소.”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소. 여독을 푸실 생각이시라면 며칠 정도 더 묵을 수 있게 해 드릴 순 있습니다만.”

사신이 오면 보통 으리으리한 환대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셀리버트는 환대는커녕 얼른 돌아가라는 투로 말했다.

말로는 며칠 묵어도 된다지만 옆에 수리 발톱 대장로의 표정을 보면 전혀 진심은 아닌 듯했다.

‘어디 셀리버트에 더 있으려면 있어 봐라!’ 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게다가 난 녀석들이 거절할 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우호를 다지자는 건 어디까지나 겉보기용이다.

세계수의 근처에만 자라는 약초가 목적이다.

“그래요, 그럼. 온 김에 며칠 더 쉬죠.”

“…으응?”

“아이소테르의 사신으로 왔는데, 대장로님의 제안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 그건……!”

황금관 대장로는 제 꾐에 넘어간 듯 침음을 삼켰다.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만 어쩌겠나.

대장로란 입장 상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노릇이니.

“그…럼 편히 묵고 가시지요……?”

녀석은 옅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하는 수 없이 말했다.

난 혹여나 녀석이 마음을 바꿀까봐 얼른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이소테르를 대변해서 셀리버트의 호의는 절대 잊지 못할 거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끄응…….”

난 녀석을 향해 한 번 싱긋 미소 짓곤 되돌아섰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쏘아대는 눈빛에 곁눈질로 대장로들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호오.’

황금관 대장로야 당연히 욕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고, 신기한 건 수리 발톱 대장로가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단 거다.

자기네들 놀려 먹은 게 재밌나?

‘흥.’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소설에서도 수라 발톱 대장로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유지했다.

다른 엘프들이 주인공 일행한테 푹 빠진 다음에도.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줄곧 대장로들의 앞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던 프리아나.

녀석은 암담한 상황에 꽤나 걱정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괜찮다.

줄곧 쇄국을 유지해 온 셀리버트의 엘프들.

겉으론 천박한 인간들의 유산을 맛볼 수 없다곤 했지만, 실제론 다르다.

녀석들 사이에선 몰래몰래 인간들의 문화가 전파되고 있기까지 하니까.

특히나 식문화에 관해서.

“나만 믿으라구. 이슬린, 준비됐나?”

“네, 백작님.”

“하지만… 겨우 그런걸로 엘프들이 마음의 문을 열까요?”

“후후. 프리아나. 네가 처음 임페라 백작령의 디저트를 먹었을 때, 어땠지?”

“그야…….”

프리아나는 옛 생각에 잠시 표정이 황홀해졌다.

맨날 검만 휘두르다 처음 맛본 극한의 단맛은 프리아나가 가진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거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떡하긴.”

난 마차에 한가득 실어 놓은 탐욕 덩어리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호감도작 할 시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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