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42화 (142/222)

142화

“우호를 쌓아?”

녀석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채 빈정거렸다.

한쪽 눈에 난 깊은 흉터는 녀석의 짜증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차피 또 우리 땅에 뭔가 주워 먹을 건 없나 보러 온 거겠지!”

“…뭐?”

“네놈 인간들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나?”

솔직히 주워 먹으러 왔냐는 말에 살짝 뜨끔하긴 했다.

디아의 광폭화를 막으려면 세계수 근처에서만 자라는 약초가 필요했으니까.

‘주워 먹으러 온건 맞긴 하다만…….’

그래도 먼 길 온 손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이 자식이 감히……!”

녀석의 말에 반박하려는 찰나, 프리아나가 대신 나서서 화를 냈다.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저쪽 얼굴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앗.”

녀석은 금세 내 속마음을 읽어 냈는지 날 가리켰다.

애써 표정을 고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있나. 셀리버트에 있는 게 아이소테르에 없을 리가.”

“…하. 그러셔?”

살짝 녀석의 심기를 거스르는 듯한 발언.

‘셀리버트에 있는 게 아이소테르에 없을 리가 없다.’

이곳 엘프들의 땅은 줄곧 쇄국을 유지해 온 나라다.

게다가 대전쟁의 그 사건 이후로 셀리버트의 대장로들은 더더욱 나라를 틀어막았다.

그 결과 셀리버트엔 비교적 문명의 발달이 적었다.

마법 쪽으론 꽤나 발전되어 있긴 해도, 인간의 쾌락을 향한 욕망을 따라잡을 순 없었달까.

덕분에 이곳 엘프들은 꽤나 불만이 쌓인 상태다.

인간들이 발전시킨 쾌락의 맛을 본 하프 엘프라면 더더욱.

타닷!

맨 먼저 들이닥친 하프 엘프 녀석을 따라, 주변 숲에 숨어 경계하던 이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뾰족한 귀와 머리에 깃털이 달린 특이한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셀리버트를 수호하는 레인저들의 복장이었다.

“세리트. 멈춰라.”

레인져들 중 높아 뵈는 녀석이 하프 엘프를 제지했다.

그런데 잠깐.

‘세리트?’

셀리버트의 현자, 세리트.

녀석은 소설 속 주인공의 동료 중 하나인 세리트가 맞았다.

하기야 지금 이 시점에선 셀리버트의 레인저로 몸담고 있을 때니까.

여러모로 독특한 설정을 가진 캐릭터다.

엘프이면서도 인간인 레인져.

으레 판타지 소설들이 그렇듯 엘프들은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는 놈들이다.

때문에 하프 엘프들을 더러운 피가 섞인 하등한 종족쯤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세리트가 가진 이명.

셀리버트의 현자.

이는 사실 멸칭에 가깝다.

하프 엘프인 주제에 이것저것 아는 게 많은 그를 향한 멸칭.

살짝 범생이라는 별명 같은 느낌이랄까?

‘흠.’

난 셀리버트의 현자, 세리트를 슥 훑어봤다.

소설 속 묘사랑은 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프 엘프인 탓인지 몰라도 인간들에겐 비교적 우호적인 녀석이었는데. 게다가 얼굴에 깊게 자리 잡은 흉터까지.

이는 소설에서도 없었던 설정이었다.

“먼 길 오신 손님들을 그렇게 대해서야 쓰나.”

“…예. 죄송합니다.”

세리트는 죄송하다면서 우리 쪽이 아닌 엘프 녀석에게 고갤 숙였다.

“내 대신 사과하겠소.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알려 주실 수 있겠소?”

“…아이소테르에서 온 이안 임페라 백작입니다.”

“흠… 아이소테르… 아이소테르라…….”

“셀리버트에 전언을 보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랬었지요. 내 나이가 있다 보니 가끔씩 까먹을 때가 있어서.”

“…….”

“아무튼 반갑소. 레인저 13번대 대장, 로셰크요.”

녀석은 한 번 피식 웃곤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수.”

난 마지못해 로셰크란 녀석이 건넨 손을 맞잡았다.

보아하니 전언을 듣고서도 괜한 꼬장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대전쟁 당시 일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미울 수 있긴 하다만, 적어도 그게 난 그 사건과 무관했다.

‘쯧.’

“그럼. 이리로 오시지요.”

로셰크는 싱긋 미소 지은 채로 우리 일행에게 손짓했다.

“백작님. 그럼 마차는 어떻게…….”

“그건…….”

“아. 마차는 두고 오시지요. 장로님들이 싫어하실 게 분명하니.”

로셰크는 말없이 달리는 마차를 보곤 고갤 홰홰 저었다.

명령하는 듯한 놈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지만 일단 잠자코 따랐다.

“…예. 그럼.”

난 이슬린에게 적당히 마차를 세워 두라 하곤 로셰크를 따라갔다.

파사삭…….

묘하게 빠른 걸음으로 앞서는 로셰크.

엘프라 그런지 숲길에서도 걷는 속도가 빨랐다.

아마 이스바르트가 따라왔더라면 따라가느라 꽤나 고생 좀 했을 듯했다.

지금 같이 온 녀석들은 다들 단련한 몸인 덕에 별 무리 없이 뒤따를 수 있었다.

“인간 분들치곤 잘 따라오시는군요.”

“뭐 이 정도야.”

은근히 사람 심경 긁는 듯한 녀석의 말투.

일부러 우리들 진을 빼놓으려고 빨리 걷고 있는 거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겁니다. 힘내시지요.”

“…그러죠.”

마음 같아선 뒤통수나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었지만, 지금 급한 건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었으니까.

“몸 상태는 어떤가.”

난 디아의 상태나 살펴 볼 겸 녀석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더 몸이 가볍다고나 할까요? 더부룩하던 것도 말끔해졌습니다.”

“다행이군.”

임페라 백작령에서 셀리버트까지 꼬박 일주일을 달렸다.

덕분에 녀석의 체내에 쌓여 있던 마나도 상당량 소모됐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지만, 당분간은 폭발할 걱정은 없다.

‘그나저나 백작님.’

‘왜.’

디아는 귀엣말로 내게 물었다.

‘이 엘프들…. 왜 이렇게 눈빛이 사납죠? 특히나 맨 처음에 만났던 저 엘프. 눈빛만 보면 아주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녀석 같습니다.’

‘그야…….’

난 녀석에게 대전쟁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다 멈칫했다.

우리 주변을 에워싸듯 따라 걷는 엘프.

쫑긋 솟은 녀석들의 귀라면 귀엣말도 다 엿들을 수 있을 테니까.

전쟁이란 아이러니한 일들투성이다.

피스트 왕국의 설득에 중립을 깨고 연합에 참가한 셀리버트.

그랬던 이들이 피스트의 병사들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당하다니.

피스트 왕국은 왕국 연합 중에서도 피해가 거의 없었던 왕국이다.

따지고 보면 제국과 전투 한 번 안 해 본 유일한 왕국이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소테르의 북쪽에 위치한 카잔 제국.

셀리버트는 그런 아이소테르와도 대륙 반대편이라 불릴 정도로 머나먼 땅에 위치했다.

거리가 워낙에 멀었던 탓에 둘은 싸울 일이 없었다.

당시 피스트에서도 거리가 멀다며 원정군 참전을 꺼려 했을 정도였다.

‘실상은 제국이 이길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만.’

그렇게 한참을 눈치 보던 피스트는 오베론이 등장하고 나서야 원정군을 출진시킨다.

어떻게서든 밥숟가락 얹겠다고 나선 이들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출발한 원정군은, 카잔 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전쟁이 종결 되면서 붕 뜨게 된다.

당시 붕 떠 버린 원정군이 위치했던 땅이 바로…….

“…….”

당시 갓 태어난 디아 입장에선 모를 수밖에 없는 역사다.

워낙 오래전 일인데다가 연합에서 일부러 지워 버린 역사였으니까.

자신들의 치부나 다름없는 끔찍한 범죄를 내버려둘 순 없어서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긴 했다.

셀리버트의 엘프들이 대전쟁 당시 일 탓에 인간들을 싫어하긴 했어도, 세리트는 인간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오죽하면 셀리버트를 버리고 주인공 일행과 여행까지 떠났을까.

이는 로셰크의 말에 금방 이해가 갔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3년 전 갑작스레 습격해 온 인간 탓에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요.”

“…3년 전?”

“저기 저 친구도 그때 왼쪽 눈에 상처를 입었죠.”

3년 전.

3년 전이라.

내가 이 소설 속 세상에 갇힌 시기랑 묘하게 겹치는데.

“…앗.”

3년 전, 난 크로드에게 가벼운 사기를 쳤다.

날 도와 결투 대행인으로 나서주면 영겁의 기사단의 유물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약속대로 셀리버트에 유물이 있단 사실을 알려 줬고.

한 달쯤 지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녀석이 다시 임페라 백작령으로 되돌아왔었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결투 심판에서 이기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크로드가 셀리버트에서 뭘 했을진 나중 문제였다.

‘설마……?’

“끔찍한 녀석이더군요. 거지꼴에 검은 흑발을 휘날리던 기사 놈.”

로셰크는 그날의 참상이 떠오르는 듯 이를 악물었다.

“정말 치욕이 따로 없습니다. 레인저 한 대대가 몰살당한데다 놓치기까지 했으니.”

“…그런 나쁜 놈이 있나!”

로셰크는 크로드를 대신 욕해 주자 눈썹을 으쓱했다.

사람 맘이란 게 원래 남 뒷담 까다 보면 친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녀석은 살짝 흥분했는지 크로드를 향한 욕지거릴 내뱉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죠. 게다가 아직까지도 녀석의 목적이 뭐였는지 모르니 원…….”

“그런 놈은 아마 벼락 맞고 옛적에 죽었을 겁니다.”

“후후. 그런가요?”

로셰크는 기분이 좋아진 듯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미안하다. 크로드. 그치만 너가 좀 심하게 하긴 했어.’

지금은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녀석을 향해 사과하며 한동안 로셰크의 비위를 맞춰 줬다.

* * *

머리가 반질반질한 남자가 눈을 꼭 감은 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만큼 대규모의 마나를 운용하는 건 그도 처음인지라 어느새 그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그런 그를 검은 흑발의 남자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이 착용한 검과 지팡이엔, 현 대륙에선 사용이 금지된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또아리를 튼 채 자신의 꼬릴 집어삼키는 용.

우로보로스.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겁의 기사단, 솔루스와 크로드였다.

“……?”

열심히 주문을 외던 솔루스.

그의 곁에서 주변을 살피던 크로드가 별안간 고갤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둘이 위치한 건 다름 아닌 셀리버트 대숲림에서도 가장 깊은 숲.

코앞에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를 마주한 채였다.

조금이라도 계획이 수틀렸다간 셀리버트의 엘프들에게 둘러싸일 수도 있는 상황.

솔루스는 혹여나 이상한 낌새라도 느낀 건가 하고 크로드에게 물었다.

“…뭔가 재수 없는 느낌이 나는군.”

“…그래?”

솔루스는 얼른 외우고 있던 주문을 거뒀다.

파스스…….

레서 드래곤의 마핵을 개조시켜 만든 아티팩트.

일종의 깔때기 같은 거다.

마핵에 마나를 집중시켜 원하는 대상에게 마나를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든 마나 깔때기.

근 한달간 아티팩트에 마나를 주입시킨터라 벌써 상당한 양의 마나가 주입된 뒤였다.

신중에 신중을 요하는 작업인 터라 솔루스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급히 작업을 멈췄다.

“그저 괜한 느낌은 아니겠지. 너 정도 되는 녀석이 느끼는 거라면.”

“…….”

크로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꾹 닫았다.

검술 랭크 7.

이미 한 왕국의 기사단장으로 강해진 그는, 인간의 오감을 넘어선 무언가 마저 가진 상태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조바심 갖지 말고 마무리만 잘 하면 돼.”

“…그래.”

크로드는 께름칙한 기분은 애써 진정시키곤 고갤 들었다.

세계수의 뿌리로 뒤덮인 하나의 석상.

기사의 가슴팍엔 크로드의 검집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이 박혀 있었다.

영겁의 기사단을 뜻하는 우로보로스의 문양.

온몸이 세계수의 뿌리로 뒤덮인 석상은 가만히 크로드를 바라만 봤다.

깨어나는 것만으로 연합과 전력 차를 기울일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

오베론의 개입에 석상이 되어 버린 그였지만, 이제 곧 깨어나기만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검술에 한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했던 자.

한때 무투왕 탈리스와 마법왕 오베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무력만으론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자.

‘곧 꺼내 드리겠습니다. 기사왕이시여.’

기사왕 리온 카이세리우스.

카잔 황제에게 직접 왕의 칭호를 하사 받은, 제국의 기사단장.

크로드는 공허한 석상과 눈을 마주치며 다짐했다.

그를 봉인에서 푸는 걸 막는 이라면, 그게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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