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도버의 기사 헤카테.
평화와 자비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지금은 사라진 먼 옛날에 존재했던 왕국 도버.
그런 왕국이었음에도 블랭크를 향한 뿌리 깊은 혐오는 여전했다.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싸우다 블랭크가 돼 버렸음에도 도버는 그를 버렸다.
블랭크가 된 채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결국 던전 마스터로 다시 태어나고 말았다.
그마저도 이름 모를 용병들에게 퇴치 당하고 이젠 구름처럼 떠다니는 한줄기 의식만이 정처 없이 던전을 맴돌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소름 끼치는 안광을 반짝인채 그저 맹목적으로 싸우는 데스 나이트의 모습이었다.
[이건……?]
헤카테는 안면갑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던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꿈쩍도 않던 거성에 자그마한 균열이 일었다.
디아는 균열을 향해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파각!
황혼은 그대로 헤카테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이미 데스 나이트가 되어 버린 그에게선 한 방울의 피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다시 검을 비틀어 뽑아내자, 헤카테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푸른 안광이 핑그르르 돌았다.
녀석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처박히자, 헤카테의 푸른 안광이 빛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난 전구마냥 두 눈에 불이 꺼졌다.
“허억……! 허억……!”
디아가 가쁜 숨을 내몰아쉬었다.
피부는 굵은 땀방울로 흠쩍 젖었으면서도 그가 내뱉는 숨결엔 차디찬 한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체내에 부담이 상당한 듯했다. 아마 주인공 버프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얼어 죽었을지도.
화륵!
녀석의 주윌 불태우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녀석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 좀 쉬어라.”
이제 남은 건 라크레시아와 나 둘뿐.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지금 시점에서 디아가 깨어 있는다고 별반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아마 이 대륙에 누굴 가져다 놔도 지금 눈앞의 녀석은 못 이긴다.
소설 최종장에까지 대륙에 파멸을 일으키는 끝판왕.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녀석이 뭘 원하는건지 파악하는 것 말곤 없었다.
“…원하는 게 뭐지?”
“후후. 예전에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한 여자를 원한다.’
그게 대체 누굴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알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대단한걸? 옛날에 꽤나 유명했던 기사라길래 덜컥 죽어 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이걸 이기네?”
“…….”
여긴 목숨이 걸린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녀석에겐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에 불과한 듯했다.
“그럼… 다음 단계로 가 봐야지. 이것도 막나 한 번 볼까?”
“…뭐라고?”
여기서 대체 뭘 더하려고?
내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바앙.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이 소설의 주인공, 디아 제니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로 녀석의 몸뚱이는 점점 라크레시아에게 가까워졌다.
쿠구구구……!
이내 주변의 마나가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한 줌 남은 내 몸 속의 마나까지 빨려 가자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
그 마나들은 곧 디아의 단전 속으로 향했다.
“으윽…….”
정신을 잃은 채 신음을 토하는 디아.
난 순간 녀석이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마나 폭주.
만들어진 블랭크에게 억지로 마나를 주입시킬 때 일어나는 대참사.
놈은 주인공을 일회용 폭탄마냥 쓰려 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녀석의 폭주는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건 당연 한거고, 주인공 버프에 듬뿍 절여진 녀석이라 해도 지금 마나 폭주까지 이어진다면 살아남길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주인공이 사라진 소설.
그럼 끝이다.
라크레시아뿐만 아니라 자잘한 대재앙조차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만둬!”
“흐흐흐……! 왜지? 이깟 햇병아리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 자식이……!”
바들거리는 손으로 일어나 보려 했지만.
따악!
“으윽!”
“일단 가만히 있어 보라구.”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난 또다시 무력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쓰레기 같은 설정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모든 걸 끝내 버리는 최종 빌런이라니.
이제 모든 게 끝인가 싶던 그때.
파지직…!
발디그 던전 앞 공터에 이변이 나타났다.
허공을 뚫고 생겨난 작은 균열.
이는 곧 크게 자라나 하나의 문이 생겨났다.
대공간 이동 마법.
설마 소테라에서 지원이라도 온 건가?
고맙긴했지만 그걸론 부족하다.
온 대륙 기사단장이 다 모이는 거라면 모를까.
빈트하겐이 온다 해도 라크레시아 저놈 앞에선 똑같은 벌레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내 균열을 뚫고 나타난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
게다가 백발이 형형한 늙은이 하나.
라피스 마탑주라도 온 건가?
이왕 올 거면 빈트하겐 녀석도 데리고 왔으면 좋을 텐데.
아마 저 늙은이도 라크레시아의 손가락질 한 방이면 산산조각 나 버리겠지.
“젠…….”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려는데,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따스함이 느껴지는 중후한 음색.
그의 목소릴 들은 난 곧바로 깨달았다.
이 소설 속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
마치 신이라도 마주한 것마냥 느껴지는 경외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자는 마탑주 따위가 아니다.
자잘한 주름으로 가득한 백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마탑주 따위에 비견 될 마법사는 아니었다.
“서,설마…….”
“…오베론.”
라크레시아는 노인을 향해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베론 스테이라.
라크레시아와 대척점에 선 또 다른 초월자.
카잔 제국을 멸망시키고 거짓된 평화를 만든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
대전쟁 당시 홀로 제국을 멸망시킨 뒤로 그대로 종적을 감춰 버린 녀석.
그가 소설의 주 무대 시점에서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거 녀석의 유산이나 이따금 등장했을 뿐.
그런 녀석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저 노인이 정말로 오베론이라고?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남다른 위압감은 분명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이상은 인과를 벗어난 일이다.]
“…인과? 네놈이 그딴 걸 입에 담을 수 있나?”
[더 이상 개입하겠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흐흐! 그래! 마음껏 하라고! 이 망할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처럼!”
[…….]
오베론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곤 눈을 한 번 꼭 감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말은 않겠다. 오늘은 물러가라.]
“…흥.”
오베론의 말에 라크레시아는 흥이 꺼진 듯 다시 디아를 내려놨다.
쾅!
“으윽…….”
덕분에 1미터 높이에서 자유낙하한 주인공이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두고 보라고. 네놈의 석상 아래서 침 뱉을 날이 올 테니.”
[…….]
“그리고 이…….”
삐이익!
뒤이어 라크레시아가 뭐라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 귀를 단단히 틀어막은 것마냥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귀머거리가 된 채로 난 녀석들의 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라크레시아 저놈이 뭐라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파앗!
얼마 지나지 않아 라크레시아의 몸에 커다란 벼락이 번쩍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서 있던 녀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우웅…….
그가 사라지자 먹먹했던 고막이 다시금 힘을 되찾았다.
다시금 청력이 되돌아온 난 쓰러진 채로 오베론을 올려다봤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 세상은 뭔지, 누가 날 이 세상에 처박은 건지.
나 스스로 의문에 대한 답을 내보긴 했지만, 오베론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그…….”
[미안하네. 이세계에서 온 자여.]
“뭣……?”
파지직!
다급히 뭔갈 더 물어보려던 찰나.
오베론은 다시금 허공을 찢고 나타난 균열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런…….”
긴장이 풀린 탓일까.
힘겹게 뜨고 있던 눈꺼풀이 천근같이 느껴졌다.
“…작님……!”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발디그 던전에서 난 굉음을 듣고 몰려온 동료들이었다.
“…보게! 친우여……!”
“아…….”
짤딸막한 드워프의 거친 손길이 느껴지는걸 끝으로.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오늘도 이거야? 이래 가지고 싸울 힘이나 나겠어?”
“아가리 닥치고 그냥 먹어라.”
희멀건한 죽만 먹은 지 벌써 한 달째다.
녀석의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어쩔 수 없다.
땅거미뱀의 독은 정화초를 넣고 한 시간 가까이 끓여야 사라지니까.
“싫으면 굶든가? 너 말고도 먹을 사람 많거든?”
“으으…….”
“그리고. 이것도 나름 영양식이라고.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까지 골고루 들어갔으니까.”
“영양식은 개뿔. 독기, 마기까지 듬뿍 들어가서 먹기만 해도 피통 죽죽 빠지는구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찌어찌 한 달간 먹으면서 죽지도 않았고.
옆에 반투명하게 떠 있는 HP바가 줄고 있긴 했으니.
“그만들 좀 싸워라. 가뜩이나 힘도 없는데 우리끼리 힘 빼서 뭐해?”
“…알았다구.”
녀석은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들었다.
나도 한 숟갈 퍼 입에 가져다 댔다.
끔찍한 식감이다.
미끌거리면서 거친 식감이라니.
색연필을 끓여 먹으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다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만 있다면, 절대 이딴 죽 같은건 먹지 않으리라.
“아쉬타르만 죽으면 고기도 실컷 먹겠지?”
“…그렇겠지.”
“흐! 제대로 된 소고기 먹어 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네.”
“소고기는 무슨. 난 x팸에 쌀밥 한 숟갈만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
“x팸? 그 김치에 싸 먹는다는 그거 말인가?”
“그럼 너무 짤 텐데.”
“그런가? 발할라 시스템도 믿을 게 못 되는군. 매번 김치에 싸 먹으라 하더니만.”
마신 아쉬타르를 무찌르겠다던 7인의 결사대.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텼다.
서로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하면서 견뎌 냈다.
언젠가 다시 회복될 지구를 꿈꾸며.
하지만.
‘그럴 일은 없지.’
마신을 죽인다고 지구의 결말은 바뀌지 않았다.
똑같이 지독한 독기로 가득한 지구일 뿐.
지독한 꿈이다.
이미 다 죽어 버린 동료들과 마지막 만찬이라니.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살아 남는건 나 혼자뿐.
그런 나도 오랜 시간 고통 받다가 똑같이 죽고 만다.
“으윽…….”
“백작님!”
끔찍한 악몽을 깬건 일레느의 목소리였다.
“아…….”
푹신한 침대와 향긋한 냄새로 가득한 방 안.
회복을 위해 향긋한 향초까지 피워 코끝이 간질거렸다.
“…꿈이군.”
끔찍한 옛 기억에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움직이면 안 돼요! 아직 회복이…….”
“나야 별로 한 것도 없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지?”
“그, 그게…….”
일레느는 침울한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백작님도 하루 꼬박 지나서야 일어나셨어요. 그치만…….”
“…죽었나?”
“예?”
설마 프리아나가?
지혈을 하긴 했어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뒤였다.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을 양이었으니.
“이런 젠…….”
“백작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문을 박차고 들어선 낯익은 남자.
온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목에는 부목까지 덧대고 있었지만 용케 살아 있었다.
속검의 기사 프리아나.
녀석은 다행히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예? 그럼요! 당연하죠! 아직 못 이룬 꿈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대로 죽으면 억울해서라도 다시 살아날 겁니다!”
“흐흐! 이 자식!”
난 녀석의 머리통에 헤드락이라도 걸려다가 멈칫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회복은 된 듯싶었지만 라크레시아의 공격에 목에 베일 뻔했으니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런데. 일레느. 뭐가 문제인거지?”
“그게… 디아 제니스. 그 기사님이…….”
일레느는 차마 못 말하겠는지 말끝을 흐렸다.
이내 그녀의 대답을 마무리한 건 프리아나였다.
“디아 제니스. 그 친구가 깨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으음… 워낙 고생을 했으니 말이야. 튼튼한 놈이니 금방 일어날 거다.”
‘왠만해선 죽지 않는 몸이니까.’
“그게 좀 이상합니다. 이미 전신에 나 있던 화상이나 상처들은 벌써 회복됐으니까요.”
“그래? 그럼 대체 뭐가…….”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디아의 맥박이 잡히질 않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요.”
마나가 폭주하기 전 첫 번째 증상.
폭발하려는 힘을 억누르기 위해 신체의 맥박이 거의 정지하는 수준으로 느려진다.
먼치킨 소설이나 다름 없는 주인공의 신체.
약간의 양심은 있는지 작가 녀석도 주인공에게 한가지 큰 제약을 걸어 놨다.
광폭화.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주인공은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폭탄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