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껏 살아온 세월 탓인지 자꾸만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것만 같았다.
너무 쉽게 풀리지 않았냐고.
이쯤 되면 의심할 법 하지 않았냐고.
카잔 라크레시아.
이 망할 소설 속 최종 보스가 등장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건 아니냐고.
그 대가가 이거라는 거다.
소설 속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였으며, 지금은 날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조연.
프리아나. 그의 죽음이 대가다.
“…닥쳐!”
불안감을 떨쳐 내려 억지로 토해 내듯 소리쳤다.
옅게 떨리는 목소리는 깊은 산골의 숲에 메아리쳐 울렸다.
이윽고 메아리 소리가 잦아드는 그때.
…파앗!
숲길을 뚫고 드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발디그 던전.
프리아나와 처음 마주했던 그 땅.
비록 그땐 적이었고, 진실만으로 맺어진 주종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프리아나는 지금껏 날 믿어 왔고 그간 녀석 덕분에 숱한 위기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도무지 따라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강한 기사.
이제야 녀석과 같은 경지까지 따라 잡았다 생각했는데.
“저, 저건……!”
디아가 발디그 던전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이미 쓰러진 채 바들바들 떠는 순찰대원들.
그 가운데 흰 외투를 걸쳐 입은 기사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새하얀 순백색의 외투는 이미 붉은 피로 흠뻑 적셔져 있었다.
강직한 기사의 표본이나 다름없던 그가 피로 흠뻑 젖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옆에 선 건틀렛의 기사, 디아 제니스와 똑 닮았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얼굴.
그보다 십수년은 더 늙어 보이는 은발의 남자.
카잔 라크레시아.
놈의 낯짝을 본 순간, 머릿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절대 싸우지 마라.’
상대할 수 없는 적에게 달려드는 건 자살 행위다.
힘을 모으고 약점을 파악해 다시 도전해라.
수십 년간 지옥에서 살아온 내 이성이 외쳤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남지?
친구도, 애인도, 동료도 뭣도 없이 홀로 남아 적을 쓰러뜨린 다음엔?
후회 속에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 갈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지막 남은 한줄기 이성이 끊어졌다.
“이 개새끼가……!”
두 발이 녀석을 향해 움직였다.
동시에 내가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다했다.
검에선 차디찬 냉기와 뜨거운 열기가 함께 맴돌았고, 바닥에선 바위가 솟아나고 두터운 나무뿌리가 자라났다.
거기에 등 뒤를 세차게 밀치는 강한 바람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굵고 선명해진 오러가 터져 나왔다.
일격에 내 모든 힘을 다한다.
그럼에도 녀석의 목덜미를 베는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소설의 최종장까지 읽은 난, 이자가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콰아아아앙!
혼신의 힘을 다한 검격이 놈을 향해 내려쳐졌다.
묵직한 검압은 라크레시아가 서 있는 주변 대지를 산산조각 냈다.
거친 풍랑이 반발하듯 터져 나왔고, 무수한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금껏 내보인 공격 중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다.
“…흐힛.”
제발 눈살이라도 찌푸리게 만들었다면 좋으련만, 녀석은 그저 흰 이를 드러낸 채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용린검은 녀석의 지척에 우뚝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얼음벽에 박히기라도 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 검.
“하아압!”
뒤늦게 디아가 황혼을 쥔 채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디아가 등장하고 나서야 라크레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디아가 방해된다고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을 본 떠 만든 생명체를 향한 생리적인 혐오인 듯했다.
녀석은 검지와 엄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따악!
순간 디아와 내 몸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걷어차인 듯 공중으로 솟았다.
“끄악!”
“커…헉!”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군 우리 둘은 그대로 프리아나의 곁에 처박혔다.
“으윽…….”
부들거리는 손으로 용린검을 집어 들었다.
다시 일어나야…….
“백작…님……?”
“…프리아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프리아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겉옷이 다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긴 했지만, 녀석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건 분명 한 가질 의미했다.
라크레시아가 프리아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아니 언뜻 스쳐 지나가듯 생각이라도 했다면 프리아나는 죽었을 거다.
이 미친 소설 설정 상 랭크 9의 마법사, 오베론에 버금간다는 건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익……!”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라구. ‘아직’ 살아 있잖아?”
“닥쳐! 이 찢어 죽일……!”
“백작님! 어서 프리아나 님의 지혈부터……!”
디아의 만류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나답지 않았다.
분노는 일을 그르친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했다.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선.
“…힐!”
남은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프리아나에게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지지직……!
허파가 짜부라질 듯한 통증까지 느껴 가며 힐을 퍼부어 봤지만, 프리아나의 목에 난 깊은 자상은 좀처럼 치유되지 않았다.
울컥!
“으윽…….”
오히려 날 약 올리려는 듯 피를 토해 내는 깊은 상처.
차라리 지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래!”
난 서둘러 프리아나의 손을 살폈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하나.
예전 고대인의 유적에서 나눠줬던 ‘이시스의 반지’였다.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반투명한 방패를 만드는 고대인의 유물.
파각!
줬던 걸 다시 뺏는 건 미안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프리아나 입장에도 죽는 것보단 이게 나을 거다.
이시스의 반지.
정확한 명칭은 ‘차단의 암석’이다.
즉, 반지가 아닌 박혀 있는 돌멩이가 본체다.
반지에서 떼어 낸 돌멩일 상처에 댄 채 미약하게 남은 마나를 흘려 넣었다.
동시에 프리아나의 상처를 막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크윽…….”
그러자 녀석의 계속해서 새어 나오던 피가 멎었다.
어디까지나 임시로 막아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당장 급한 불은 껐다.
“오오. 대단한데?”
“…….”
“하핫! 긴장하지 마! 오늘은 어디까지나 ‘헤카테’라는 기사를 만나러 온 것뿐이니까.”
“…헤카테?”
도버라는 이름조차 사라진 옛 왕국을 지키던 기사.
도버의 기사 헤카테.
그 자를 만나러 왔다는 건…….
…쿠구구.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건지, 계속해서 느껴지던 대지의 떨림이 멈췄다.
그리곤 방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발디그 던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열린 문의 틈새에서 한 기사가 걸어 나왔다.
푸른 안광을 가진 채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
방금 위드라 빈민촌에서 본 어쭙잖은 녀석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진짜 죽음의 기사.
데스 나이트였다.
그에게선 과거 동상에서 본 슬픔에 가득 찬 얼굴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죽음의 기사일 뿐이었다.
“…젠장.”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그나마 라크레시아가 우릴 죽일 마음이 없단 사실 하나에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한때 전설이었던 데스 나이트의 등장은 일말의 희망마저도 박살 내 버리고 말았다.
“이자구나.”
[…….]
데스 나이트, 헤카테는 조용히 주인을 응시했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갤 숙였다.
[…명령을.]
“크흐! 역시. 이게 던전의 제대로 된 사용법이지. 안 그래?”
“…미친 놈.”
원혼이 모이는 곳엔 던전이 생성된다.
때문에 꽤나 많은 수의 던전은 한때 상위 랭크였던 자들의 무덤이기도 했다.
절망이란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강한 법이니까.
데스 나이트나 위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제물이 될 대상의 육체와 의식이었다.
낮은 경지의 흑마법사들은 거의 온전한 상태의 제물이 필요하지만, 눈앞의 저 X끼 같은 놈들은 아니다.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 버린 뒤라도 되살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던전은 던전 마스터의 기억과 의식 그 자체.
데스 나이트를 뽑아내기엔 충분한 재료였다.
“마음껏 날뛰라구. 이 망할 세상을 향해서 말이야.”
[명령 받들겠습니다.]
한때 강직한 기사였던 헤카테.
그는 자신을 멸시하고 절망에 빠뜨린 모순 덩어리의 세상을 향해 칼끝을 겨눴다.
나와 주인공 녀석은 힘겹게 일어서 자셀 잡았다.
“…움직일 수 있겠나?”
“…네!”
“으윽…….”
지혈이 되자 겨우 기력을 되찾은 프리아나가 힘겨운 신음 소릴 냈다.
“배, 백작님…….”
“좀 쉬어라. 피를 한 바가지나 쏟은 녀석보고 싸우라 하긴 싫으니.”
“도, 도망 치셔야 합니…….”
프리아나는 거기까지 말하곤 고개가 풀썩 땅에 떨어졌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어 콧구멍에 손가락을 대봤다.
약하긴 하지만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긴 했다. 다행히 가벼운 기절인 듯했다.
‘이대로 계속 내버려두면 기절로 끝나진 않겠지만.’
빨리 승부를 내야 했다.
저 망할 녀석 속셈이 뭔진 모르겠지만.
라크레시아를 곁눈질 하던 순간, 헤카테의 짙푸른 안광이 길게 선처럼 뻗어 나갔다.
…파앗!
잔상이 남을 정도로 어마 무시한 속도.
그 끝엔, 나와 디아가 서 있었다.
콰앙!
“으윽!”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헤카테의 검을 막아 냈다.
[싸움에… 집중해라…….]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음색.
뿐만 아니라 강렬한 놈의 마기에 순식간에 전신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어딜!”
싸움은 일대일이 아니었다.
디아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헤카테의 허릴 노리고 들어간 검격.
카앙!
녀석은 가볍게 검을 비틀어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받아 냈다.
그리곤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잠시 거릴 벌렸다.
[……?]
디아의 몸에서 이질감이라도 느꼈는지 헤카테는 고갤 갸웃했다.
덕분에 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크흑……!”
내뱉은 한 줌의 호흡에서 하얀 김이 어렸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
대전쟁 시절 수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을 만했다.
디아의 오러에서 이상함을 느낀 헤카테는 그대로 거리를 벌린 채 상황을 살폈다.
“…쯧.”
하지만 좀처럼 틈이 보이질 않았다.
차분히 내딛는 녀석의 발걸음엔 과거의 상당했던 경지가 묻어 나왔다.
빈틈을 만들 수만 있다면…….
“…디아.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뭐죠?”
“잠시 시간 좀 벌어 줄 수 있나?”
“…네!”
디아는 굳은 표정과 함께 고갤 한 번 끄덕이곤 헤카테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동안, 난 품속에 쟁여 뒀던 아티팩트 하날 만지작거렸다.
카앙!
그러는 사이, 디아와 헤카테의 검이 다시금 부딪혔다.
손발이 저릿해지는 디아였지만, 그럴 때마다 몸을 강하게 떨며 냉기를 쫓아내려 애썼다.
마기에 접촉할수록 체내는 차가워진다.
이를 막기 위해선 그 이상의 열을 만들어 내는 방법밖에 없다.
의도한 건지, 스스로 체득한 건진 몰라도 녀석은 몸을 강하게 떨어 냉기를 억눌렀다.
“후읍!”
난 조금이나마 회복된 마나를 쥐어 짜내 불의 방벽을 생성해 냈다.
디아와 헤카테의 주윌 둘러싼 불은 조금이나마 디아의 체온을 덮혀 줬다.
헤카테는 마법까진 예상 못 했는지 주윌 두리번거렸다.
카앙!
그런 그에게 디아가 쏜살같이 내달려 검을 휘둘렀다.
디아는 뜨거운 불길 가운데 차디찬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싸움에 집중하셔야죠!”
[…후후.]
“웃을 틈이 있어?”
파앙!
그러는 사이 난 불 방벽 너머로 화염구를 던져 댔다.
불길에 쌓인 채 디아와 내 협공에 녀석은 화염구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파앙!
첫 타격은 그닥 위력적이지 않았지만, 붉은 화염구는 계속해서 녀석의 몸에 부딪히며 불꽃을 피웠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주변 대기에 디아는 다시금 황혼을 고쳐 잡았다.
그리곤 둘 사이의 연이은 합이 터져 나왔다.
난 그 사이사이 계속해서 화염구를 적중시켰다.
카앙! 카앙!
보통 상대였다면 승리를 확신했겠지만, 상대는 데스 나이트였다.
불길 너머로 디아의 낯빛은 점차 어두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잔재주는 거기까지다.]
헤카테는 짧게 말함과 동시에 온몸을 감싸고 있던 마기를 뿜어냈다.
“크윽!”
불길 안에서 맞서고 있던 디아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길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미 데스 나이트의 힘이 제 것인양 사용하는 헤카테.
점차 옛 기사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자신을 버린 세상을 향한 원한.
거기에 라크레시아의 힘까지 더해지자 헤카테는 점점 본인의 기억을 잃고 있었다.
난 서둘러 녀석을 향해 화염구 한 발을 발사했다.
이 이상 그가 자신을 잃기 전에.
파앙!
[…흥!]
헤카테는 날아오는 화염구를 걸리적거린다는 듯 가볍게 손등으로 쳐 냈다.
…카앙!
이번엔 마탄이 흐드러지는 공허한 소리가 아닌, 묵직한 쇳덩이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냉기에 불꽃이 사그라들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아티팩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나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필요할까 싶어 준비했던 아티팩트.
착용시 독기를 정화시켜 주는 효과가 붙어 있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인간성을 잃고 데스 나이트가 되어 버린 그에게 일순간이나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아티팩트.
헤카테의 안면갑.
공중으로 치솟은 녀석의 안면갑이 불길에 반짝였다.
은은한 빛깔의 안면갑엔, 짙푸른 안광을 내뿜는 괴물의 모습이 비춰졌다.
[…이건?]
순간 굳어 버린 헤카테의 몸.
디아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