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백작님은 괜찮으시려나.’
프리아나는 두 눈 부릅뜨고 주변을 감시하면서도 주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대륙은 넓고 그보다 강한 자도 많았다.
‘…괜찮으시겠지.’
그간 숱한 위기도 함께 극복해 왔으니까.
‘그분은…. 신기한 분이니까.’
위험한 일일수록 부하를 시키지 않고 직접 나서는 귀족이라.
어렸을 적부터 숱하게 들어온 올바른 귀족의 자세였지만 이를 직접 실행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다들 제 한 몸 아끼기에 급급해, 가신 따윈 언제든 버리는 말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임페라는 전혀 다른 귀족이었다.
“흠.”
프리아나는 지난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별 볼 일 없는 시골 백작 가문의 망나니.
그게 이안 임페라라는 남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임페라 백작가의 대행인과 결투에서 프리아나는 패배했다.
그간 엘리크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이어진 이안과의 인연.
처음엔 고민도 많이 했다.
쥐뿔도 없는 거지 백작가 망나니 공자놈한테 자신의 인생을 걸어도 되는가 하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심은 확신이 됐다.
평범한 이라면 상상도 못 할 성장세에 끝을 알 수 없는 방대한 지식까지.
그렇게 프리아나에겐 이안을 향한 굳은 충성심만이 남았다.
만약 그가 이안을 섬기지 않았더라면?
그저 다른 이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아이소테르의 왕만을 위해 일했더라면?
아마 이 땅은 미친 왕 갈렌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을 거다.
그제야 지난날을 후회하며 살다가 결국 죽었을 거고.
“후후.”
인생이란 건 참 모를 일이다.
다 쓰러져 가는 귀족 가문을 선택한 덕에 왕국을 구할 수 있게 되다니.
“시작됐답니다! 흑마법사 놈들이 술식을 펼쳤다는군요!”
“그런가!”
순찰대원의 말에 프리아나는 고갤 홰홰 털며 옛 생각을 떨쳐 냈다.
지금은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다.
임페라 백작령을 노리는 흑마법사 무리.
이미 첩보로 놈들의 위치와 함정을 파악해 놓은 뒤긴 했다.
하지만 아직 이안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었다.
때문에 프리아나는 발디그 던전에서 상황을 살피라 명받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즉시 보고해라!”
“옛!”
군기가 바짝 든 순찰대원들의 외침에 프리아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곳에서 별 얘기는 없나?”
“예! 아직까진 이상 없답니다!”
“좋아.”
왠만한 준비는 다 해 놓은 뒤였다.
저택은 하룬과 그의 골렘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고, 광산은 이스바르트와 이슬린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프리아나가 해야 할 건 이곳 발디그 던전을 지키는 것뿐.
오늘은 혹시 몰라 떠돌이 용병들의 출입도 제한해 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던전 못 들어가는 겁니까?”
흑마법사들이 눈치챌 수도 있는 터라 오늘 아침 급작스럽게 내린 명령이었다.
덕분에 먼 길 발걸음 했던 용병들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예. 입장을 재개하란 명령이 있기 전까지 발디그 던전은 출입금지입니다.”
“아니, 뭐 그런…….”
“백작님의 명령입니다.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으으…….”
몇몇 용병들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순찰대원들의 호통에 꼬랑지를 말 수밖에 없었다.
발디그 던전은 초보자들이나 들리는 약소 던전.
여길 들리는 용병이래 봐야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미안하지만 백작님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소.”
프리아나는 미안한 마음에 영지로 온 이들을 다독였다.
그의 명성을 이미 들어 본 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억…….”
“아, 아닙니다! 영주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래야겠지요… 허허…….”
“고맙소.”
프리아나의 고맙단 말에 용병들은 튀어나와 있던 입이 들어갔다.
“뭐… 헤헤…….”
“하지만 오늘 꼭 발디그 던전에 볼일이 있으면 어쩌죠?”
“…네?”
별안간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
조금은 굵은 듯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머리에 두건을 덮어 쓴 채 후줄근한 차림새인 남자는 그닥 단련된 몸은 아니었다.
‘마법사인가?’
“미안하지만 안 됩니다. 이 이상 나서시겠다면…….”
프리아나는 조심스레 검집에 손을 얹었다.
그닥 강해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께름직함은 그를 긴장케했다.
수년간 검을 잡아 온 이의 감.
이는 단순한 기우라 하기엔 어려웠다.
“그치만… 전 오늘 꼭 기사님을 뵈어야 하는 걸요? 아주 유명한 기사님이시라구요.”
“…….”
발디그 던전에 유명한 기사라.
프리아나가 알기로 여기에 유명한 기사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프리아나 본인 정도였다.
“대체 누굴……?”
“헤카테 님이요. 모르시나요?”
푹 눌러쓴 두건 너머로 흰 이가 드러났다.
프리아나도 헤카테가 누군진 알고 있었다.
먼 과거 주인에게 버림 받은 기사.
그리고 결국 블랭크로 전락해 버린.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원혼에 휩싸여 대재앙을 일으킨 남자.
이곳 발디그 던전의 진짜 주인.
헤카테.
“그게 무슨……..”
“물론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말입니다. 전 헤.카.테. 그 남잘 만나러 왔다구요.”
프리아나는 방금 전부터 이 낯선 남자가 거짓을 말하는지 ‘거짓 간파’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 단박에 파악하는 스킬.
분명 스킬에 의하면 녀석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나오는 결과는 같았다.
이 남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미 먼 과거에 죽어 버린 기사를 만나러 온 거다.
찰나의 순간.
프리아나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다.
그리고 이내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모두 물러서라!”
“…흐흐!”
프리아나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낯선 남자의 엄지와 검지가 맞 부딪혔다.
따악!
단지 그것만이었다.
복잡한 마나의 요동도 없이 그저 단순한 손가락 퉁기기.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단순치 않았다.
…화아악!
낯선 이의 주변으로 매서운 강풍이 휘몰아쳤다.
“으아악!”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강풍에 집어삼켜져 날아갔다.
이는 떠돌이 용병들뿐만 아니라 순찰대원, 그리고 프리아나까지 포함됐다.
“으윽!”
주변 사람들은 한순간에 바람에 휘날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허억……! 바, 방금 무슨……?”
쓰러진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지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방금 휘몰아친 강풍이라면, 이들의 몸을 찢어발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무슨 꿍꿍인지 발디그 던전의 사람들을 살려 놨다.
마치 자신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보라는 듯.
“후우.”
강풍이 가라앉고, 남자가 푹 눌러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달빛보다 하얗게 빛나는 백발.
조금은 초췌한 듯한 낯빛.
그리 흔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드문 얼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낯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놈이……!”
프리아나는 힘겹게 일어나려 애썼다.
이미 다른 이들은 모두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히야! 대단한데? 벌써 그 정도야?”
“그게 무슨……!”
“프리아나는 분노에 가득찬 채로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다 기억 속 저편에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합의 섬.
연합 회의가 열렸을때 이안의 기억을 잠깐 옅볼 수 있었다.
거기서 본 정체 불명의 사내.
얀 공작이란 가명을 쓴 남자이자.
대륙을 차지한 왕국 연합 최대의 적.
“카잔 라크레시아……!”
“흐흐.”
라크레시아는 프리아나의 외침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이자가 나타났다는 건.
흑마법사들의 테러 따윈 어린애 장난이 돼 버릴 수 있단 소리였다.
프리아나는 조금이나마 남은 힘을 쥐어 짜내 호출기에 마나를 흘렸다.
단순히 버튼만 누르면 간단한 의사 소통만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마나를 흘려 넣으면 긴급 신호가 송출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다 프리아나는 멈칫했다.
‘여기서 백작님이 오신다면……?’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라크레시아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이 라크레시아를 이긴다는 상상 자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최악의 적을 맞닿뜨린 지금.
어떻게 해야 그를 막을 수 있을까?
프리아나의 목숨을 바친 저항이면 가능할까?
“…언령이라고 아나?”
“뭐, 뭐라고?”
“음… 네 수준에선 이해가 안 되려나? 뭐… 그런 게 있어. 나나 오베론쯤 되면 생기는 제약이랄까?”
“무슨 소릴 하려는거냐!”
“무슨 소리긴. 이해 못하는 관중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 드리는 거지.”
“뭐, 뭣이?”
프리아나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마주한 듯한 라크레시아의 반응에 핏대가 불룩 솟았다.
덕분에 힘겹게나마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싸움은 무리였다.
온몸이 쇠사슬에 묶인 듯 엄청난 저항감이 전신를 옥죄었다.
“아무튼. 그쯤되면 제약이 생기거든. 예를 들어 너를… 스윽! 해 버린다고 하면.”
놈은 검지 손가락으로 목 긋는 시늉을 했다.
“크윽……!”
그러자 아무런 접촉도 마나의 파동도 없었음에도 프리아나의 목에 깊은 자상이 생겨났다.
울컥이는 피를 프리아나는 가까스로 지혈했다.
“그래. 이렇게 된다구.”
“이, 이익……!”
분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가볍게 내뱉은 말 한마디만으로 프리아나는 죽을 뻔했다.
이게 오베론과 같은 경지에 선 자.
압도적인 힘 앞에 프리아나라 할지라도 무력할 뿐이었다.
“아잇.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으윽…….”
“자, 그럼 다시 말해 보자. 내가 오늘 여기 왜 왔다고 했지?”
“…….”
“헤카테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
“이 자식이… 멈…….”
“하핫!”
라크레시아는 뚜벅뚜벅 발디그 던전으로 다가갔다.
이미 모든 이들이 전투 불능이 돼 버린 지금.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자! 그럼! 기대하시라!”
육중한 철문을 하나 둔 초라한 던전.
괴거의 명성은 이미 빛 바랜 초라한 던전으로 전락해 버린 뒤였다.
라크레시아는 천천히 던전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쿠구구구……!
그러자 대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발디그 던전 주위로 울려 퍼졌다.
***
쿠구구……!
“이런 미친……!”
예감이 좋지 않다.
프리아나가 긴급 상황 신호까지 보낸 걸 보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니란 건데……!
“배, 백작님! 이 굉음은 대체…….”
“뭔지는 나도 모른다. 대신… ㅈ된 건 분명하지.”
“그런……!”
남은 흑마법사들은 뒤늦게 달려온 순찰대원들에게 맡겼다.
그리곤 곧장 프리아나에게 맡긴 발디그 던전으로 내달렸다.
두두두두!
제발 늦지 않길.
‘젠장.’
하지만 충분히 이유 있는 불안감이 전신을 옥죄였다.
프리아나 아르나.
소설 속 아이소테르의 기사단장이 될 자.
검술 랭크 7의 강력한 자였지만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조연.
소설의 후반부까지 주인공 녀석에게 큰 도움이 되는 녀석이지만, 이 소설의 왕족과 기사단장들의 최후가 그렇듯… 그도 같은 재앙을 맞이한다.
아직 이 지진의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년간 전장에서 굴러온 내 감은 이 망할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카잔 라크레시아.
소설 속 프리아나는.
라크레시아에게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