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데스 나이트.
죽음의 기사.
죽음의 기사란 이름답게 놈은 검은 투구를 푹 눌러쓴 채 위압감을 풀풀 뿜어 댔다.
짙푸른 안광을 빼곤 칠흑처럼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크르륵!]
제대로 된 언어도 구사하지 못하고 그르렁대기만 하는 걸 보니 그리 높은 수준의 데스 나이트는 아닌 듯했다.
녀석의 등장으로 조금 골치 아파지긴 했지만, 절대 이길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느슨해진 주인공 녀석에게 긴장감을 더해 줬달까.
놈은 흑마법사 놈의 가슴팍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커…허억……!”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데스 나이트를 부려 먹던 그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 어째서…….”
놈은 그렇게 피를 한 바가지 쏟아 내곤 숨이 끊어졌다.
데스 나이트는 흑마법 랭크 6부터 가능한 경지.
바닥에 쓰러진 저놈이 그만한 경지 같진 않아 보였다.
아마 흑마법사들의 왕국에서 지원해 준 거겠지. 소유권만 잠깐 이전해 주는 방식으로.
그 결과가 이거다.
분에 넘치는 힘을 사용한 대가.
“남의 거 빌려쓸 땐 조심했어야지.”
“…….”
숨이 끊어진 녀석에게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앞에 저놈을 죽여라.’
죽은 저 녀석 입장에선 날 향한 명령이었겠지만, 데스 나이트의 앞에 서 있던 건 저놈이니까.
“흠…….”
[크르륵…….]
주인을 잃은 데스 나이트는 이제 본능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
놈은 곧바로 두 번째 희생양을 맛보려 내게 달려들었다.
콰앙!
마기가 줄줄 흘러넘치는 데스 나이트의 검.
이는 곧 녀석의 검과 상극인 소드 오러와 격돌했다.
“크흐!”
단전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오러 소드는 서로 맞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상대방에게 흡수된다.
때문에 상위 랭크와 검을 섞을수록 강해지고, 받아 낼 수 없는 경지의 공격에 내장이 터져 죽는 거다.
내가 가진 오러와 녀석의 마기는 상극.
힘의 근원이야 같으니 시간이 지나면 단전 성장에 도움을 주겠다지만, 지금 당장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힘을 쓸수록 한기가 전신에 퍼진달까.
덕분에 대전쟁 당시에도 이 데스 나이트 때문에 왕국 연합이 고생 좀 했다.
데스 나이트 자체가 무지막지하게 강한 건 아니다.
놈들은 어디까지나 호위용 마물이니까.
비교적 근접전이 약한 흑마법사 특성상, 쓸 만한 기사 하날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으니까.
거기에 검을 섞을수록 적의 기력을 떨어뜨리는, 고기 방패로선 최적의 마물.
데스 나이트가 시간을 버는 동안, 흑마법사는 마탄 세례와 각종 저주로 적을 함락시켰다.
여간내기론 상대조차 힘든 제국의 흑마법사의 손에 수많은 성이 무너졌다.
‘그래 봐야 먼치킨 한 놈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크르륵!]
카앙!
검을 한 번 더 섞자 한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 이상 녀석의 검을 받아 냈다간 감기라도 걸릴 판국이다.
거릴 벌릴 생각으로 왼쪽 손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퍼엉!
[크륵!]
갑작스레 터져 나온 화염구가 녀석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덕분에 투구가 반쯤 박살 나긴 했지만 움직임을 멈추진 못했다.
[크르르…….]
벗겨진 투구 너머로 누렇게 썩은 녀석의 살점이 드러났다.
푸른 안광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왠지 화만 더 돋운 것 같았다.
‘이대로 천천히 데미지만 쌓으면 된다.’
이미 죽은데다 주인도 없던 터라 제대로 된 검술은 불가능했다.
그저 생전의 기억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뿐.
검술 랭크만 있다면 꽤나 골치 아팠겠지만 틈틈이 마법 랭크도 쌓은 내겐 놈을 쓰러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후후.’
전신에 퍼져 나가는 옅은 냉기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동시에 꽤나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대전쟁 후 데스 나이트는 굉장히 귀해졌다.
녀석을 만들 흑마법사들이 죄다 죽어 나갔으니까.
즉,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치 몹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하압!”
난 데스 나이트와 검을 섞는 대신, 마탄 하날 더 발사했다.
다만 방금과는 달이 붉은색이 아닌 푸른 빛깔의 마탄이었다.
[크륵……?]
또다시 머리통에 마탄을 맞긴 싫은지, 데스 나이트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머리를 막았다.
하지만 마탄이 향한 건 놈의 머리가 아니었다.
…쐐액!
머리를 향해 날아가던 마탄은 그대로 급강하해 놈의 발치로 향했다.
콰드득!
마탄이 발목에 적중하자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크르륵!]
발치가 묶인 녀석은 화가 난 듯 그르렁거렸다.
이미 한 번 죽은 녀석답게 그닥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이대로 불태워 버려도 되지만, 앞으로 일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없애 버리긴 아까운 놈이다.
“디아!”
“네!”
디아는 흑마법사 잔챙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듯 대답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서걱!
“크아악!”
그러면서도 디아의 검은 흑마법사들의 피를 양껏 취하고 있었다.
황혼이란 이름에 걸맞게 붉은 피로 물들어 가는 검의 도신.
흑마법사를 벤다고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보였다.
녀석에겐 똑같은 맛난 먹잇감일 테니까.
애초에 흑마법사를 차별하기 시작한 건 대전쟁 이후부터다.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황혼은 딱히 먹는 걸 거르거나 하진 않았다.
‘데스 나이트는 좀 다르겠지만.’
“그럼 교대다! 이놈을 상대해라!”
“네? 그치만… 왜 굳이……?”
“지금 내 명령에 토를 달겠다는 건가? 이거 좀 실망스러운데?”
“아, 아닙니다!”
우우웅……!
황혼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묵직한 진동음을 냈다.
흑마법사는 괜찮다지만 데스 나이트는 싫다는 거겠지.
“빨리빨리! 나 죽는다!”
“으읏……! 알겠습니다!”
디아는 방금까지 상대하던 녀석을 향해 뛰어올랐다.
“흐, 흐아악!”
콰직!
그대로 흑마법사 녀석의 머리통을 짓밟곤 내가 있는 곳을 형해 뛰어올랐다.
“흐흐! 좋아!”
소설에서 주인공이 데스 나이트를 처음 상대했던 그때.
녀석은 데스 나이트의 특성을 몰라 꽤나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데스 나이트들의 협공에 반죽음까지 갔었으니까.
지금이야 그거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겠지만, 예방 접종 정도는 될 거다.
콰득!
때마침 데스 나이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그동안 움직임을 봉인 당한 게 화가 나는지, 녀석은 새로운 적을 향해 포효성을 내질렀다.
[크라아아악!]
“으윽…….”
귀청 떨어질 것 같은 고함에 디아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면서 날 흘긋 쳐다봤다.
“쫄지 마라. 여차하면 도와줄 테니.”
“…여차하면 말씀이십니까?”
“흐흐. 그래. 교대라고 하지 않았나?”
난 뒤쫓아오는 흑마법사들을 향해 불 방벽을 소환했다.
화르륵!
“끄아악!”
“저 떨거지들은 내가 맡을 테니 잘 상대해 보라고.”
“…네!”
처음엔 살짝 빈정 상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뒤에 누가 있단 사실이 위안이 됐는지 녀석은 데스 나이트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파앙!
쏜살같이 내달리는 디아의 신형.
녀석의 특기인 연격을 쓰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도 과거 기사였던 자.
본능적으로 디아의 움직임을 읽고 방어 자셀 취했다.
카카캉!
연이은 세 번의 검격.
순식간에 몰아치는 검압에 데스 나이트의 균형이 뒤틀렸다.
하지만 이는 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으윽?”
난생처음 겪어 보는 한기에 디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심하라구! 녀석과 검을 계속 섞었다간 얼어 죽고 말 테니까.”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핫. 미안하지만 여기 이 떨거지들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디아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날카로운 얼음 창을 뽑아냈다.
이내 내 손을 떠난 검은 불로 세워진 방벽을 뚫고 적에게 적중했다.
“크악!”
불길 너머로 들려오는 흑마법사들의 비명.
불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제대로 맞은 듯했다.
얼음 창을 통과시킨 불 방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활 타오르며 틈새를 메웠다.
“이, 이 비겁한 놈!”
불 방벽을 뚫어 보려 흑마법사들이 마탄을 퍼부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따금 마탄이 날아올 때마다 난 그쪽을 향해 얼음창을 내질렀다.
“크악!”
“비겁은 무슨. 남의 영지에 테러나 하려던 놈들이.”
“이익……!”
불 방벽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흑마법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
“이, 이럴 수가…….”
“임페라 백작이 마법까지 쓴다는 말은 없었잖아!”
“젠장…….”
공개적으로 내가 마법을 쓴 적은 거의 없었다.
하기사 대전제 우승자가 마법까지 쓸 줄 안다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니까.
그것도 검술과 비슷한 경지로 말이다.
“그러게 상대를 잘 골랐어야지.”
“…퇴각이다! 일단 전열을 가다듬고…….”
“야 인마. 그렇게 다 들리게 계획을 말하는 게 어딨냐?”
화르륵!
이제야 퇴각을 결심한 놈들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내 영지를 상대로 습격한 놈들을 몸 성히 보내 줄 만큼 착한 인간이 아니다.
이미 놈들의 수도 꽤나 줄었던 터라, 얼마 남지 않은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불 방벽으로 가두는 것도 가능했다.
“크아악!”
사방이 불길에 갇혀 패닉에 빠진 놈들.
“이이익……!”
개중엔 호기롭게 탈출을 시도하는 녀석도 있었다.
녀석은 몸 주위로 방어막을 전개하곤 불 방벽을 향해 내달렸다.
꽤나 그럴싸한 계획이다.
방어막이 타 버리기 전에 불길을 빠져나오면 되니까.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짜지. 뒤지기 전까진.“
파라라락!
“끄악!”
불길에 몸을 내던진 녀석은 순식간에 종잇장 불태우듯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불의 방벽을 빠져나온 건 이미 다 타 버리고 난 ‘흑마법사였던’ 것뿐이었다.
“으으…….”
“얌전히 있으라구.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면 말이야.”
결국 남은 흑마법사들은 모두 불길에 사로잡힌 채 땀만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마음 같아선 팝콘이라도 가져오고 싶었다.
이글렌과 먹었던 기억에 고소한 팝콘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지금 불에 튀겨지는 건 팝콘이 아니라 흑마법사들이지만.
카앙!
“으윽…….”
어느새 전세가 뒤바뀌었는지 데스 나이트가 디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검을 섞을수록 불리해지는 건 디아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 그럼 여기서 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할까.
잠시 디아가 주춤하는 사이 데스 나이트의 검이 내려쳤다.
마기를 풀풀 내뿜는 녀석의 검은 그대로 디아의 가슴팍을 향해 돌진했다.
“…하압!”
콰악!
바로 그 순간, 디아는 몸을 빠르게 반 보 옆으로 회전시켰다.
동시에 데스 나이트의 검이 아닌, 팔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악!]
손목이 꿰뚫린 채 포효성을 내지르는 데스 나이트.
디아는 왼손에 걸친 훌륭한 무길 사용했다.
미스실 건틀렛.
경도론 웬만한 오러 소드에 뒤지지 않는 사기급 아티팩트.
녀석은 그대로 손끝을 쫙! 펼쳤다.
날카롭진 않지만 충분히 단단한 건틀렛은 이미 훌륭한 단검의 성능을 자랑했다.
그렇게 디아의 미스릴 건틀렛은 데스 나이트의 목덜밀 향해 곧은 검선을 뻗었다.
…퍼걱!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데스 나이트의 목덜미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을 잃은 기사의 몸뚱이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크! 좋아!”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주인공의 성장.
팬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잘했어! 이제…….”
디아에게 고생했단 의미로 격려의 한마딜 해 주려던 그때.
별안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뒷목을 유령이 핥기라도 한 듯한 끔찍한 기분.
난 무의식적으로 품속에 넣어 뒀던 호출기를 꺼내 들었다.
…우웅! …우웅! …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을 반짝이는 호출기.
이는 만약을 위해 대기시켜 놨던 프리아나에게서 온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