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33화 (133/222)

133화

탐욕의 악마 굴라르.

이 소설 속 악마 녀석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힘 하나만큼은 무지막지하게 센 놈이다.

그런 녀석을 따르는 흑마법사들이라.

‘뭐 그래 봤자 별 거 없는 놈들이지만.’

애초에 악마의 본체는 마계를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네크로노미콘 같은 아티팩트나 추종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보통이다.

그 마저도 귀찮다는 이유로 안 하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마계를 넘어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저들에게도 굉장히 부담이 가는 일이니까.

게다가 지금 악마들을 통제하고 있는 ‘그 녀석’ 탓에 괜한 힘 낭비를 하는 녀석은 없었다.

굴라르야 탐욕의 악마란 이름답게 귀찮음을 무릅쓰고 추종자들을 통해 난리를 치곤 했다.

그러다 주인공한테 뒤지게 맞고 마계로 도망치지만.

‘그럼 뭐다?’

굴라르를 따른다는 떨거지 놈들만 상대하면 그만이다.

주인공 녀석의 전투력 측정기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대라는 거고.

“뭐든 맡겨만 주세요!”

디아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로 날 우러러봤다.

마나의 호흡법을 전수시켜 줘서 그런지 녀석은 벌써부터 내 말 한마디면 껌뻑 죽을 정도였다.

주인공이 내게 그래 준다니 고맙긴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순진한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걱정도 됐다.

십수 년간 자신도 몰랐던 비밀들을 계속 알려 주는데도 수상쩍어 하긴커녕 믿고 따른다니.

‘어려서 그런가?’

뭐 나야 편하고 좋긴 했다.

“흑마법사 놈들이 내 영지를 노린다더군.”

“그런……!”

디아는 제니스 기사 학교 출신답게 흑마법사란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흑마법 랭크가 왕국 연합법이 생기고 나서야 금지된 거긴 해도, 놈들이 그간 벌인 만행들을 생각해 본다면 혐오감이 이는 건 당연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멀쩡한 흑마법사들은 다 처형당하고 악질인 놈들만 숨어들다 보니 이 지경까지 온 거지만.

흑마법사.

꼭 악마를 숭배해야만 흑마법 랭크를 보유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대전쟁 이전엔 흑마법이 금지되지도 않았었다.

죽은 이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반드시 끔찍한 일만은 아니었으니까.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짧은 만남을 가질 수도 있었고, 억울하게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 줄 수도 있었다.

시귀폭이니 뭐니 끔찍한 마법들도 많았지만, 이는 다른 랭크를 보유했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다.

산채로 화염 마법을 써 죽이는 미친 마법사도 많고, 몬스터들을 부려 테러를 일삼는 사역술사도 많았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굳이 흑마법 랭크만을 꼽아 금지시킨 건, 대전쟁 당시 벌어진 한 사건 때문이었다.

“…쯧.”

뭐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지금 살아남은 흑마법사들 대부분은 악질 쓰레기들뿐인 건 사실이니까.

“저에게 맡겨만 주세요! 반드시 놈들의 악행을 막아 내 보이겠습니다!”

“흐흐. 놈들이 어디 있는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인가?”

“으음… 그건…….”

디아는 정곡을 찔린 듯 대답하지 못했다.

별안간 나타나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는 테러는, 21세기 지구에서도 막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궁금해졌다.

디아는 분명 강하고, 잠재력도 이 대륙 누구보다 뛰어나다.

녀석에게 부족한건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

이를 키워 주기 위해 깜깜이 숲에 녀석을 집어 던져 놓고 온 거다.

세상 일이란 힘만으론 되는 게 아니란 걸 알려 주고 싶어서.

이스바르트와 콜린이 준비해 놓은 함정과 몬스터들에게서 살아 나온 지금.

녀석의 머리가 얼마나 커졌는지 알고 싶었다.

“한번 생각해 봐라. 흑마법사 놈들이 내 영지 어딜 노리고 들어올지.”

“…….”

고민에 빠진 녀석에게 한마디씩 거들며 스스로 생각을 유도했다.

“놈들이 카잔 제국의 옛 영토에 왕국을 세우긴 했지만, 모든 병력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진 못하겠지.”

“그럼… 적은 수만 몰래 넘어왔겠군요.”

“그렇지.”

“그러면서도 백작님의 영지에 큰 타격을 입힐 만한 곳을 고를 테구요.”

추론해 나가는 모습이 제법이었다.

“계속해 봐.”

“던전이나 광산 같은 경우엔 수입은 크지만 그만큼 대비 병력도 많습니다. 게다가 인부들끼리 서로 얼굴을 알고 있을 테니 숨어 들어가기도 힘들겠죠.”

“오호.”

“그렇다면… 영지의 수입도 적당히 나오면서, 사람도 바글바글한…….”

디아는 깨달았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위드라 시장 거리! 거기로 오겠군요!”

“음.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갤 끄덕이자 디아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임페라 백작령에도 꽤나 큰 시장 거리가 있긴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 쓰러져 가는 점포 몇 개 있는 게 다였던 임페라 백작령.

하지만 베네르 백작령이 새로 흡수된 후, 녀석의 영지에 있던 위드라 시장 거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오히려 베네르 백작령에 속해 있을 때보다 더 커졌다고 해야 하나?

이젠 꽤나 영지에 돈도 모이고, 새로 개발한 디저트도 입소문을 타면서 먼 타지에서 오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레드 핀 시럽과 블루 핀 시럽을 곁들인 파르페는 귀부인 사이에서 한 번쯤 꼭 먹어 봐야 할 디저트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틀렸다.”

미안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아앗…….”

“시장엔 돈과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다. 얌전히 돈이 오가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 바닥에선 저들끼리 싸움이 벌어진다.”

“그렇…군요.”

“때문에 수시로 순찰대가 돌며 이를 감시하는 중이지. 그리고.”

“…….”

“요샌 귀부인들까지 간식거릴 먹겠답시고 이곳 영지까지 올 정도다. 그런 귀부인들이 과연 돈만 들고 털레털레 왔을까?”

“…호위 기사들도 동행했겠죠.”

“그래. 거기에 귀부인들이 모여드니 돈 냄새를 맡은 상단도 슬그머니 발을 담그는 시점이고. 상단엔 으레 용병들이 따라 붙기 마련이지.”

“…….”

“그들이 모두 내 명령에 따르진 않지만, 흑마법사란 공통의 적이 나타나면 금세 하나로 똘똘 뭉칠 거다. 그럼 아무리 흑마법사 놈들이라 해도 금방 진압되고 말 거다.”

“네…….”

계속된 설명에 디아는 풀 죽은 강아지마냥 시무룩해졌다.

‘너무 다그쳤나?’

시무룩한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것도 잘한 거다. 시장 거리를 노리긴 할 테니까.”

“…네?”

“대신 흑마법을 이용해 구울이든 뭐든 잔뜩 끌어모으고 나서 말이야.”

“그렇다면…….”

“시장과 가까우면서 ‘사람’도 바글바글하고, 비교적 감시도 뜸한 곳이 딱 하나 있지.”

“…빈민촌.”

“그래.”

임페라 백작령이 아무리 부유해졌다곤 하나, 빈민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상, 빈민이 사라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예전보다 훨씬 그 수가 적어지긴 했어도 존재하는 건 존재했다.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는 자들이 사는 마을.

위드라 빈민촌.

흑마법사들은 십중팔구 거길 노릴 거다.

아무런 힘도 없는 약한 이들을 제물로 삼아 권속으로 만들고, 이들을 이용해 시장까지 단숨에 밀어붙인다.

어찌어찌 막을 순 있겠지만 이미 내 영지는 크나큰 피해를 입은 뒤일 거다.

‘더러운 놈들.’

소설에서도 흑마법사들은 대부분이 빈민촌을 노렸다.

가끔 미친놈들이 대놓고 사업장에 흑마법을 펼치긴 했지만, 개중에 성공한 놈들은 없었다.

모두 코딱지만 한 피해만 겨우 입히고 사로잡힌 로물루마냥 왼손을 잘리고 처형당하고 만다.

나중 가선 저들끼리 지침이라도 생겼는지 영지 테러를 할 땐 꼭 빈민촌만을 노렸다.

그럼 소설 속 영주란 놈들은 어떻게 했을까?

돈도 안 되는 빈민.

영지엔 그닥 도움도 안 되면서 흑마법 테러로 번질 수도 있는 자들.

이 소설 속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 놈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빈민은 곧 해충이란 구호 아래, 귀족들은 빈민촌을 불태우고 학살했다.

개중에 쓸만한 이들은 노예로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흑마법사 놈들보다 더한 놈들이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흑마법사들의 테러 대상이 될 수 있단 이유로 그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영지에서 그런 미친 짓은 허락할 수 없다.

단순히 ‘사람 목숨은 무엇보다도 귀하니까!’ 같은 형편 좋은 이유는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빈민은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다.

하위 1프로를 쳐 낸다면, 그다음 하위 1프로가 빈 자리를 메꿀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힘 없는 빈민들이라 해도, 아무런 죄 없이 학살 당한 이들의 원혼도 가벼운 건 아니다.

훗날 쌓이고 쌓인 빈민들의 원혼이 모여 대륙 각지에선 수많은 던전들이 터져 나온다.

흑마법사들의 테러를 막겠다고 한 정신 나간 학살이 결국 더한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물론 내가 위드라 빈민촌을 구한다고 다른 귀족들도 빈민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진 않을 거란 건 잘 안다.

하지만.

광기란 건 전염되기 마련이다.

최초로 빈민 학살을 명령한 그 미친 귀족 놈이 아니었더라면 대륙 전역에 대재앙의 씨앗이 심겨지진 않았을거다.

난 그 시작을 바꾸려는 거다.

빈민들의 학살이 아닌 구원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 녀석이랑 함께.

“가자고. 미친 광기의 시작을 막으러.”

“네! 백작님!”

디아는 내가 말한 광기가 흑마법사들의 만행이라 생각하는지 굳은 결심을 다지며 내 뒤를 따랐다.

* * *

“오랜만이군.”

“음…….”

위드라 빈민촌에 온 난 예전 생각이 솔솔 떠올랐다.

옛 임페라 백작령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물론 이안이 개망나니 녀석 탓이긴 했지만, 베네르 백작 탓도 컸다.

그런 녀석의 영지를 그대로 흡수한 걸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게 참 아이러니했다.

위드라 시장 거리 옆에 붙은 빈민촌.

사실 따로 이름도 없는 녀석이었지만 가까운 시장 거리의 이름을 따 위드라 빈민촌이라 부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 건지, 아님 옛 임페라 백작령과 딱 붙은 영지라 그런 건지 몰라도 위드라 빈민촌은 옛 임페라 백작령과 비슷했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자로 겨우 바람만 막는 게 다인 판잣집.

그마저도 없는 이들은 쓰레기 더미를 쌓아 놓고 집이라 부르고 있었다.

위드라 빈민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기를 잃고 우울함이 가득했다.

한 거지는 잡다한 상인 문양이 그려진 나무 상자들을 잘게 부숴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위드라 시장 거리에서 주워 온 것 같았다.

“으, 으응?”

생기 하나 없는 얼굴로 모닥불을 쬐던 거지 하나.

녀석은 갑작스런 외지인의 방문에 고갤 갸웃했다.

딱히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빈민촌에 외지인이 오는 경우는 드문데다 좋은 이유로 들린 적은 더 적었으니까.

“…….”

디아는 빈민들의 눈빛을 보고 덩달아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 전쟁 고아로 구걸하며 살던 끔찍한 추억이 떠오른 듯했다.

“다들 못 볼 거라도 본 것마냥 쳐다보는군.”

“…그저 두려운 걸 겁니다. 빈민촌에 높으신 분들이 오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후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만 그래.”

“…….”

디아는 잠시 입을 앙다물었다.

빈민들을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자신이 그들과 같은 처지였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아 보였다.

나도 귀족인 이상 빈민 출신의 기사를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길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네 출신 따윈 생각하지 마라. 애초에 내가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역시 알고 계셨군요.”

“뭐. 백작쯤 되면 아는 게 많아지니까.”

“흠.”

디아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말았다.

프리아나나 이슬린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비밀이 많은 남자 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듯했다.

“어디 보자…….”

십중팔구 흑마법사 놈들이 위드라 빈민촌을 노릴테지만, 아직 확신은 이르다.

먼저 요새 수상한 낌새는 없었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자식이! 또 상납금을 밀려? 어디 한번 죽어 볼래?”

빈민촌에서도 후미진 골목에서 들려오는 고함.

사람 사는 데가 그렇듯, 빈민촌이라 해도 저들만의 서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른바 거지 왕초.

그닥 좋은 놈은 아닐 테지만 판잣집 밥 숟가락 개수도 알 정도로 빈민촌에 한해선 빠삭한 놈일 거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멧돼지같이 생긴 털북숭이 남자가 어린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이미 몇은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잔뜩 부어 있었다.

녀석의 주위론 비스무리하게 생긴 놈들이 다른 아이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오늘 밥은 굶을 테니 제발 그만…….”

“하! 밥이야 당연히 굶는 거고! 맞을 건 맞아야지!”

“흐흑…….”

보아하니 어린아이들을 꼬득여 동냥꾼으로 삼는 놈 같았다.

비쩍 마른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니 가슴 한켠이 쿡쿡 찔려 왔다.

“…쯧.”

“…뭐야?”

“왜 애들을 패고 그러냐.”

“…흥! 어디 귀족집 아드님 같은데. 괜한 허세 부리지 말고 꺼지쇼! 뒤지기 싫으면!”

백작령의 주인이 여기까지 행차할 줄은 꿈에도 모르는지, 놈은 다른 부하 녀석들에게 눈짓했다.

“형님! 그냥 줘 패 버릴깝쇼? 돈도 꽤나 있는 놈들 같은데!”

“흐흐! 그럴까?”

“이 새끼들이……!”

디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난 그런 그를 향해 위드라 빈민촌에서의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디아. 명령을 내리겠다.”

“…네! 백작님!”

“가서 정신 좀 차리게 해 줘라.”

디아는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놈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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