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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백작으로 살아남는 법-130화 (130/222)

130화

“잘 지냈냐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타르옌이 내 멱살을 덥썩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일레느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 지금 뭐하는…….”

“아, 괜찮아.”

한소리 하려던 일레느에게 손짓했다.

“…….”

덕분에 말리려던 디아도 움찔거리다 말았다.

“네놈 때문에 무슨 개고생을……!”

“화내는 중에 미안하지만. 넌 누구지?”

“…뭐?”

“내가 깜깜이 숲에 보낸 건 디아 제니스 저 친구 하난데. 넌 누구냐고.”

“그, 그건…….”

내 말에 타르옌은 아차 싶었는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만 뻥긋거렸다.

“흠. 은발을 보니 베로니아 가문 사람 같은데. 혹시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그래! 타르옌 베로니아! 그게 나다!”

“오호. 반갑구만. 베로니아 가문의 차기 당주께서 임페라 백작령까지 와 주시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건…….”

타르옌은 여전히 내 멱살을 움켜쥔 채 입을 오물거렸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좀 놓고 말하지 그래. 때릴 생각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때릴 생각이 있냐고?”

내 도발에 타르옌의 한쪽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있지!”

“흐흐, 그래?”

“자, 잠깐! 타르옌!”

내 면상을 향해 쇄도하는 녀석의 주먹.

이를 뒤늦게 디아가 막아 보려 했지만 거리상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여자한테 얻어맞을 만큼 어리숙한 놈은 아니니까.

…파캉!

주먹에 머금고 있던 붉고 푸른 마법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한순간에 흩어졌다.

“어엇?”

결국 내지른 건 스무 살 남짓한 여자의 가냘픈 솜 주먹뿐.

난 검지 손가락으로 녀석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검지 손가락을 가볍게 말아 꿀밤 주먹으로 막았다.

“…아야!”

덕분에 타르옌의 주먹이 꿀밤 주먹에 부딪혀 버렸다.

진심으로 때리려 했던 건지 내 주먹에 부딪힌 타르옌의 주먹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으윽…….”

“아직도 배운 게 없나?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는 걸?”

“이, 이게……!”

“나야 많이 봐줘서 디스펠만 쓴 거지.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양 손이 잘렸을 거다.”

“그, 그런…….”

양손이 잘린다.

블랭크가 된다는 소리였다.

디아처럼 개사기 블랭크가 아닌, 신에게 버려지고 모든 힘을 잃고 마는 하등 쓸모없는 블랭크.

타르옌은 여전히 분노가 풀리지 않은 듯 날 노려본 채로 뒷걸음질 쳤다.

“…잘 알겠습니다. 백작님.”

디아는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흥!”

타르옌은 한 마디 딴지라도 걸 줄 알았는데 콧방귀 한 번 뀌곤 입을 다물었다.

“…아.”

그런 둘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디아의 왼손에 눈이 갔다.

제니스 기사 학교에서 쓰던 것과는 다른 녀석이었다.

“새로운 건틀렛은 맘에 드나?”

“네? 그야…….”

디아는 새로운 건틀렛을 낀 채로 주먹을 오므렸다 폈다 했다.

“깜깜이 숲에 있던 몬스터 소굴에서 얻은 겁니다. 손에 착착 감기는 게…….”

감상평을 늘어 놓던 디아는 뭔갈 깨달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 혹시……?”

“후후, 내 명령을 훌륭히 완수해 줬는데. 충직한 가신한테 그 정도 선물도 못 해 줄까.”

“으음… 감사합니다, 백작님.”

디아는 고마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긴가민가한 듯했다.

거지꼴을 보니 깜깜이 숲에서 노숙하느라 고생 좀 했을 텐데, 이런 선물까지 줬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렸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그게 어떤 건데.’

따로 하룬한테 부탁해 만든 미스릴 건틀렛이다.

자이겔론드 광산에서만 캘 수 있는 아주 희귀한 금속. 미스릴.

초록빛으로 은은한 광택을 자랑하는 미스릴은 어마어마한 가격은 둘째치고 수준급 대장장이가 아닌 이상 연마도 불가능한 강도를 자랑한다.

아마 가져다 팔았으면 소규모 영지 하난 살 정도로 귀하디 귀한 아티팩트.

지난번처럼 어이없는 일로 건틀렛이 벗겨지는 일은 없을 거다.

팔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나중에 저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알면 까무라치겠지.

“이번 일로 뭘 배웠나. 디아 제니스.”

“…순간의 방심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또?”

“…지키고자 하는 게 있을 때 사람은 더 강해진다는 걸 배웠구요.”

“…크흐!”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였지만 난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지키고자 하는 게 있을 때 사람은 더 강해진다.’

디아가 소설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마다 내뱉은 대사니까.

그걸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이야.

“뭐라고?”

날 째려보느라 바빴던 타르옌이 잘 못 들었는지 되물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다시 내뱉긴 쑥쓰러운지 대충 얼버무렸다.

“자, 그럼 약속했던 대로 네가 가진 비밀을 알려 줘야겠지.”

“저, 정말입니까?”

이미 미스릴 건틀렛을 선물로 줘 놓고 또 뭔갈 알려 주겠다는 말에 녀석은 놀라 되물었다.

“그래. 그 건틀렛은 내 밑에 들어온 기념으로 준 거고. 시킨 대로 깜깜이 숲에서 잘 살아남았으니 약속한 비밀을 하나 알려 줘야겠지.”

“오오…….”

방금까지 악덕 영주한테 사기 취업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던 녀석이 지금은 어느새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시킬 건 시키고, 그만한 보상은 제대로 치룬다.

충성심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간단한 공식이다.

이 쉬운 걸 돈 아낀다고 안 하고 그러니 반발심이 드는 거다.

“검은 잘 가지고 있나?”

“검 말씀이십니까? 그야…….”

디아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평범한 철검을 뽑아 들었다.

도신에 흙먼지가 잔뜩 껴 있긴 했지만 이 하나 빠진 곳 없이 검 자체는 깔끔했다.

“줘 봐라.”

“…네.”

디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검을 내게 건넸다.

제니스 기사 생도 시절부터 써 왔던 평범한 철검.

오랫동안 써 온 터라 상당히 애정이 가 있긴 할 거다.

그래 봐야 백작인 내겐 기사 생도들에게 지급되는 평범한 철검이다.

잠깐 구경 좀 하다 말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겉보기엔 이미 내가 가진 용린검이 훨씬 좋아 보이기도 했고.

‘그럴 리가 없지.’

난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디아의 철검을 내려다봤다.

[…….]

우웅…….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검이 옅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태를 풀지 않은 채 평범한 철검인 척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

난 녀석을 든 채로 저택 뒤편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카앙! 캉!

연무장에선 칼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서 보니 프리아나가 홀로 연습용 목각 인형을 세워 둔 채 검술 연습에 한창이었다.

“…백작님!”

녀석은 날 보자마자 연습을 멈추곤 고개를 숙였다.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따로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니 마저 하라구.”

“예, 알겠습니다.”

프리아나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온 타르옌과 디아를 흘긋 쳐다봤다.

디아는 거지꼴로 저택을 돌아다닌 게 신경 쓰였는지 괜히 머릴 긁적였다.

“여기있군.”

연무장에 찾으러 온건 하룬이 쓰던 고정쇠.

쇳덩일 놀고 레버를 돌리면 단단히 고정되는 대장간에서 쓰는 도구였다.

끼기긱……!

난 거기에 디아의 철검을 끼워 넣었다.

이제 슬슬 본체를 보여 줄 만한데도 녀석의 의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고.’

난 곧장 용린검을 뽑아 들곤 오러를 뽑아냈다.

흉악한 기세로 오러를 풀풀 뿜어내던 용린검은 그대로 고정된 철검을 향해 쇄도했다.

콰아앙! 콰앙!

“으아악! 백작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다른 부연 설명도 없이 대뜸 검이 부러져라 휘두르는 모습에 디아가 허겁지겁 날 말렸다.

“뭐하긴. 비밀 알려 주러 왔지.”

“지금 이게 비밀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백작님께는 평범한 철검이어도 제겐 소중한 검이라구요!”

“그럴까?‘

난 디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녀석의 검을 흘긋 쳐다봤다.

분명 한 줌의 오러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라면, 방금 일격에 산산조각 났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녀석의 검은 이 하나 빠진 데 없이 멀쩡했다.

우우웅!

화가 난 듯 떨리긴 했지만.

“이, 이럴 리가?”

디아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쯤 되면 슬슬 정체를 드러낼 만한데도, 녀석은 여전히 의태를 풀지 않았다.

“독하다 독해. 이래도 버텨?

[…….]

“그럼 어쩔 수 없지. 프리아나!”

“네! 백작님!”

내 부름에 다시 검술 연습이 한창이던 프리아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이 검. 부러뜨려라.”

“네!”

일말의 의문도 없이, 프리아나는 곧장 오러를 뽑아내 자셀 잡았다.

검술 랭크 6이 머금은 오러 소드.

이거면 녀석도 몸 성히 있진 못할 거다.

그래 봤자 부러지진 않겠지만.

‘…않겠지?’

“하아압!”

프리아나는 일격에 검을 두 동강 내려는 듯 짙고 강렬한 오러를 검에 머금었다.

쐐애애액!

아르나 가문의 검이 쇄도하려던 그때.

…파아앗!

[으악!]

고정쇠에 단단히 박혀 있던 검이 쑥 빠졌다.

순식간에 검이 아닌 다른 형태를 띈 녀석은 고정쇠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콰앙!

하지만 프리아나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공중에 솟구친 녀석은 그대로 프리아나의 검에 튕겨져 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윽……! 야 이 미친놈아!]

“호오……!”

검을 한 번 휘두른 프리아나가 녀석의 욕지거리에도 눈살을 찌푸리긴 커녕 신기하다는 눈빛을 띄었다.

그야 에고 소드는 프리아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진 못했을 테니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이, 이 망할 놈이…….]

에고 소드 황혼.

드워프들의 왕국 자이겔론드에서 흐르고 흘러온 개사기 아티팩트.

말 그대로 자아를 갖은 검이다.

“에고 소드?”

타르옌은 뜬금 없는 에고 소드의 등장에 고갤 갸웃했다.

하지만 베로니아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아예 처음 보는건 아닌 듯했다.

‘베로니아 가문에도 있긴 하니까.’

여기서 제일 놀란 건 다름 아닌 검의 주인, 디아였다.

“이, 이게 무슨……?”

[아하하…….]

황혼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릴 긁적였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꼬마 아이처럼 생겼다.

황혼이란 이름에 걸맞게 타오를 듯이 붉은 머릿결.

거기에 양갈래로 묶은 스타일은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꼬마 아이 같은 느낌이 강했다.

흰색 타이즈 비스무리한 옷은 딱 봐도 평범한 재질의 옷감 같지는 않았다.

‘어디 게임 마스코트처럼 생겼구만.’

에고 소드라고 다 이런 귀염귀염한 생김새는 아니다.

후에 크로드가 쓰는 파산검이 자아를 가질 땐 검 주인마냥 칙칙한 아저씨 모습이 강했으니까.

황혼이 생겨난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어린애 같은 생김새를 가진게 대충 이해는 갔다.

“이게 네가 가진 첫 번째 비밀이다. 디아 제니스.”

“허어…….”

사실 디아가 궁금한 건 자기한테 왜 랭크 시스템이 없냐는 거겠지만, 녀석이 가지고 다니던 검이 에고 소드란 것도 꽤나 신박한 비밀일 거다.

이만하면 비밀을 알려 주겠단 약속에도 어느정도는 수긍할 거다.

“에고 소드 황혼. 맞나?”

[어, 어떻게 거기까지…….]

“그냥 뭐. 책에서 봤지.”

[…….]

황혼은 지금껏 숨겨 온 비밀이 드러난 게 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황…혼……?”

[으음…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대체 이게 뭔…….”

수년간 함께해 온 평범한 철검이 사실은 에고 소드였다니.

터무니없는 사실에 충격 받은 디아는 현기증이 나는 듯 머릴 부여잡았다.

“대체 왜 황혼……? 이라는 친구가 제 곁에 있었던 거죠?”

“으음… 간절한 바람에 우주가 도와준 거라 생각하지.”

“…….”

주인공 버프란다 이 사기캐 녀석아.

라고 하면 뭔 말인지 모를 테니 대충 얼버무렸다.

디아는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했다.

왜 황혼이 자기 손에 있었던 건지. 그걸 이안 임페라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건지. 황혼이 왜 기사 학교에서 지급한 철검에 섞여 있었던 건지.

“백작님……?”

“궁금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겠나? 한가롭게 앉아서 스무고개라도 해야 할까?”

“스무고개? 그건 또 뭔…….”

“날 섬기기로 한 대가가 뭔진 잘 알았겠지. 디아 제니스.”

“…아.”

날 섬기면 디아가 가진 비밀을 알려 주겠다.

그게 녀석과의 약속이었다.

이내 정신을 다잡은 디아는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다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백작님.”

“후후.”

난 어느새 충직한 부하가 된 주인공 녀석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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